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꿈의 비유가 최악인가?
살 맛나는 날씨이다. 아침 찬란한 햇살에 모든 것이 빛나 보인다.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어제 그제 꾸물거리며 비를 뿌린 날씨와는 대조적이다. 이런 맛에 사는지 모른다. 더구나 꽃피는 봄이다.
춘분도 막지나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페이스북 등 에스엔에스에서는 혹한의 날씨를 전했다. 산중에 있는 집이나 사찰에서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린 사진을 올려 놓았었다.
남쪽지방으로부터 북상한 꽃소식이 이제 이곳 안양에서도 보게 되었다. 도시 양지바른 곳에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피었다. 지난 겨울에 죽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봄이 온 것이다.
약수터에 물 뜨러 갔다. 2리터짜리 페트병 네 개를 배낭에 매고 수리천 약수터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 본다. 겨울에는 추워서 못갔다. 봄이 되니 발걸음을 재촉한다. “왼발, 오른발”하며 갔다. 일종의 2단계 경행이라 볼 수 있다.
바람이 얼굴에 스친다. 약간은 쌀쌀하지만 그래도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바람이다. 얼굴에 햇살이 따사롭다. 한가하게 “왼발, 오른발” 하며 가다 보니 수리산 자락에 다 왔다.
수리천 약수터 물은 먹어도 될까? 검사표를 보니 불합격으로 되어 있다. 다 좋은데 한항목에서 불합격이다. 대장균이 많다는 것이다. 2월 8일자 기록이다. 이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끊여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
페트병 네 개 가득 물을 넣고 배낭을 지니 묵직하다. 갈 때는 빈병이었으나 올 때는 꽉 차 있다. 마음도 꽉 찬 것 같다. 무엇보다 4천원 벌었다. 그 동안 물값 아까워서 수도물을 끓여 마셨으나 약수물을 마신다고 생각하니 다른 느낌이다.
바람은 부드럽고 햇살은 따사롭다. 등짐을 묵직하게 느끼며 왼발, 오른발 하며 걸을 때 살아 있음을 만끽한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을 꿈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현실을 꿈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현실이 꿈이라고 한다. 유튜브에서뿐만 아니라 불교관련 방송과 TV에서 어떤 이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루 빨리 꿈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아무 대안이 없음을 말한다.
현실을 꿈으로 보았을 때 죄악의 문제가 발생한다. 꿈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강간도 하는 등 오계를 어긴다. 그럼에도 현실을 꿈이라고 했을 때 살인도 하고 강간했을 때 꿈이라고 돌릴 수 있을까?
현실을 꿈으로 보았을 때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는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현실을 꿈의 비유로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금강경 영향이 크다고 본다.
금강경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이 있다. 그것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이라는 게송이다. 일체 형성된 것들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포말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도 꿈이고 이 세계에서 사는 나도 꿈속의 사람이 된다.
부처님은 세상을 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과 같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오온에 대하여 포말(色), 물거품(受), 아지랑이(想), 파초(行), 환술(識)로 비유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포말,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로 보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조건발생하기 때문이다.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공허하고, 텅 비어 있고,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번갯불 같고 천둥소리 같은 것이다.
번갯불과 천둥소리는 조건발생한다. 조건이 맞아야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발생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소멸될 때는 조건이 필요 없다. 조건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발생은 조건에 따르지만, 소멸은 조건과 관련이 없다. 그냥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S22.95)라고 했을 것이다.
포말,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이 실체일 수 없다. 이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오온은 찰나생찰나멸하며 상속된다는 사실이다. 상속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없고 현재의 나는 있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가 되어 버린다. 나는 끊임없이 찰나생찰나멸하며 상속된 존재이다.
“이것의 상속은 환상이고
무지한 자의 지껄임이고
살해자라고도 하니,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S22.95)
게송에서 오온의 상속에 대하여 환상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환상이 아니다. 조건발생하여 상속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또한 오온에 대하여 살해자라고 했다. 왜 살해자라고 했을까? 두 가지 뜻이 있다. 오온중에서 물질의 다발이 파괴되면 나머지도 파괴되기 때문에 살인자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존재의 다발(五蘊)이 있을 때 살해, 구속, 상해 등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살해자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여러 가지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없다. 여러 다발(蘊)이 조건발생하여 상속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오온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조건지어진 것이고 또한 살인적인 것이다.
