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따(慈愛)와 함께
종종 "메따와 함께"라는 글을 접한다. 글을 마칠 때 하는 말이다. 이런 메세지를 몇 차례 받았다. 스님에게 받은 것이다. 멧따(慈愛)의 중요성에 대해 아는 수행자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싫으면 내색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글에 써 있지는 않지만 불쾌한 감정이 보인다. 이런 점을 캐치 하고서 누그러뜨리고자 하나 그대로이다. 이럴 때 자애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자애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내공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싫으면 싫어하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난다. 이것은 속일 수 없다.
오온중에 느낌과 지각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즉각적이다. 즉각적 반응을 보인다. 아마 거의 0.5초 걸리는 것 같다. 대상을 접했을 때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거의 동물적 본능이다.
동물은 말을 하지 못한다. 단지 행위만 있을 뿐이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오로지 생존본능과 번식본능만이 있다. 동물에게서 자애의 마음을 기대할 수 없다.
자애의 마음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유할 수 있는 인간만이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적 인간을 말한다. 또한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다.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은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
누구나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깨진다. 만일 그가 경계에 부딪쳐도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성자와 같은 사람이다. 왜 그럴까? 그는 자아관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칭찬과 비난에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위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목석과 같은 사람은 아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는 느낌이나 지각같은 것이다. 그러나 즉각 반응을 하지 않는다. 설령 그 순간 얼굴은 굳어졌을지 모르지만 이내 다른 마음이 된다. 지혜와 자비의 마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혜와 자비의 마음은 한번더 생각하는 마음이다. 말을 할 때 생각하며 말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쓸 때도 생각하며 쓴다. 아무생각없이 말하고 아무생각없이 쓰지는 않는다. 기억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에게 기억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방금전에 말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횡설수설하게 될 것이다. 치매환자는 바로 이전에 행위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히 이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름 없다.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생활 할 수 있다. 이는 언어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바로 전에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인간이다. 바로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본능대로 움직이는 동물과 같다.
동물에게는 본능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감각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러다보니 호불호가 분명하다. 사람도 본능적이라면 호불호와 쾌불쾌가 분명할 것이다. 동물적 감각에 크게 의존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를 기억할 수 있어서 사유할 수 있다. 그가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본능대로 행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도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면 그는 인간을 뛰어 넘는 사람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보시공덕이나 지계공덕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사마타수행공덕임을 말한다. 이를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라 하여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라일락철이 되면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바람을 타고 온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는다. 잠시 향내가 날 뿐이다. 단지 스치는 향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몇 초간 지속될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잠시만이라도 내면 그 공덕은 매우 크다고 했다. 절을 지어서 승가에 보시하는 것보다 더크다고 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탸어난다고 한다. 욕계천상을 말한다. 그런데 잠시 자애의 마음을 내면 욕계천상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항상 기쁨, 행복, 청정이 있는 색계천상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은 사마타수행이다.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이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하면 잠시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보다 더 낫다고 했다. 이는 사마타수행공덕보다 위빠사나수행공덕이 더 수승함을 말한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얼마나 짧을까? 아마 0.5초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치는 향기가 몇초 정도 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다. 이 정도 짧은 시간이라면 즉긱적인 호불호와 쾌불쾌에 대응할 수 있다. 호불호와 쾌불쾌를 지각하는 순간 무상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그것은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무명을 없애고, 모든 ‘나’라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앤다.” (S22.102)
무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불교적 지혜가 있음을 말한다.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말한다. 삼법인의 지혜이다. 특히 무아의 지혜이다. 그래서 무상의 지각을 닦는 것에 대해서 "모든 ‘나’라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앤다." (S22.102)라고 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견성체험을 해 주겠다면서 손바닥치기를 한다. 어떤 이는 요령을 흔든다. 또 어떤 이는 죽비를 친다. 책상을 탕탕치는 사람도 있다. 이때 한결 같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다른 것 없어요. 오로지 이 일뿐입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견성체험하게 해준다면서 "이것, 이것이에요. 이것"이라고 말한다. 몸짓으로 도구로 말로서 이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상대방은 당황하는 것 같다. 나중에는 서로가 웃는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죽비를 치며 "이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감각적으로 느끼라고 말한다. 언어적 개념이 끊어진 그 자리를 이것이라 말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라고 한다. 부처님도 이것을 말했을까?
부처님도 "이것"을 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상을 친다든가, 손뼉치기한다든가, 고함치는 등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대신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이라 하여 멋진 비유로 말씀하셨다. 언어를 이용하여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것은 무상, 고, 무아라고 본다. 이것을 말씀하기 위하여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을 것을 말씀하셨다. 무상에 대한 지각은 언어적 개념을 떠난 것이 아니다. 언어적 개념을 떠났다면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지각한다는 것은 이전 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한다. 기억은 언어적 작용에 따른 것이다.
소처럼 개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언어적으로 분별하는 것에 대해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외도수행자들 중에는 소처럼 개처럼 산 사람들이 있었다. 소처럼 개처럼 살면 청정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소처럼 개처럼 살면 소나 개로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소처럼 개처럼 살 수 없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바로 전에 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소처럼 개처럼 산다고 볼 수 있다. 가르침을 따른다면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좋아 하는 문구하나 정도는 외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 있다. 이는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라는 말과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어떤 순간에라도 하고 무상을 지각해야 한다. 그리하면 호불호와 쾌불쾌에서 자유로워질 것 같다. 늘 멧따(慈愛)와 함께 하는 것이 된다.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2021-03-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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