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빛나는 마음이 오염되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13. 11:23

 

빛나는 마음이 오염되는 것은

 

 

끊임없이 일을 한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모든 감각기능을 동원하여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일을 한다. 이런 일은 죽어서야 끝날 것이다.

 

일을 하지 않고 살수 없을까? 실망스럽게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라면 프로그렘된 로보트와도 같다고 본다. 태어남 자체가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유기체로 보기 때문이다.

 

왜 일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신교라면 창조주가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오늘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은 이전에 나의 행위에 따른 것으로 본다. 이를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 할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불교에서는 마음을 세분화했다. 이제까지 지구에 출현한 어느 종교도 마음에 대하여 세밀히 다룬 종교가 없다. 그런데 불교는 마음을 쪼개고 쪼개서 그 궁극을 보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오온을 들 수 있다.

 

오온은 색, , , ,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 중에 육체와 관련된 것은 단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네 가지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마음과 마음부수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서 가장 핵심은 마음이다. 그래서 법구경 1번 게송에서는 마음과 마음부수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신이 사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뒤따른다.”(Dhp.1)

 

 

정신은 사실의 선구라고 했다. 이 말은 마노뿝방가마 담마(Manopubbagamā dhamma)’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마노는 정신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마음을 뜻하는 찟따, 윈냐나, 마노는 쓰임새가 구분되어 있지만 때로 구분없이 마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노뿝방가마 담마에서 담마는 무슨 뜻일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덕성으로 담마이고, 둘째는 가르침으로서 담마이고, 셋째는 경전구절로서의 담마이고, 넷째는 비물질적 존재로서의 담마이다. ‘마노뿝강가마 담마에서 담마는 네번째 비물질적 존재로서의 담마를 말한다. 이는 오온에서 수, , 행을 말한다.

 

마음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하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의 대상이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상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이다. 눈의 대상은 형상이고, 귀의 대상은 소리임을 말한다. 형상을 보았을 때 이를 인지했다면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소리를 들었을 때 이를 인지했다면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마음과 마음부수와의 관계는

 

마음은 마음부수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다. 갑자기 저절로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이런 경우는 있을 것이다. 갑자기 생각이 떠 오른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마음의 문(意門)’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때 마음의 문도 눈처럼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본다. 생각이 떠 올랐다는 것은 우연히 떠 오른 것이 아니라 과거 경험했던 것이 떠 오른 것이다. 전혀 경험하지 않은 것이 떠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 경험한 것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이를 마하야나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과 마음부수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느낌, 지각, 형성이라는, 이러한 존재의 다발은 정신을 선구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하여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와 같은 것은 아니다. 마음이 단지 선구적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마음부수(cetasika: 心所)의 도움을 받아 일어남을 말한다.

 

마음과 마음부수와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마을의 폭력사태 비유가 있다. 여러 사람이 마을에서 함께 폭력사태를 일으켰다면, 폭력사태를 유발하게 만든 자가 있을 것이다. 일종의 주동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에서 주동자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과 마음부수는 동시에 발생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이 앞서가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이 사실의 선구이고(Manopubbagamā dhamma)”라고 하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manoseṭṭhā manomayā)”라고 한 것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

 

마음은 복잡미묘한 것이다. 내버려 두면 불선한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본래 탐, , 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탐욕과 성냄 등 불선법을 지니고 태어났다. 어린 아기가 순진해 보이지만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서서히 탐욕, 성냄 등 잠재성향이 발현되는 것이다.

 

잠재성향은 중2 때가 되면 폭발적으로 발현된다. 식욕에 이어서 성욕이 일어나는 것은 잠재된 성향이 발현된 것으로 본다. 이는 어쩌면 마치 프로그램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욕에 대하여 자연의 거대한 음모로 보기도 한다. 개체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자손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마음이 있고 마음부수가 있다. 마음은 마음부수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마음부수가 일어났느냐에 따라 현재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부수는 모두 52가 있다. 그 중에는 해로운 것도 있고 유익한 것도 있다. 해로운 것으로는 탐욕, 성냄, 자만 같은 것이다. 모두 14가지가 있다. 유익한 것으로는 믿음, 양심, 무탐, 무진 같은 것이다. 모두 25가지가 있다. 이처럼 불교는 마음을 세분화해 놓았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원자의 구조를 밝혀 내는 것과 같다. 마음을 분석해 보니 모두 52가지 마음부수가 있고, 세간의 마음에는 모두 89가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래서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했을 것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

 

