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가르침에 정초하여 삼계의 방황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9. 07:53
가르침에 정초하여 삼계의 방황을

이 새벽에 이런 저런 사유를 해 본다. 일어난 생각을 보내지 않고 붙잡아 보고자 한다. 때로는 좋은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글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왜 사는 것일까? 사는데 이유를 묻지 말라는 말이 있다. 화초가 꽃을 피우는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동물도 사는데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런데 식물이나 동물이나 공통적으로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는 것은 사유가 없다는 것과 같다. 언어가 있는 인간만이 삶의 의미를 묻는다.

정초석이 있다. 큰건물에서 볼 수 있다. 본래 뜻은 "1)말이나 글 또는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내는 내용. 2)무엇을 바라거나 이루겠다고 속으로 품고 있는 마음. 3)어떠한 일이나 행동을 하는 가치나 중요성"을 말한다. 삶에도 정초가 있어야 한다.

삶에 정초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초가 없다면 흘러 가는대로 살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남들처럼 살아간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이다. 감각에 의존하는 삶이다. 아무생각없이 사는 삶이다.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

감각에 의존하는 삶은 우유에 도취된 아기와 같은 삶이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아개념이 생기기 이전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우유를 주면 우유에 도취되어 잠을 잔다.

아기는 살 날이 많다. 태어나자 마자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지만 최대 백년은 남은 것이다. 그래서 마라(악마)는 사람의 목숨이 길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백년은 천상에 비하면 반나절도 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 (S4.9)

부처님은 사람 목숨이 짧다고 했다. 특히 인생의 끝자락에 있다면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우유에 도취된 아기처럼 보낼 수 없다. 그래서 머리에 불난 듯 수행하라고 했다. 머리털에 불이 붙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것 다 제껴두고 불 부터 꺼야 할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다. 기대수명이 90세이기 때문에 수십년 남았다고 볼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것처럼 살아간다.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아직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함께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저세상이 없다면 굳이 애써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대한 즐기며 살아야 한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지하철에 공익광고가 있다. 종로3가역 환승통로에서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치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민요를 연상케한다.

"왜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을까?
태어난 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긴다.
감각적 쾌락을 즐겨라.
나중에 결코 후회하지 말라.” (Thig.190)

테리가타(장로니게)에 나오는 게송이다. 우빠짤라 장로니의 게송에 실려 있다. 장로니가 이 말을 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악마가 말한 것이다. 악마는 젊었을 때 마음껏 즐기라고 한다. 나이 들어 늙으면 즐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악마는 감각을 즐기라고 했다. 태어난 자는 즐길 자격이 있음을 말한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다. 욕망이 생기면 욕망을 충족해야 하고, 화가 나면 성을 내야 한다. 감각에 충실하는 삶이다. 어쩌면 동물적 삶이다.

동물적 삶에 이유가 없다. 왜 사느냐고 묻지 않아도 된다. 존재 하니까 사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만큼 최대로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번 지나가면 끝이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까지 즐겨야 한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셔야 한다. 이 밤이 새도록 춤을 추어야 한다.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이다.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본 공익광고 포스터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는 문구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악마는 수행자를 유혹한다. 특히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 수행자에게 접근한다. 악마가 콜록거리며 늙고 추한 모습의 바라문 성직자로 변신해서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라고 말한다.

악마는 젊음을 즐기라고 말한다. 건강할 때 감각을 즐기라는 것이다.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라고 했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라는 말이다.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본 공익광고 문구와 같은 내용이다.

새내기 수행승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부처님 말씀과 정반대로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명한 수행승은 이렇게 답했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4.21)

부처님 제자는 잘 배웠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 재난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안 것이다.

감각을 추구하면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 감각에 매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우유에 도취된 아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감각에 매이지 않는다. 감각을 즐기지 않고 감각을 알아차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 도를 이루었다면 지금 죽어도 좋을 것이다. 더 이상 삼계를 방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10가지 명호중에 바가와가 있다. 세상에 존귀한 님이라는 뜻이다. 한역으로 세존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바가와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존재의 방황을 버린 님'이다. 이에 대해서 "세 가지 존재에서 갈애라고 불리는 방황을 그 분께서 폐기했다.”(Vism.7.64)라고 했다.

세 가지 존재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존재, 미세한 물질계의 존재, 비물질계의 존재를 말한다. 흔히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삼계라고 말한다. 존재는 삼계를 윤회한다. 그래서 삼계를 방황한다고 말한다.

존재는 외로운 나그네와 같다. 때로 공덕이 되는 행위를 하여 선처에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감각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악처에 난다. 존재는 삼계를 방황하는 나그네와 같다. 그러나 수행자는 '존재의 방황을 버린 님'과 같이 삼계의 방황을 끝내고자 한다. 고독한 수행자는 가르침에 정초하여 삼계의 방황을 끝낸다.

2021-04-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