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 사람을 잘 길들일 줄 아는 분
부처님을 조어장부라고 한다. 이 말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로는 뿌리사담마사라티(purisadammasārathī)이다. 뿌리사(purisa)는 사람(a man)을 뜻하고, 담마(damma)는 ‘훈련된(trained)’의 뜻이고, 사라티(sārathī)는 전차를 모는 사람(a charioteer) 또는 마부(coachman)를 뜻한다.
뿌리사담마사라티(purisadammasārathī)는 사람을 잘 훈련하는 자를 뜻한다. 이를 한자어로 한역에서는 조어장부(調御丈夫)라고 했다. 조어장부에 대한 국어사전을 보면 “부처님은 대자, 대비, 대지로써 중생을 잘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백과사전에서는 짤막하게 “모든 사람을 잘 다루어 깨달음에 들게 하는 분”이라고 해 놓았다.부처님은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지(大智)로써 중생을 잘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부처님은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지(大智)로써 중생을 잘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부처님은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지(大智)로써 중생을 잘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조어장부는 사람을 잘 다루는 분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잘 다룬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 ‘길들여야 할 사람을 인도한다.’라는 것 때문에 ‘사람을 길들이는 님’이다.”(Vism.7.47)라고 했다. 여기서 “길들인다.”라는 말에 주목한다.
사람을 다룬다거나 길들인다는 말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축생을 다루거나 길들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길들여지지 않는 축생과 다름없다. 내버려 두면 본능대로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탐, 진, 치의 존재이다. 자신을 제어하지 않으면 축생과 다름없다. 그래서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잡는다.”(Dhp.33)라고 했다. 또 마음은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앚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라고 했다.
마음은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마치 물고기가 땅바닥에 던져진 것처럼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34)라고 했다. 이런 마음은 제어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힘으로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스승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이다.
조어장부로서 부처님은 반드시 인간만 길들이는 것은 아니다. 청정도론에서는 길들여져야 할 대상으로서 “길들이기에 적당한 축생과 같은 사람, 인간의 사람, 비인의 사람”(Vism.7.47)이라고 하여 세 종류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두 사람이 붙지만 사실상 축생과 인간과 야차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축생도 길들일 줄 아는 부처님
축생과 같은 사람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아빠랄라 용왕, 쭐로다라 용왕, 마호다라 용왕, 악기싸카 용왕, 두마씨카 용왕, 아라발라 용왕, 다나빨라까 코끼리 등의 이와 같은 축생도 길들이고 무독으로 만들어 귀의와 계행가운데 확립시켰다.”(Vism.7.47)라고 했다. 축생과 같은 사람이 용왕과 코끼리임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 언급되어 있는 용왕은 스리랑카의 용왕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전설적 용왕을 말한다. 다나빨라까 코끼리는 자따까에 등장한다. 부처님은 이들 축생을 교화하여 다스렸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축생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는 빠알리삼장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용왕과 관련하여 율장대품에는 부처님이 신통으로 맹독을 품은 사악한 용왕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깟싸빠 삼형제를 교화시킬 때 제화당에서 용왕을 다스린 것이다.
축생을 다스린 이야기는 자야망갈라가타에서도 보인다. 용왕 난도빠난다는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가 신통으로 다스렸다. 기리메칼라는 코끼리 이야기도 있다. 부처님의 성도 과정에 등장하는 코끼리이다.
부처님은 기리메칼라(girimekhala) 코끼리를 다스렸다. 악마가 코끼리 기리메칼라를 타고 마군과 함께 공격해 왔을 때이다. 그러나 코끼리 기리메칼라는 부처님에게 무릎을 꿇었다.
