남을 감동케 한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남을 감동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영화 버킷리트스트에서 들은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대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을 감동케 한 적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남의 가슴을 울리게 할 정도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로지 나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 살았을 뿐 남을 위해서 살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직장생활 할 때 그랬다.
직장생활 20년 했지만
직장생활을 20년 했다. 더 이상 쓸모 없어서 버려질 때까지 이곳저곳 전전하며 붙어 있었던 것이다. 살기에 바쁘고 생존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옆도 뒤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남에게 도움을 준다든가 보시를 한다든가 나눈다든가 하는 이런 행위를 해 본적이 없다. 아마 불교를 만나지 못했다면 계속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불교를 접하고 나서 보시라는 것을 알았다. 또 보시를 하면 공덕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을 알았다.
업과 업의 과보는 인과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업과 업의 과보가 왜 불교에서 강조되는 것일까? 붓다아비담마에 따르면 “지혜는 기본적으로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지혜이다.”(72쪽)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업보를 아는 것이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업과 업보를 아는 것은 정견에 해당된다. 이제까지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업보를 아는 것도 정견에 속한다니 놀라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업과 업보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되고 정견에 속하는 것일까?
왜 업과 업보를 아는 것이 정견에 속하는가?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이는 정견의 정형구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S45.8)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사성제를 아는 것만 것 정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업과 업보를 아는 것 역시 정견에 해당된다. 그래서 “세간적인 올바른 견해는 우리자신이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업과 업의 과보가 정견이라는 사실에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을 보면 부처님은 두 가지 정견이 있다고 했다. 이는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라고 했다.
경에 따르면 세간적 정견과 출세간적 정견의 차이점은 번뇌의 유뮤에 대한 것이다. 번뇌에 영향을 받는 정견과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두 가지 정견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세간적 정견으로서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출세간적 정견으로서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고 했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정견인 것이다. 이외 같은 세간적 정견을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고 말한다. 빠알리어로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a-sammādiṭṭhi)’라고 한다. 이는 ‘kamma(업)+sakata(자기, 자신)+sammā(바른)+diṭṭhi(견해)’로 분해가 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업자성정견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업과 업보를 아는 것이 정견이고 지혜라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지만,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는 어떤 것인가? ‘보시도 있다. 제사도 있다. 공양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홀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있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
세간적 정견은 ‘있다’라고 아는 것이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고 아는 것이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없으면 저 세상은 없을까? 단멸론자들은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과법칙에 따르면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도 있기 마련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따른다. 업을 지으면 업보가 따름을 말한다. 업보는 시간을 두고 받는다. 이를 ‘업이숙(kammavipaka)’이라고 한다. 업이 익어서 과보로 나타남을 말한다. 행위를 한다고 모두 즉각 받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 나타난다. 이번 생에 못 받으면 다음 생에 받는다. 다음 생에 받지 못하면 그 다음 생에 받을 것이다.
한번 지은 행위는 언젠가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몸이 무너져 죽으면 마음도 죽어서 모든 것이 단멸되는 것이 아니다. 죽어도 지은 행위가 있다면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재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M117.6)라고 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이 정견인 것이다. 이것이 세간적 정견, 즉 업자성정견인 것이다.
왜 업과 업보를 아는 것이 지혜의 영역인가?
직장생활 20년 동안 보시를 해 본적이 없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이었다. 이런 삶에 대하여 티벳불교는 ‘하하(下下)’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했다.
보리도차제론에 따르면 상사도, 중사도, 하사도 이렇게 세 가지 단계가 있다. 각 단계마다 또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이중에서 가장 최하위가 하하, 즉 ‘하중의 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삶은 하하축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하여 ‘벌레 같은 삶’이라고 한다. 축생들이 사는 방식을 말한다.
‘남을 감동시켜 본적이 있는가?’라며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봉사하며 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인색하게 살아 갈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지혜인가?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는 지혜를 말한다. 인과를 모르는 것이다. 인과를 모른다는 것은 연기법을 모른다는 것과 같다.