오온으로 분석해 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누군가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고 했을 때 이는 나로 실체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온을 분석해 보면 실체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야마까경(S22.85)에서는 오온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 조건, 살해자 이렇게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꿈의 비유는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와 유사
꿈의 비유로 깨달음을 설명하는 자들은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외도의 스승 막칼리 고쌀라의 주장과 유사하다. 그는 “뭇삶이 청정해지는 데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D2.21)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막칼리 고쌀라는 조건없이 청정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거기에는 힘도 없고 애씀도 없고 사람의 노력도 없고 사람의 정진도 없습니다.” (D2.21)라고 했다. 현세와 내세의 열반을 성취를 가져오는 어떠한 힘도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막칼리 고쌀라는 ‘윤회청정설’을 주장했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윤회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했다. 마치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는 것과 같다. 이는 “일곱 가지 꿈, 칠백 가지 꿈이 있습니다.”(D2.21)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말은 많음을 말한다. 그래서 많은 큰 꿈과 많은 작은 꿈을 꾼 뒤에 꿈에서 깨면 누구나 청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막칼리 고쌀라에 따르면 영혼의 최종적 해탈 단계 이전에 크고 작은 수많은 꿈을 꾼다고 했다. 가장 마지막에 꾸는 꿈에서 깨면 해탈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그리고 팔백사십만 대겁이 있는데, 그 동안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릅니다.”(D2.21)라고 말했다.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을 보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꿈에서 깨면 모두 해탈되기 때문이다. 굳이 수행을 할 필요도 경전공부도 할 필요도 없다. 자연의 본성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이 힘도 없이 노력도 없이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변이하며 여섯 가지 계층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습니다.”(D2.21)라고 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고 말한다. 이는 자연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본성대로 산다면 굳이 애써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경전 공부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어느 순간에는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과 매우 유사하다.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의 끝은 어디일까? 이는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똑같이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D2.2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치 잠에서 깨는 것과 같다.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듯이,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모두 해탈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왜 막칼리 고쌀라가 최악인가?
부처님은 육사외도 스승 중에서 막칼리 고쌀라를 최악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많은 수행자의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 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A3.13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막칼리 고쌀라의 윤회청정설이 최악인 것은 업과 업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뭇삶이 청정해지는 데도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D2.21)라고 말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인과를 부정한 것이다.
인과를 부정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어떤 행위를 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죄를 짓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강간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없던 것으로 되어 버린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꿈속의 세상일까? 어떤 이는 죽음에 이르러 게송을 남겼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속의 세상이라고 했다.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자연의 본성대로 살면 될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은 이 세상을 꿈의 비유로 설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포말,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로 비유하긴 했지만 금강경에서처럼 일체유위법을 여몽환포영으로 비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꿈의 비유로 설명하는 것은 최악이다. 이는 부처님이 윤회청정설을 주장한 막칼리 고쌀라를 최악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 그런가? 업과 업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말라면 연기법이 없는 것이다.
업과 업보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과거에 출현하였던 무수한 부처님들도 업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이다. 그럼에도 꿈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을 설명하려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저 어리석은 막칼리 고쌀라의 후예들은
도시에도 봄이 왔다. 구청 앞마당에는 진달래도 피고 앵두나무꽃도 피었다. 구청 뒤에는 목련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이제 춘분도 지났으니 세상은 꽃의 릴레이가 시작될 것이다. 이런 세상은 꿈이 아닐 것이다.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에 봄을 만끽한다. 어제 찌뿌둥했던 몸이 오늘은 개운하여 살 맛 난다. 지난 겨울에 죽었던 사람이 그토록 고대하던 봄이 온 것이다. 이런 것이 정말 그들이 말한대로 꿈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내가 겪고 있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꿈이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다. 꿈에서 꿈에서 꿈을 꾸다가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듯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이 아니라 생생하게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 세계이다.
업과 업보를 알아서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말씀했다. 그럼에도 저 어리석은 막칼리 고쌀라의 후예 들은 꿈의 비유를 들어 이 세상을 꿈속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2021-03-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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