자야망갈라가타 1번 게송에 기리메칼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이는 “악마가 사나운 코끼리 기리메칼라 위에 타고 많은 손에 수천의 무기를 들고 군대를 동원할 때 성자들의 제왕은 자애 등의 가르침으로 섭수하셨으니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그대에게) 임하소서.”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처님은 자애로 코끼리를 길들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아름다운 가사에서 빛나는 오른 손을 떼자 초월의 길(波羅蜜)의 땅을 가리키며 ‘그대는 왜 침묵을 지키는가?’라고 말했다. 그 소리가 땅을 진동했다. 그러자 악마가 타고 있던 코끼리 기리메칼라는 폭풍구름처럼 수백 번 포효하더니 땅에 무릎을 꿇었다.”(KPTS예경지송, 27쪽)
부처님이 성도시에 악마를 굴복시키는 장면이다. 부처님은 오른손을 아래로 했는데 이는 십바라밀의 땅을 가리킨 것이다. 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아승지십만겁의 바라밀 공덕은 대지의 땅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지가 진동했다. 그러자 코끼리가 포효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악마가 진 것이다.
악마는 부처님과의 싸움에서 졌다. 악3마의 코끼리 기리메칼라를 타고 수천, 수만의 악마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대지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인하여 패퇴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코끼리가 부처님에게 무릎을 꿇은 것에 대하여 “그것을 보고 악마의 교만은 이빨이 빠진 뱀처럼 부수어졌고 수많은 무기와 옷과 장식을 버리고 마군을 데리고 우주의 변방으로 도망갔다.”(KPTS예경지송, 27쪽)라고 했다.
부처님이 코끼리를 교화시킨 이야기는 하나 더 있다. 역시 자야망갈라가타 게송에 나온다. 그것은 코끼리 날라기리(nāḷāgiri) 이야기이다.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기 위해서 코끼리에게 독주를 마시게 한 것이다.
부처님은 탁발 나갔을 때 독주를 마신 코끼리와 마주쳤다. 부처님은 데바닷따의 소행을 알면서도 제자들을 데리고 탁발 나갔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미친 코끼리를 보고서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이때 부처님의 시자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을 지키기 위해 코끼리 앞에 섰다. 그러자 부처님은 신통으로 아난다를 비켜 서게 했다. 그때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오다가 미친 코끼리가 오는 것을 보고서 두려운 나머지 아기를 부처님의 아래 떨어뜨리고 도망갔다.
술에 잔뜩 취한 미친 코끼리는 아기를 짖밟으려고 했다. 그때 부처님은 어린 아기를 안심시키고 오른손을 내밀어 코끼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코끼리는 환희하여 무릎을 꿇었다. 이와 관련된 게송을 보면 “뛰어난 코끼리 날라기리가 술취한 나머지 산불처럼 날뛰고 번개처럼 달려들 때 성자들의 제왕은 자비의 세례로써 섭수하셨으니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그대에게) 임하소서.”이다.
부처님은 ‘자비의 세례(mettambuseka)’로서 미친 코끼리를 제어했다. 술 취한 코끼리도 부처님의 자비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축생을 다스리고 길들일 줄 아는 분이다.
지혜의 불로 삿짜까를 길들인 부처님
부처님은 인간의 사람을 잘 다루는 분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사짯까, 암밧타, 뽁카라싸띠, 쏘나단타, 꾸따단따 등도 잘 다루었다고 한다. 이들 모두 이교도들이다. 니간타교도 사짯까만 빼고 모두 바라문 학인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이교도들을 어떻게 길들였을까?
니간타교도 사짯까가 있다. 맛지마니까야를 보면 부처님과 대론 장면에 삿짜까가나온다. 맛지마니까야 35번경과 36번경이 그것이다. 각각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과 ‘삿짜까에 대한 큰 경’(M36)으로 소개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삿짜까에 대하여 토론의 달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내가 무심한 기둥에다가 말을 걸어 논쟁을 해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기둥도 떨고 전율하고 크게 감동받을 것인데, 하물며 인간의 존재이랴.”(M35.2)라고 사짯까가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둥도 감동하게 만들었다는 사짯까이다. 이렇게 자신만만한 사짯까가 부처님을 찾아왔다. 토론하여 굴복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런 삿짜까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다루었을까? 부처님의 별명이 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인 것처럼 사짯까를 다루고 길들였다.
