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사(老病死)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물음은 누구나 한번쯤 해 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물질의 근본을 탐구하는 과학자들도 이런 의문을 한다는 것이다. 몇 해전 공중파방송에서 본 프로가 있다. 스위스에 있는 입자가속기센터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폴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유튜브에서 본 명진스님의 젊은 시절 고뇌도 이와 유사하다.
요즘 유튜브의 시대이다. 컴퓨터를 켜면 곧바로 유튜브로 들어간다. 이삼주전부터 포착된 것이 있다. 그것은 명진스님에 대한 것이다. 지금 유튜브에는 ‘스님은 사춘기’ 시리즈가 계속 업로드 되고 있다. 명진TV에서 만든 것이다.
스님은 사춘기, 이 말은 명진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명진스님의 자전적 에세이라 볼 수 있는 책인데, 이 책을 근간으로 하여 이제 동영상으로 나오기에 이르렀다.
최근 며칠동안 '스님은 사춘기'를 보았다.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어서 계속보게 되었다. 스님의 구수한 입담이 특징이다. 스님의 출가와 젊은 시절, 20대 때 이야기이다. 현재 20화 ‘술집노파에게 삼배하고 법문을 듣다’까지 나왔다.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몹시 궁금하다.
명진스님과의 인연
명진스님과 인연이 있다. 한번 뵌 적이 있다. 스님이 종회의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당시 조계사 맞은 편 두산위브 오피스텔에 거처가 있었는데 불교활동가와 함께 찾아 간 것이다. 그때 당시 만남에 대하여 ‘교학과 수행 양 날개로 더 높이 더 멀리’(2015-03-18)라는 제목의 포스팅이다. 벌써 5년전의 일이다.
명진스님은 블로거 진흙속의연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님은 만나자마자 두 손을 맞잡고 “이분이 바로 진흙속의 연꽃님입니까? 블로그 잘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마치 골방에서 글이나 쓰듯이 은둔하며 살고 있는 보통불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터넷의 영향이 크다. 인터넷의 바다에 글을 올리면 알려지기 때문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힘을 받게 한다. 미천한 보통불자에게도 관심을 보여주는 모습에서 감동받은 것이다. 대개 무시하기 마련이다.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누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은 잘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 겸손했다. 이와 같은 겸청(兼聽)은 리더의 덕목에 속한다.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겸청의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대중이 따르는 리더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통적으로 겸청이라는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저는 ‘이 사람은 동등한 배려로 섭수해야 한다.’ 라고 알면, 그 사람을 동등한 배려로 섭수합니다.”(A8.24)라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동사(同事)에 대한 것이다. 동사는 고락을 함께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동등한 배려이다. 리더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 배려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등한 배려(同事)’야 말로 리더의 덕목중의 하나이다.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명진스님에게서 겸청의 리더십을 보았다. 이후 각종 모임에서 스님을 보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수원에서 길거리법회 가진 것이다. 2017년의 일이다. 용주사 비대위에서 준비한 것이다. 원래 경기불교문화원에서 봉행하려 했으나 문을 잠궈 버리는 바람에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길거리 법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청할 줄 아는 리더십, 명진스님의 길거리 열린법회’(2017-04-23)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길거리법회에서 스님은 열린법회를 했다. 열린법회에서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스님은 하나의 경을 낭송했는데 “정의를 따르다가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면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이 귀에 들어 왔다. 어느 경인지 몹시 궁금했다. 스님에게 물어 보니 고잣따경이라고 했다. 고잣타경은 생소한 것이다. 찾아 보니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임을 알았다. 고닷따(Godatta)장로가 읊은 십사련 게송을 말한다. 스님이 읊은 고닷따존자의 게송의 하일라이트는 다음과 같다.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
마지막 게송이 인상적이다.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 스님의 결연한 마음을 잘 나타내는 게송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이 게송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을 보면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 (Thag.670)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법하다는 말은 담메나(dhammena)를 번역한 말이다. 담메나는 영어로 ‘Justly, righteously’의 뜻이다. 따라서 스님이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여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무리가 없다.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
2015년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스님은 책을 한권 주었다. 스님의 자전적 일대기라 볼 수 있는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이다. 스님은 왜 사춘기라고 했을까? 책을 다 읽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앞으로 유튜브를 계속 시청하다 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스님은 책의 겉 표지에 사인까지 해서 주었지만 아직까지 책을 읽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유튜브에 ‘스님은 사춘기’ 시리즈가 계속 나오게 됨에 따라 빠짐없이 보고 있다. 보다 보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확실히 책보다 유튜브이다.
