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외롭지 않다, 남도기행 6
남도 순례 첫날 바쁘게 보냈다.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 백련사, 가우도, 영랑생가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관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수행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동시에 세상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져야 한다. 저녁밥을 밖에서 사서 먹고 민선홍 선생 장흥집에 모였다. 하루밤 일박할 곳이다.
민선홍 선생은 고향이 해남이다. 가족은 수원에 있다. 그럼에도 왜 연고도 없는 장흥에다 집을 마련했을까? 일부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혼자 있고 싶어서"라고 했다. 외딴 곳에 독립가옥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집은 거처이자 동시에 수행처이다. 이를 꾸띠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본래 꾸띠는 개인 수행처를 의미한다. 초막으로 지어진 한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이 연상된다. 부처님 당시 숲에서 살던 제자들은 재가자의 정사 보시에 따라 비바람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처소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꾸띠는 잘 갖추어져 있다. 미얀마 국제선원의 경우 일인일실일욕실이 점점 기본화 되는 추세에 있다.
은퇴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한평생 힘들게 일했으니 즐기며 살아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삶은 수행자로서 삶이다. 이번 남도순례는 수행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선홍 선생은 장흥에 단독주택을 지어 놓고 살고 있다. 거처겸 수행처이다. 약 30평가량 되는 주택이다. 거실이 넓고 천정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복층으로 되어 있다. 비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비밀의 공간이 나온다. 작은 공간이다. 이곳을 수행처라고 했다. 명상공간이기도 하다.
수행자는 심심하지 않다. 혼자 산다고 해서 외롭지 않다. 만약 수행자가 외로워서 견딜 수 없어 한다면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자는 홀로 있음을 즐겨야 한다. 홀로 있음에 기쁨과 행복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수행자라고 볼 수 있다.
수행자는 고독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는 수행자를 말한다. 만약 그가 타인에게 의지하고자 한다면 "외롭다."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럴 경우 짝을 찾거나 대화상대를 찾을 것이다. 때로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찾게 될지 모른다. 맛있는 음식과 술도 해당된다.
외부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그는 고독한 수행자이다. 자신을 동반자로 하여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를 말한다.
저녁 늦은 시간에 수행자들이 식탁에 모였다. 담마에 대해 듣고 담마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서이다. 김진태 선생이 주로 얘기했다. 최근 발간된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를 중심으로 말 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중의 하나 선업짓기에 대한 것이다.
왜 선업을 지어야 하는가? 자신을 향상시키고 성장하게 위해서이다. 아무 생각없이 살면 연기적 삶이 되기 쉽다. 십이연기에서 순환적 연기를 말한다. 조건 발생적 연기에 따른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일어나고"와 같은 순차적 연기를 말한다. 그 끝은 어디일까? 반드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끝맺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절망열차'를 타고 있다. 아무 생각없이 없이 살면 죽음이라는 절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 어떤 절망인가? 그것은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로 표현된다. 어떤 삶이든지 1)슬픔(soka), 2)비탄(parideva), 3)고통(dukkha), 4)근심(domanassa), 5)절망(upāyāsā)이라는 이 다섯 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은 고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팔고를 설했다. 생, 노, 병, 사도 괴로움이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이런 괴로움을 부정할 자 없을 것이다. 괴로움은 연기의 순차적 삶의 결과로서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인생은 즐거운 것일까 괴로운 것일까? 어떤 이는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일시적으로는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인생은 마치 괴롭게 될려고 태어나는 것 같다.
부처님이 발견한 사성제는 위대한 것이다. 진리라고 이름 붙여줄만 하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설한 사고팔고를 나의 경우에 대비해 보았을 때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이 설한 고성제를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괴로움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바꿀 수 없다.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 괴롭다고 하여 "오, 괴롭다. 괴로워!"라며 절규해 보았자 바뀌는 것은 없다. 괴로워해 보았자 더 괴로울 뿐이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내면 된다. 이에 대하여 토론에서는 먼저 사띠(sati)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업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다.
괴로움이 괴로움인줄 알면 더 이상 괴롭지 않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면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산출되지 않는다. 결과를 바꿀 수 없다. 괴로움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나타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주어 담을 수 없다. 새로운 원인과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오온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다. 그 결과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면 사라진다. 그것이 사성제이다. 사성제의 출발점은 괴로움에 대해서 먼저 아는 것이다. 지금 괴로울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담마토크는 자정을 넘기지 않았다. 내일 일정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 법담은 밤을 세워서 해도 좋다고 했다. 부처님은 잡담을 금지했지만 담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장려했다.
오랜만에 수행자들이 모여서 법담했다. 여기에 인물 이야기는 없다. 인물 이야기를 하는 순간 잡담이 되어 버린다. 팔정도 삼마와짜(正語)에서도 금하는 것이다. 담마토크 하는 것 외에는 거룩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명상주제를 선정하여 두 번째 선정에 들어야 함을 말한다.
수행자들이 담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기억한 것을 사유하고 새겨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실천해야 한다. 좋은 모임을 가졌다.
2021-03-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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