마음을 알면 마음을 제어할 수 없다. 마음의 구조를 알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음을 말한다. 아비담마논장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매우 세밀하게 밝혀 놓았다. 심지어 현세의 마음뿐만 아니라 과거의 마음도 밝혀 놓았다. 이것은 과보심을 말한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한다. 89가지 마음도표를 보면 해로운 마음, 유익한 마음, 과보로 나타나는 마음, 작용만하는 마음, 이렇게 네 가지 마음이 있다. 여기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마음은 당연히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 作用心)’일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이나 아라한의 마음을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부처나 아라한도 대상과 접촉하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나 끄달리지 않는다. 이는 작용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작용심은 즐거운 대상과 접했을 때 단지 즐겁네라며 끝내는 것이다. 괴로운 대상을 접했을 때도 괴롭네라고 끝낸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라고 했다. 이것이 작용심이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미래 태어남을 유발하는 업이 되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엉망 된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서와 감정에 휘둘림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부수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한다. 물론 무탐, 무진, 무치라는 유익한 마음부수도 있지만 이는 수행에 의해서 계발된다. 늘 사띠를 유지 하지 않는 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시기, 질투 등 해로운 마음부수에 영향 받는다. 여기서 사띠는 유익한 마음부수에 속한다. 늘 사띠한다는 것은 불선법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오염된 마음은 해로운 마음부수에 따른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산다면 해로운 마음 부수가 지배한다.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에서 볼 수 있다. 눈으로는 매혹적인 형상을 즐기고,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를 즐기고, 혀로는 맛있는 것을 즐기는 삶을 말한다. 이는 과거 습관에 따른 영향이 크다. 대상과 접촉했을 때 과거 경험한 것이 떠올라서 즐겁거나 괴로움 느낌이 일어난다.

 

느낌을 알아치리지 못하면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발생하는데 최종적으로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모든 것은 접촉으로 발생된다.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내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닌 것이다. 접촉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 것이다. 마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접촉하면 바이러스가 퍼져서 괴로움을 겪는 것과 같다.

 

접촉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접촉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여기서 끄달려 가면 괴로움이 발생하고 그 궁극은 절망이다.

 

어쩔 수없이 접촉이 되어서 괴로움이 발생했다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괴로움이 괴로움을 낳는 일은 발생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딱 그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과 아라한의 작용심이다. 다만 그렇네.” “그렇구나.”라며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작용심을 내는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하다면 나의 마음은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는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따른다.”(Dhp.1)라고 한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분노는 괴로움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분노해서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모든 것에 있어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 순간에 지옥을 맛본다.

 

지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 땅속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일까? 니까야를 보면 다양한 지옥이 있다. 그 중에 사이지옥이 있다. 부모를 살해하는 등 무간업을 지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어서 사이지옥이라 하는데, 사이지옥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부모를 살해한 무간업으로 인하여 우주가 파괴될 때까지 일겁동안 구제받지 못하는 곳이다.

 

지옥을 뜻하는 니라야(niraya)는 어원적으로는 ‘산산이 조각나다’의 뜻이다. 분노했을 때 일시적 쾌감을 느끼지만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다. 한번 화를 내면 인관관계가 다 끊어진다. 화를 내면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옥이다. 근본을 따지다 보면 접촉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왕가의 마음이 동요되었을 때

 

마음이 오염되는 것은 해로운 마음부수에 따른 것이다. 이는 대상으로 접했을 때 일어난다. 강도가 강하면 강하게 일어나고 강도가 약하면 약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미약한 대상과 접했을 때이다. 대상이 미약하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이는 존재지속심이라 불리우는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이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바왕가의 마음이 있다. 이는 한 존재에게 있어서 한 존재를 유지케 하는 일생의 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바왕가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는다. 강한 대상과 접했을 때 바왕가의 마음은 동요가 되어 끊어진다. 이런 바왕가의 마음은 마치 잠재의식과도 같다. 그래서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한 존재의 마음에는 한 존재를 유지시켜 주는 바왕가의 마음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A1.49)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각자의 마음에 빛나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이 번뇌로 오염된다고 했다. 이는 법구경 1번 게송에서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Dhp.1)이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니까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니까야가 후대 삽입되었다거나 편집되었다고 말하는 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바왕가의 마음은 바왕가의 마음이 동요되면 동요된 마음이 일어난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맹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부분 아무 생각없이 살기 때문에 그 마음은 불선한 마음이기 쉽다. 오염된 마음이다. 탐욕, 성냄 등 해로운 마음부수와 결합된 불선하고 오염된 마음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디지털논리처럼

 

정신이 오염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석에 따르면, “그가 말할 때에 네 가지 언어적 악행을 저지르고, 그가 행동할 때에 세 가지 신체적 악행을 저지른다. 그가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을 때에는 세 가지 정신적 악행이 일어난다.”(DhpA.I.23)라고 했다.

 

정신이 오염되면 열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의 길[十惡業道: dasa akusala kammapatha]’로 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는 천수경에서도 십악참회라고 하여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매우 과학적이다. 마치 디지털 논리처럼 똑똑 들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디지털 논리를 보는 것 같다. 자연과학도나 공학도가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가르침이 논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정신이 오염되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이와 같은 논리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20-12-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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