부처님은 문답식으로 사짯까를 다루었다. 질문을 하고 답하면 역질문을 하는 등 몰아 부쳤다. 핵심은 실체에 대한 것이다. 자이나교도들이 주장하는 고정된 영혼과 같은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짯까에게 물었다. 부처님은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M35.13)라며 물어본다. 이런 질문 방식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토론의 달인 삿짜까는 부처님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침묵은 때로 긍정이기도 하지만 때로 부정이기도 하다. 태도를 확실히 밝히지 않았을 때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다.
부처님은 삿짜까에게 확실히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침묵을 지키자 세 번째에는 “그대는 지금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M35.14)라고 말했다. 여기서 악기베싸나는 삿짜까의 또다른 이름이다.
삿짜까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바자리빠니(金剛杵)를 든 야차가 머리통을 칠 기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야차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과 삿짜까의 대론은 우주적 관심사였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교단과 호각을 이루고 있었던 니간타 나타뿟따의 자이나교와의 교리대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삿짜까는 부처님의 질문에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대답했다. 이는 오온 중에서 물질이 나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말이다. 나의 것이 아님에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이다. 부처님은 차례로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해서도 확인해 준다.
다음으로 부처님은 자이나교도들이 가장 핵심적 교리에 대한 것을 질문한다. 역시 오온에 대한 것이다. 먼저 물질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라고 물어본다. 만일 답하지 않는다면 야차의 금강저에 머리통이 일곱조각 날 것이다. 삿짜까는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이나교의 영원론에 대한 부정이다. 자이나교도 자신의 교주의 교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차례로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해서도 확인시켜 주었다.
자이나교에서는 육체는 괴로움 덩어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행으로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부처님은 이제 자이나교의 가장 핵심 교리 중의 하나인 고행을 통한 영혼의 정화에 대하여 부수려 하고 있다.
부처님은 먼저 삿짜까에게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대하여 삿짜까는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삿짜까의 대답이 고따마에서 세존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삿짜까에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이교도의 스승으로서 부처님이었기 때문에 “고따마여”라고 불렀으나, 대론을 통해서 진리를 알아 가게 됨에 따라 도중에 “세존이시여”라고 바뀐 것이다. 여기까지 삿짜까는 잘 따라왔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이다.
부처님은 삿짜까에게 결정적 질문을 한다. 부처님은 괴로운 것에 대하여 “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말은 괴로움은 나의 것이고, 괴로움은 나이고, 괴로움은 나의 자아가 아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는 자이나교 교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삿짜까는 “존자 고따마여,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세존에서 다시 고따마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이나교 교리를 인정하는 듯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삿짜까는 괴로움의 실체에 대한 모순적인 답변을 했다. 부처님이 오온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게 변화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했을 때는 긍정했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하여 똑 같은 방식으로 질문했을 때는 부정했다. 이는 모순이다. 부처님이 설한 오온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 역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 그런가? 괴로움은 느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삿짜까는 괴로움의 실체에 대하여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파초의 비유를 들어 삿짜까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악기베싸나여, 예를 들어, 나무심이 필요해서 나무심을 구하려고 나무심을 찾아 돌아다니던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커다란 바르고 싱싱하고 아주 높이 자란 파초줄기를 보았다고 합시다. 그가 그것을 뿌리에서 자르고, 뿌리에서 자르고 나서 꼭지에서 자르고, 꼭지에서 자르고 나서 잎의 껍질을 벗겨낸다고 합시다. 그가 거기서 입의 껍질을 벗겨낸다고 해도 거기서 나무껍질도 찾지 못할 것인데 어디에서 나무심을 구할 수 있습니까? 악기베싸나여, 이와 같이 그대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내가 규명하고 반문하고 힐문하자, 그대는 스스로 텅비고 공허해지고 패했습니다.” (M35.27)
자이나교도 삿짜까는 부처님과 대론에서 패했다. 자이나교에서 제일의 교리에 대한 토론가인 삿짜까는 부처님의 문답식 질문에 모순적 답변을 함으로써 패한 것이다. 이는 위대한 부처님의 승리이다. 자이나교도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야망갈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교만한 삿짜까가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를
벗어난 논쟁에 깃발을 들고 맹목적으로 뛰어 들었을 때
성자들의 제왕은 지혜의 불을 밝혀 섭수하셨으니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 임하소서.”
