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와 불교공부는 다르다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 말간 얼굴이다. 티없이 맑은 모습의 스님이다. 비구니 스님은 유튜브에서 마음공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왜 마음공부라고 했을까? 불교공부라 하지 않고 마음공부라고 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유튜브에는 마음공부 채널이 많다. 주로 “이것”을 말하는 채널이다. 진짜 나를 찾는 것이다.
어느 남자재가자가 물었다. 현실이 고단하다는 것이다. 부모자식간의 문제, 직장에서 문제 등 갖가지 문제로 인하여 힘들다고 한다.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현실의 나와 별개의 진정한 나는 분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며 물어 본다.
남자재가자는 현실에서는 현실의 나가 있고, 또한 분리할 수 없는 나가 있음을 말한다. 두 개의 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스님은 대뜸 “누가 분리하라 합니까?”라며 반문한다. 그리고서는 “알고 있는 놈이 자기인가요? 감각이 자기인가요?”라며 되묻는다.
얼굴이 말간 비구니 스님은 분리할 수 없는 참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의 삶이 팍팍하더라도 그것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짜 나라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뭐가 현실이에요? 생노병사도 아니고, 성주괴공도 아니고, 희로애락도 아닌 나인 것이 현실 아니에요?”라고 되묻는다.
중년의 남자재가자는 스님의 역질문성의 답에 만족했을까? 스님이 생노병사도 없는 본래 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겪고 있는 괴로운 나는 무엇일까?
요즘 비구니스님의 마음공부 채널을 종종 보고 있다. 어느 영상을 보니 임제록에 대해서 설명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임제종계통의 선불교이다. 임제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스님이 설명하는 임제록을 들으니 부처님 가르침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임제록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것 같았다. 수행을 할 필요도 없고 삼장을 공부할 필요도 없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행을 하고 교리를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이교도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임제스님이 정말 이렇게 말을 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된다.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국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종단인가?
또 한명의 사람이 스님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여자재가자이다. 자신의 친정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49재를 막 지내고 왔다고 한다. 목소리가 무척 슬퍼 보였다.
여자재가자는 스님에게 “내생은 있습니까? 사십구재를 지내면 정말 좋은 곳으로 갑니까?”라며 절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스님은 냉정했다. 스님은 “어디가 좋은 곳이에요?”라고 반문하면서, “그게 다 고정관념이에요. 서양사람들이 제사 지내는 것 봤어요?”라며 매몰차게 이야기 했다.
스님에 따르면, 염불은 산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죽은 사람이 듣는 것 봤어요? 한명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스님은 모두 방편이라고 했다. 일체가 방편이라는 것이다.
두 명의 재가자는 스님의 말에 만족했을까? 현실은 이렇게 괴로운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거짓된 나의 작용이라고 했을 때 마음의 위안이 되었을까?
재가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스님은 현실과 동떨어진 말을 했다. 더구나 역질문 하여 당황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런 방법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사람에게 효과적인 법문일까?
스님의 입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한다. 아마도 선종계통의 선어록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석한다. 십이연기의 무명에 대해서도 단지 ‘어두움’이라고 하여 한자를 우리말로 옮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말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한시간동안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 보면 한계를 알 수 있다. 더구나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했을 때 교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같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진리를 드러내었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방편이 아니라 진실 그자체이다. 그럼에도 후대 불교에서는 방편이라 하여 단지 손가락을 가리키는 달 정도로 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교학과 교리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다.
여기 괴로운 자가 있다. 현실의 삶이 팍팍한 자에게 현실은 꿈과 같은 것이고 가짜라고 말하면 공감할까? 깊은 산중에서 나홀로 신선처럼 사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부처님은 현실을 떠난 법문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성제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고성제를 보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팔고를 설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했을 때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생, 노, 병, 사의 사고를 설했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를 설했을 때 역시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사고팔고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입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팔고를 이야기하면 이를 진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 믿음이다. 이를 삿다(信)라고 한다.
부처님은 행복의 진리를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부처님이 행복, 즉 즐거움에 대하여 설했다면 “이것이 즐거움이다.”라고 하여 낙성제(樂聖諦)를 설했을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도 행복이고, 선정의 즐거움도 행복이다. 열반의 즐거움도 행복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것이 즐거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여 낙성제를 설한 적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현실을 직시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핵심을 가로지르는 법문을 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마음공부채널이 많다. 조회수도 높다. 그러나 들어 보면 거의 대부분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마음공부라고 한 것인지 모른다.
불교인들은 불교공부를 해야 한다. 부처님 그분이 누군지 알아야 하고, 부처님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기경전을 읽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논장과 율장도 보아야 한다.
정법 만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요즘 같은 유튜브시대에는 갖가지 불교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무늬만 불교인 경우가 많다.
가사장삼을 입고 말간 얼굴로 앉아 있는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한다. 그대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재가불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어보지만 역질문하여 당황하게 만든다. 마음공부와 불교공부는 다른 것이다.
2021-03-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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