인과의 법칙을 안다면 보시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보시하면 공덕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선악의 과보도 있다.”라고 아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불선과보를 받고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선과보를 안다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여덟 가지 사례를 보면
불교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아낌 없이 주라는 것이다. 그것도 티를 내지 말고 주라고 했다. 이렇게 아낌 없이 주는 행위는 지혜로운 행위에 속한다. 보시를 하면 공덕행이 되어서 선과보를 받을 것이라고 아는 지혜를 말한다. 따라서 보시는 지혜로운 자가 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공덕행이 되는 여덟 가지 유익한 마음이 소개 되어 있다. 세간적 정견에 기반한 아름다운 마음이다. 여덟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
2)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은 마음
3)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4)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
5)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
6)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은 마음
7)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8)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
여기서 지혜가 결합했다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을 말한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자극받지 않았다는 것은 자발성을 말한다.
여기 보시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자극받지 않고 보시하고, 또한 보시할 때 기쁨을 느낀다면, 그는 위 여덟 가지 마음 중에 어디에 속할까? 첫번째에 해당될 것이다. . 보시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선한 행위를 하면 선과보를 받는다’라는 사실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지혜가 결합된 마음이 된다.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보시할 줄 아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덟 가지 큰 유익한 마음에 대한 예는 다음과 같다.
유형1)
한여자가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즐겁게, 자발적으로 탑에 꽃을 바친다.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
유형2)
한 소녀가 친구에 의해 설득을 받은 후에 즐겁게,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법문을 들으러 간다.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은 마음)
유형3)
한 소년이 거지에게 기쁘게 자발적으로 얼마간의 돈을 주지만 업에 대한 지혜는 가지고 있지 않다.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유형4)
어떤 사람이 교장으로부터 학교에 약간의 돈을 기부하라는 요청을 받은 후에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지혜없이 100달러를 기부한다.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
유형5)
한 소녀가 중립적인 느낌으로 바닥을 청소하지만 그것이 해야 할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
유형6)
한 남자가 어떤 출가 수행승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중립적인 느낌으로 나무를 쪼개지만 그것이 공덕이 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은 마음)
유형7)
한 여자가 담마를 논하는 책을 의미도 모르고, 업과 업의 과보도 모른 채 읽는다.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유형8)
한 소녀가 어머니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기쁨 없이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부모의 옷을 세탁한다.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
아이와 함께 절에 가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함께 법당에 가서 삼배를 할 때 아이는 따라 할 것이다. 이때 아이는 여덟 가지에서 어떤 유형에 속할까? 여덟 번째 ‘평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에 해당될 것이다. 아이는 아직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지혜가 없어서 ‘지혜가 결합하지 않은’ 마음 상태이다. 부모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서 따라 했기 때문에 ‘자극받은 마음’이 된다. 단지 절에 따라가서 절하는 것을 보고 절을 했을 때 무표정할 것이다. 그래서 ‘평온이 함께한’마음이 된다. 여덟 가지 공덕행 중에 최하위에 속한다.
여덟 가지 공덕행 중에서 최상위는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다.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 이는 업자성정견에 따른 지혜의 마음이다. 적극적인 공덕행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면 기쁨이 함께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한여자가 업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즐겁게, 자발적으로 탑에 꽃을 바친다.”라고 했다.
사람을 감동케 하려면
누군가를 찾아 갈 때가 있다. 빈손으로 가는 것 보다는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하면 마음이 기쁘다. 선물은 주어서 좋고 받아서 기분 좋은 것이다. 절에 갈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절에 갈 때 빈손으로 가면 안된다. 절에서 사는 수행자들은 재가불자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반드시 공양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절의 유지를 위한 보시금도 준비해야 한다. 이때 공양물을 준비하고 보시금을 준비할 때 기쁨이 일어난다.
안거중인 스님들을 찾아 뵙고자 한다. 평소 존경하는 스님이 있다면 공양물과 보시금을 지참하고 난 다음 먼 길을 달려 가는 것이다. 가서 삼배를 하고 공양을 했을 때 기쁨이 일어난다. 이는 커다란 공덕행이다. 보시를 하면 공덕이 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세간적 지혜는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공덕행을 한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수행자를 찾아 뵙고 공양을 올린다. 이는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마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마음이 사람을 감동하게 만들 것이다.
2020-07-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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