부처님은 삿짜까에게 ‘지혜의 불(pañña padīpa)’을 밝혀 섭수했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이 “악기베싸나여, 이 세상에서 나의 제자는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합니다.”(M3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수없이 강조했다.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되는 정형구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정형구로 자이나교도 이론가이자 토론의 달인 삿짜까를 굴복시켰다.
삿짜까는 부처님과의 교리대결에서 패했다. 삿짜까는 니간타 나타뿟따가 주장하는 자이나교 교리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라며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이렇게 부처님은 사람을 잘 다스리고 잘 길들일 줄 아는 분이다. 그래서 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라고 한다.
비인간 야차를 길들인 부처님
조어장부로서 부처님은 반드시 인간만 길들이지 않았다. 축생도 길들였고 야차도 길들였다. 야차와 관련해서는 청정도론에서는 “알라바까 야차, 쑤찔로마 야차, 카라로마 야차,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 비인간도 여러 가지 방편으로 길들이고 인도했다.
야차 중에 쑤찔로마(sūciloma) 야차가 있다. 숫따니빠따를 보면 ‘쑤찔로마의 경’(Sn.2.5)이 있는데, 부처님이 야차 쑤찔로마를 길들이는 장면이 있다.
쑤찔로마 야차는 비인간이다. 어떤 모습일까? 주석을 보면 야차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그의 몸은 추악하게 되고 그의 피부는 구운 타일 모양으로 거친 피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겁줄 때에는 자신의 거북 등 같은 피부를 드러내서 위협했다.”(Prj.II.301-302)라고 되어 있다. 마치 영화에서 에일리언을 보는 것 같다.
야차 수찔로마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왔다. 부처님을 떠 보기 위해서 일부로 부딪치고자 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몸을 뒤로 젖히며 피했다. 이를 보고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다. 야차는 부처님에게 자신이 두렵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야차는 부처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만약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미쳐 버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야차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귀신이 사람을 미치게 하려면 흰 얼굴과 붉은 손, 불타는 눈 등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무서운 소리를 내거나, 사람에게 소리지르고, 손으로 입을 막고, 심장을 짓누르면 사람은 미쳐 버린다.”(Srp.I.303)라고 했다.
야차는 부처님을 시험하고자 했다. 야차는 부처님에게 “탐욕과 미움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불쾌함과 즐거움과 털이 곤두서는 전율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어린아이들이 다리를 묶어 까마귀를 놓아준 것처럼 마음의 생각은 어디로부터 일어납니까?”(Stn.270)라고 물었다.
야차는 탐욕과 성냄, 쾌와 불쾌, 공포가 어디서 생겨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하여 까마귀 다리를 묶어 풀어준 비유를 들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까마귀를 잡아 한쪽 다리를 실로 묶은 다음에 놓아주면 까마귀는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생각이나 사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주석에서는 부메랑의 효과로 설명했다. 야차의 질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탐욕과 미움은 여기서 연유하고
불쾌함과 즐거움도 털이 곤두서는 전율도 여기서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이 다리를 묶어 까마귀를 놓아준 것처럼
마음의 상념은 여기서 일어납니다.”(Stn.270)
부처님은 외계 에일리언 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 야차의 질문에 이해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탐욕과 미움 등 마음의 작용은 여기서 생겨난다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여기는 ‘자기의 존재(attabhāva)’를 말한다.
