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이데올로기가 뭐길레
난리 났다. 이 말은 주로 시사유튜브 채널 섬네일에서 볼 수 있다. 이른바 시청을 유도하기 위한 미끼이다. 요즘처럼 혼란한 시기에 답답한 마음을 풀어 보고자 들어가 보지만 그다지 기대는 충족되지 않는다.
유튜버는 시청자의 갈증을 충족시켜 주는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긴장과 갈등이 높을수록 수입도 늘어날 것이다. 이른바 ‘수퍼챗’을 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섬네일에 “난리났다”라는 자극적인 문구를 넣는 것은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이념의 노예가 될 수 없다. 그까짓 이데올로기가 뭐길레 사람의 마음을 옭아 매는 것일까? 이럴 때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경전만한 고전이 없다. 숫따니빠따에 이런 게송이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71)
불교 경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송 중의 하나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게송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는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자신의 깜냥으로 말하기도 한다. 백수의 제왕 사자는 그 어떤 소리에도 동요하지 않음을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확한 뜻을 알려면 주석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경전을 참고해야 한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소개되어 있다.
“이 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연각불이 지은 것이다. 그는 한 때 베나레스의 왕이었다. 그는 유원에서 노닐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유원을 나가 물이 있는 곳에 세수를 하려고 했는데, 그 곳에서 암사자가 새끼를 낳고는 먹이를 구하러 갔다. 왕의 부하가 보고는 왕에게 ‘사자의 새끼가 있다.’는 것을 말했다. 왕은 ‘사자의 새끼는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시험하고자 큰 북을 두드렸다. 사자의 새끼는 그 소리를 듣고 똑같이 누워 있었다. 세 번 큰 북을 울렸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왕은 어미가 오기 전에 그곳을 떠나며, ‘언젠가는 나도 갈애나 견해의 두려움이 생겨나더라도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Prj.II.124-125)
게송 인연담을 보면, 갓난 새끼사자도 큰 북소리에 놀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는 사자가 백수의 제왕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새끼도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사자의 경’(S22.78)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니까야는 방대하다. 숫따니빠따에서 한 게송은 여러 경과 연결되어 있다. 게송 한 구절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해진 경이 있음을 말한다. 사자의 경이 그렇다. 경을 보면 “짐승의 왕인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설법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서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은 것을 상주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는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었다.’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
부처님의 목소리를 ‘사자후’라고 한다. 사자후는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있는 선언을 말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자가 포효하는 것과 같다. 사자가 포효하면 뭇짐승들은 두려움에 떨듯이,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설법했을 때 천상의 존재도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전율로 바뀌고 이내 감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신견이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 즉 유신견을 가지면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영원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영원불변하는 자아는 있을 수 없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서는 영원주의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치 새끼사자가 큰 북소리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번뇌가 부서진 성자는 자신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버렸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다. (Sīhova saddesu asantasanto)”(Stn.71)라고 한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 무슨 뜻일까?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알려면 역시 경전을 보아야 한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주석에서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 나뭇가지에 걸고 펼쳤는데,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고 가는 것을 보고는 ‘언젠가 나도 갈애나 견해나 어리석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갈 것이다.”(Prj.II.124-125)라고 되어 있다.
불교경전에서 그물은 ‘견해의 그물’로 표현된다. 이는 디가니까야 1번 경인 ‘브라흐마잘라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과거-미래를 생각하는 자로서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라도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갖고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여러가지 망설을 주장한다면, 모두가 이러한 예순 두 가지 그물코를 가진 그물에 사로잡혀,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오르락내리락 하면 할수록, 거기에 갇힌 채 그물에 조여 발버둥 치게 될 뿐이다.”(D1.141)
부처님은 가르침을 그물로 비유했다. 이를 ‘가르침의 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그물은 그물코가 매우 촘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물고기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여기서 물고기는 62가지 견해를 말한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등과 같은 사견을 말한다. 연기법에 어긋나는 잘못된 견해이다.