스님이야기는 재미 있다.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왜 그럴까? 일반사람들과 사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스님의 출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님이야기에서 출가이야기를 빼면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스님을 만나면 늘 물어 보는 말은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는 말이다. 재가불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한다. 그럼에도 가장 궁금한 것은 스님의 출가에 대한 것이다.
명진스님은 왜 출가했을까? 동진출가도 아니고 나이가 먹어서 출가한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출가한 것이다. 인생의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출가했다고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사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궁금해서 출가했다고 한다. 이는 생계형출가와 도피형출가와는 다른 것이다.
스님의 출가이유를 보면 매우 타당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봉착했을 때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수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데 대개 시간 지나면 해결되는 것들이다. 이런 문제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죽음에 대한 것이다. 스님도 죽음에 대한 문제로 출가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유튜브를 보면 가정사가 비극적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었고, 동생도 젊어서 죽었다. 이와 같은 죽음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사람은 왜 죽는 것일까?’라며 죽음에 대해 천착하면 반드시 ‘왜 살아야 하나?’라며 삶에 대하여 천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존재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랏타빨라가 출가한 이유
명진스님이 출가한 것은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진정한 출가의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랏타빨라의 경’(M82)에서 랏타빨라가 출가한 이유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을 보면 네 가지 출가이유가 있다. 첫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는 것이다.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어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두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말한다. 세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네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는 것이다.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을 말한다. 랏타빨라는 이와 같은 네 가지 문제가 풀리지 않아 출가했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는 매우 유명하다. 옛날부터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접하고 출가를 결행했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사춘기’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스님을 사모하는 여인에게 “생사문제를 해결하면 세상으로 돌아 갈 것이다.”라고 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스님들의 출가이유는 다양하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들어 보면 갖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생사와 관련된 절박함으로 인한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출가이유를 물어보면 회피하는 것인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출가이유는 생사문제에 대한 해결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이 말려도 출가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랏타빨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마음 먹었다. 장자의 아들이자 여러 여인의 남편인 양가집 자제가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M82.4)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경전속에서 보는 출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출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가르침을 접하지 않고 출가한다면 생계형출가나 도피형출가가 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 즉 죽음과 삶에 대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출가를 결행할 것이다. 이런 출가는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랏타빨라는 부모의 만류에도 단식투쟁을 하며 출가를 결행했다. 랏타빨라는 공양을 올리는 꼬라비아 왕에게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몸이 부서지면 떨어지니 왕이여, 이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진실한 수행자의 길이 보다 탁월합니다.”(M82.54)라고 말했다. 청정도론 사수념에 소개 되어 있는 게송에서는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Vism.8.12, JA.IV.122)라고 했다. 눈물로 막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라며 뿌리치는 것이다.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노병사(老病死)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럼에도 나중에 해도 될 일을 할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율장대품을 보면 ‘지체 높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 바라나시에서 귀공자들이 숲으로 놀이를 갔다. 그 중에 한명은 기녀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기녀가 재물을 가지고 도망가버렸다. 이에 공자들은 기녀를 찾아 숲속을 헤매던 중에 명상을 하고 있는 부처님을 만났다. 공자들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자를 보았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공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에게 어떠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신을 찾는 것인가?”(Vin.I.23)라고 말씀했다.
세상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으로 살고 있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 보면 죽음에 대해 잊어버린다. 아니 애써 생각하려 않은 지 모른다. 여자를 찾는다는 것은 감각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 보면 시간이 잘 갈 것이다. 어느 순간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감각을 즐길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을 때 삶의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부처님은 여자를 찾지 말고 먼저 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여기서 자신은 등불에 비유된다. 그래서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라고 했다.
법구경에서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열한가지 불이 있다. 이는 “탐욕의 불, 성냄의 불, 환상의 불, 질병의 불, 늙음의 불, 죽음의 불, 슬픔의 불, 비탄의 불, 고통의 불, 절망의 불, 과도한 노력의 불”(DhpA.III.103)을 말한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한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경’에서는 여섯 가지 감역에서 불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법구경 주석에서 열한가지불과 연소의경에서 열한가지 불은 약간 내용이 다르다. 그 중에서 ‘과도한 노력의 불’이 있다. 어떤 뜻일까? 이는 상윳따니까야 제1장 제1절이라고 볼 수 있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게송에서는 “내가 머무를 때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S1.1)라고 표현되어 있다.