부처님은 탐욕 등 마음의 작용은 자신에게서 일어남을 말했다. 이에 대하여 “뱅골 보리수에 많은 줄기가 나 있는 것처럼, 감각적 쾌락에서 일어나며 스스로에게서 생겨납니다.”(Stn.27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욕망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데 그 욕망으로 인하여 파멸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어지는 게송에서 칡의 비유를 들었다. 이는“칡이 숲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얽매여 있습니다.”(Stn.27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칡은 나무를 뿌리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감아서 죽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망은 인간의 사유를 감싸서 파괴한다.”(Srp.I.304)라고 설명되는 주석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비인간인 야차도 다스리고 길들일 줄 알았다. 진리의 말씀으로 길들인 것이다. 거친 야차는 부처님을 골탕먹이고 겁주고자 했으나 결국 부처님에게 예경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부처님은 야차나 귀신과 같은 비인간도 길들일 줄 아는 분이다.
때로 부드럽게 길들이고 때로 거칠게
조어장부로서 부처님은 축생, 인간, 비인간을 다스리고 길들였다.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의 길들임에 대하여 “께씨여, 나도 길들임이 필요한 사람을 부드럽게 길들이거나 거칠게 길들이거나, 부드럽고 거칠게 길들입니다.”(Vism.7.4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
부처님은 때로 부드럽게 길들이고, 때로 거칠게 길들일 줄 아는 분이다. 그렇다면 부드럽게 길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이것은 신체적인 선행이고 이것이 신체적인 선행의 과보이고, 이것은 언어적인 선행이고 이것이 언어적인 선행의 과보이고, 이것은 정신적인 선행이고 이것이 정신적인 선행의 과보이고, 이것이 천상이고, 이것이 인간이다.”(A4.11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부드럽게 길들이는 것은 업과 업보에 대한 가르침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면 천상이나 못되도 인간으로 태어남을 말한다.
거칠게 길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악행과 악업과보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면 그 과보로 지옥, 축생, 아귀의 영역에 태어남을 말한다.
길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이라고 하여 다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음을 말한다. 어떤 사람일까? 이는 “이 고귀한 계율에서 살해된 자입니다.”(A4.1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계율을 지키지 않아 승단에서 추방된 자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드럽거나 거칠게 다룰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도 그를 죽여 버립니다.”(A4.111)라고 했다. 이는 계율에서 살해된 자, 승단추방죄를 범한 자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데바닷따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길들인 사람도 길들인다
부처님은 축생, 인간, 비인간을 길들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길들이기도 하고 거칠게 길들이기도 했다. 길들이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미 길들여진 자도 길들인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가부좌를 통해서 여덟 방향으로 집착없이 달릴 수 있도록, 길들이기 때문이다.”(Vism.7.48)라고 했다.
여덟 방향이란 무엇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여섯 감역 분석의 경’(M137)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팔해탈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팔해탈에 대하여 코끼리 조련사에 의해 잘 훈련된 코끼리가 여덟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 ‘수행을 닦는 스승 가운데 그는 위없는, 사람을 길들이는 스승이라 불린다.’고 가르친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코끼리 조련사에 의해서 훈련된 코끼리는 달리더라도 한 방향,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으로 달린다. 수행승들이여, 말 조련사에 의해서 훈련된 말은 달리더라도 한 방향,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으로 달린다.”(M137.23)
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 사람을 잘 길들일 줄 아는 분
부처님은 사람을 잘 길들일 줄 아는 분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축생도 길들일 줄 알고, 야차도 길들일 줄 안다. 부처님은 길들을 때 부드럽게 길들이기도 하고, 거칠게 길들이기도 하고, 부드럽게 거칠게 길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길들이기 포기한 자도 있다. 승단에서 추방된 자들이다. 계율을 어겨서 추방되었을 때 고귀한 계율에서 살해된 자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미 길들여진 사람도 길들일 줄 안다. 이를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한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또 말 조련사에 의해서 잘 훈련된 말은 오로지 한방향으로만 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잘 길들여진 사람을 길들일 때 여덟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덟 방향이 있다면 여덟 방향 중에 오로지 한방향으로 달려야 한다. 조련사는 한방향으로만 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한방향으로 달리게 한다. 여덟 가지 방향 중에서 한방향을 말한다. 이를 팔해탈을 말한다. 뿌리사담마사라티(調御丈夫), 부처님은 이렇게 사람을 잘 길들일 줄 아는 분이다.
2021-03-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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