부처님은 가르침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어떤 사견도 잡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그물로도 잡을 수 없다. 아무리 촘촘한 그물이 있어도 바람처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갈애의 그물, 견해의 그물, 어리석음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이 여섯 가지 감촉의 영역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의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 때,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안다.”(D1.140)라고 했다.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접촉으로 인한 생성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접촉 없이는 견해가 일어날 수 없다. 이는 “그들 모두는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을 통해서 잇따라 접촉하면서 그것들을 감지한다.”(D1.140)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신견이 있다면 견해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마치 그물에 갇힌 물고기와 같은 신세가 된다. 그러나 가르침을 알면 견해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다. (vātova jālamhi asajjamāno)”(Stn.71)라고 한 것이다.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은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은 어떤 의미일까? 이 구절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그는 바람이 불어 연꽃이 흔들리다 물에 닿았는데도 물에 오염되지 않는 것을 보고”(Prj.II.124-125)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된 경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이 구절은 글을 쓸 때 수도 없이 인용했다. 특히 보살사상을 알리기 위해서 인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이”(Stn.71)라는 구절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구절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연꽃은 흙탕물이 튀어 있지 않다. 연꽃이 오물속에서 피어나지만 연꽃 그 자체는 오물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바람에 의해 물이 튀었다고 하더라도 묻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모습이 항상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의 모습과 같다. 온갖 오염원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지만 오염되지 않는 성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연담에서는 “나도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연꽃이 오염되지 않는 것은 자아 개념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중생들은 개체가 있다고 생각하여 갈애와 자만과 견해로 살아 간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개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처님제자는 어떤 오염원에도 오염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세상속에서 중생들과 함께 살아도 오염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라고 했다.
연꽃은 흙탕물에서 자라지만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도 그렇다. 중생계에 살지만 탐, 진, 치에 오염되지 않는 것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지만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서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고 했다. 바로 이 구절은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다. (Padumaṃva toyena alippamāno)”(Stn.71)라고 한 숫따니빠빠 구절과 일치한다. 이렇게 니까야에서 부처님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게송을
마음이 심란할 때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경전을 읽으면 더 좋다. 더 좋은 것은 게송을 읽는 것이다. 게송 몇 개만 읽다 보면 마음은 저절로 누구러진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한 개의 마음만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두 개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 게송을 접하는 순간 심란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숫따니빠따에서 가장 널리 읽혀 지고 있는 게송은 외워야 한다. 그것도 빠알리 원문으로 외면 좋다.
Sīhova saddesu asantasanto,
vātova jālamhi asajjamāno;
Padumaṃva toyena alippamāno,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시호와 삿데수 아산따산또
와또와 잘람히 아삿자마노
빠두망와 또예나 알립빠마노
에꼬 짜레 칵가위사나깝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71)
개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면 소리에 놀라고, 그물에 걸리고, 흙탕물에 오염된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갈애와 자만과 견해를 버린다면 자유로워진다.
유신견을 버린 자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난리났다”라며 아무리 떠들어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은 것이다. 유신견을 버린 자는 세상에서 주장하는 어떤 주의나 주장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까짓 이데올로기 개나 주어라.”라든가, “이데올로기, 그까짓 게 뭐길레.”라고 말한다.
세상에 살다 보면 세상의 때가 묻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심산유곡에 살면 청정해질까?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싶은 산골에 사는 것이나 저자거리에서 사는 것이나 똑같다. 그러나 갈애와 자만과 견해를 버린 자는 어디에 있어도 오염되지 않는다. 흙탕물에 핀 한송이 연꽃 같은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앞만 보고 뚜벅뚜벅 홀로 갈수 있는 것이다.
2020-12-18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 멍청이가 되라고? (0) | 2020.12.22 |
---|---|
자애경은 우정의 가르침 (0) | 2020.12.20 |
빛나는 마음이 오염되는 것은 (0) | 2020.12.13 |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은 (0) | 2020.12.11 |
무의식 저편 그림자의 인식 (0) | 2020.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