수렁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점점 빨려 들어간다. 이는 잘못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함을 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S1.1)라고 말씀했다.
명진스님의 유튜브 이야기 ‘스님은 사춘기’를 들어 보면 하나의 일관된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식은 과거 부처님들도 그런 인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위빳시 붓다의 출가
디가니까야에 ‘비유의 큰 경’(D14)이 있다. 경에서는 과거 출현했던 부처님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과거칠불에 대한 것을 보면 한결같이 똑같다. 출가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에 어느 부처가 출현해도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출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과거부처님들은 어떻게 하여 출가하게 되었을까? 경전상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위빳시(Vipassi) 부처님이 있다. 91겁 전에 출현한 부처님이다. 위빠시붓다는 고따마붓다와 마찬가지로 사문유관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성밖으로 나갔을 때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출가자를 본 것이다.
왕자가 오로지 궁안에서 살다가 처음 늙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충격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보게 마부여, 나도 늙게 되고 늙음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인가?”(D14.43)라고 말했다. 천년만년 이 젊음이 그대로 유지될 것같이 보였던 왕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래서 “아아, 태어난 자에게 늙음이 시설된다니 참으로 태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혐오스럽다.”(D14.43)라며 괴로워하고 비탄스러워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왕자는 병든 사람을 보았다. 왕자는 병든 사람을 보고서는 “나도 병들게 되고 질병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인가?”라며 생각했다. 또 왕자는 죽은 사람을 보았다. 죽은 사람을 보고서는 “나고 죽게 되고 죽음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인 것?”라며 괴로워하고 비타스러워했다. 그래서 유원나들이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왕자는 병듦, 늙음,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출가자를 보았다.
왕자는 출가자를 보자 궁금했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은 출가자를 보자 “이보게, 마부여, 출가한 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마부는 “왕자님, 그는 출가자 곧, 참으로 원리를 따르고, 참으로 고요한 삶을 영위하고, 참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행하고, 참으로 공덕을 지어내고, 참으로 폭력을 여의고, 참으로 존재에 대해 연민하는 자입니다.”(D14.60)라고 설명했다.
출가자에게는 여섯 가지 덕목이 있다. 원리를 따르는 삶, 고요한 삶, 착하고 건전한 행위, 공덕행, 그리고 폭력을 여의고 연민하는 삶이라고 했다. 여기서 폭력을 여읜다는 것은 ‘연민(karuṇā)’을 뜻하고, 존재에 대하여 연민한다는 것은 ‘자애(metta)’를 뜻한다. 출가자는 연민과 자애로 가득한 자를 말한다. 출가자는 근본적으로 존재에 대한 자비가 넘치는 자를 말한다.
왕자는 출가자를 보고서 출가하게 되었다. 출가 근본 원인은 생노병사에 있다. 죽음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데 출가자를 보고서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출가해서 생노병사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왕자 비빳씬은 그곳에서 머리와 수염을 깍고 가사를 걸치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했다.”(D14.62)라고 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출가자를 보고서
스님들을 보면 가장 궁금한 것이 있다. 그것은 출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의 출가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부분 스님들은 침묵한다. 재가불자가 스님에게 출가이유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일까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스님과 대담프로를 보면 사회자가 “스님은 어떤 연유로 출가했습니까?”라며 물어 본다. 청중을 대신해서 물어본 것이다.
스님마다 출가이유가 있을 것이다. 차마 말 못할 사연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생계형이나 도피형이라면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했다고 말하면 수긍할 것이다.
출가는 죽음의 문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출가는 과거에 출현했었던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물론 고따마붓다도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 이처럼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은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 위빳시 붓다 역시 왕자로 있을 때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출가자를 보고서 출가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이상의 네 가지를 보고 출가한 것은 모든 보살의 전통이고 습관이다. 다른 보살도 비빳씬 왕자처럼 이와 같이 오래 오래 본다. 단지 우리의 보살은 네 가지를 하루 안에 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읨을 일으켜, 아노마(Anoma) 강변의 언덕에서 출가했다. 그 때 라자가하에 도착하자 거기서 빔비싸라 왕에게 “현자여, 왜 출가했습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노인, 병자를 보고, 목숨을 다한 죽은 자를 보고, 가사를 걸친 출가자를 보고, 왕이여, 저는 출가했습니다.’라고 말했다.”(Smv.457)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은 공통적으로 노, 병, 사를 보고 출가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보고서 “태어남이라는 것은 혐오스럽다.”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부질없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부왕은 왕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에 묶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하지 못하도록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기게 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과거 모든 부처님들은 네 가지를 보고서 출가했다. 그것은 노인, 병자, 죽은 자, 출가자를 보고서 출가한 것이다. 여기서 태어남은 빠져 있다. 태어남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출가자가 들어가서 노, 병, 사, 출가자가 된 것이다. 노, 병, 사를 보고서 태어남이 혐오스런 것을 알고, 출가자를 보고서 길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명진스님의 죽음에 대한 천착이 출가로 이끈 것은 출가이유로 타당한 것이다.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 출가자들은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한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다 보면 삶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로 귀착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고 출가한다. 그렇다면 과거 부처님들은 출가하여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는 명백히 니까야에 실려 있다. 모든 부처님들은 연기법을 깨달았다. 이는 먼저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어야 한다.
“아아, 참으로 이 세상은 고통에 빠져 있다.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이 늙고 죽은 괴로움의 여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어떻게 이 늙고 죽는 괴로움의 여읨에 관해서 알 수 있을 것인가?”(D14.65)
위빳시붓다는 출가하여 이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위빳시붓다의 독백에 따르면 결국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에서 해방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사유하다 보니 연기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연기법이라고 자신있게 답해야 한다. 이는 위빳시 붓다가 “무엇이 있을 때에 늙고 죽음이 있는가? 무엇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나는가?”(D14.64)라며 깊이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과거 모든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연기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원리로써 정해져 있는 법칙을 발견해 낸 것이다. 이는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써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써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연기법은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정해져 있는 법칙이다. 연기법은 또 중력의 법칙처럼 이미 확립되어 있는 법칙이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부처가 출현할 때 마다 발견한 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를 보면 명백하다.
빠띳짜는 조건을 뜻하고 사뭅빠다는 연이어 일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연기법은 조건에 따라 연이어 발생하는 법을 말한다. 그래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20)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빳시 붓다는 출가하여 생노병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과거 모든 부처님이 그러했듯이 연기법을 발견했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였을 때 “태어남이 있을 때에 늙고 죽음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D14.65)라는 사실에 대하여 지혜로서 꿰뚫어 본 것이다. 이어서 “무엇이 있을 때 존재가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집착이 있을 때 존재가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D14.65)라고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알게 되었을 때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D14.65)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태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해법을 제시했다. 연기를 역관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보살 비빳씬에게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원리들에 대한 눈이 생겨나고, 앎이 생겨나고, 지혜가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빛이 생겨났다.”(D14.69)라고 했다. 마치 어두운 방에 전구가 켜졌을 때 일시에 환해지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오취온에 대하여 발생과 소멸을 보았다. 그래서 “물질은 이와 같고, 물질의 소멸은 이와 같다. 느낌은…”라고 관찰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취온)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집착을 여의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D14.69)라고 했다.
붓다의 길따라
부처님을 깨달은 자라고 말한다.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연기법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왜 과거에 부처님들이 출현했을까? 이는 정법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에 따르면 위빳시붓다는 91겁 전에 출현했고, 시키붓다는 31겁 전에 출현했다. 60겁의 공백이 있다. 정법이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고 정법 없는 시간은 한량없이 긴 시간임을 알 수 있다.
부처가 출현했다는 것은 연기법을 발견했다는 것과 같다. 과거 부처님이 발견했던 그 길로 가서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고 한 것이다.
아름다운 고대도시는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발견했었다. 그러나 정법이 변질되고 훼손되었을 때 정법은 사라지고 만다. 다시 암흑의 시대가 시작된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는 생사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고따마붓다가 “나는 전생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S12.6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이에 대하여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12.65)라고 했다. 팔정도를 말한다. 이처럼 부처가 출현하면 생사문제가 해결된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이 발견한 길로 가야 한다. 붓다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이 있다. 생노병사에 대한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한 해결방법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명진스님의 스님의 사춘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스님 이야기는 무엇이든지 흥미를 끄는데 특히 출가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런데 명진스님의 출가이유를 보면 죽음과 삶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다. 또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스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2020-08-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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