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수념(佛隨念)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19. 13:31

불수념(佛隨念)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있다. 일감이 끊어진 지는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 살아남은 고객사로부터 종종 주문은 들어온다. 재주문이다. 그러다가 때 되면 새로운 주문이 들어올 것이다. 이전처럼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오늘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남이 보기에는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밥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여래십호에 대한 글을 썼다. 작년 봄에 쓴 것이 이제야 마무리되었다. 가볍게 생각하고 여래십호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했으나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올해 부처님오신날 이전까지 마무리하자고 생각하여 올해 초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현재는 마무리된 상태이다. 열 개의 글이 완성된 것이다.

 

부처님 덕성을 새기면

 

부처님을 새기면 어떤 면이 좋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의 새김에 대한 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 수행자가 이와 같이 이러한 이유로 그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이다.’ 내지 이러한 이유로 존귀한 님이다.’라고 부처님의 덕성을 새기면, “탐욕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성냄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마음이 없어지고, 마침내 그때 여래에 관하여 마음이 올바로 정초된다.”(Vism.7.65)

 

 

이 문장은 경을 인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인용된 경은 앙굿따라니까야 마하나마의 경’(A6.10)이다. 재가신자 마하나마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고귀한 제자가 경지을 얻고 가르침을 인식하면, 어떠한 명상을 자주 닦습니까?”(A6.10)라며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 경지에 대한 것은 고귀한 경지(ariyaphala)’를 말한다. 경에서는 흐름에 듦의 고리를 갖춘 자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상윳따까야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1’(S12.41)에 따르면 그는 어떠한 네 가지 흐름에 듦의 고리를 갖추고 있습니까? 장자여, 고귀한 제자는 부처님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세상의 존귀한 님이다.’라고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S12.41)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네 가지 흐름에 듦의 고리는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계수념에 대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이와 같은 네 가지 수념이 정초 되어 있음을 말한다.

 

정초(定礎)의 의미는?

 

부처님의 덕성을 새기면 마음이 올바로 정초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역에서는 정초(定礎)라는 표현을 썼다. 정초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기초를 잡아 정함의 뜻이다. 정초석을 연상케 한다. 기초 또는 주춧돌을 설치하는 일을 말한다.

 

정초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아랍바(ārabbha)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때 여래에 관하여 마음이 올바로 정초된다. (ujugatamevassa tasmi samaye citta hoti tathāgata ārabbha)”라고 했는데, 이는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을 닦으면 삶의 방향이 정해짐을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그때 그의 마음은 여래를 의지하여 올곧아 진다.”(A6.10)라고 하여, 아랍바에 대하여 올곧음의 뜻으로 번역했다.

 

삶에는 좌표가 있어야 한다. 삶의 방향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어느 곳으로 갈지 정해 놓는 것이다. 만일 삶의 좌표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방황하게 될 것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와 같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생에 대한 의욕도 없고 목표도 없어서 하루하루 헛되이 보내기 쉽다. 마치 동물처럼 감각에만 의존하는 삶이 되기 쉽다. 배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동물적 삶이다.

 

삶의 좌표가 형성되어 있다면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정초를 뜻하는 아랍바는 삶의 좌표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beginning with’ 또는 ‘with a view to’로 번역했다. 이 말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뜻이다. 또 삶의 비전이라는 뜻도 된다. 삶의 목표가 정해졌다면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삶의 토대가 있어야

 

아랍바를 토대(vatthu)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게으름과 노력의 토대의 경’(A8.80)에서 발견된다. 모두 여덟 가지 토대가 있다. 여덟 가지 게으름의 토대와 여덟 가지 노력의 토대를 말한다.

 

이런 것이다. 어느 수행승이 나는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그런데 내가 그 일을 하면, 몸이 피곤할 것이고 차라리 누워 버리겠다.”(A8.80)라고 하면 게으름의 토대가 된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그래서 그는 누워서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해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정진을 시도하지 않는다.”(A8.80)라고 했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가 목표한 바를 성취하기 어렵다. 힘들다고 누워 버리다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이는 어떠한 정진도 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는 말이 있다. 집에 있으면 드러누워 있기 쉽기 때문이다.

 

누워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삶의 방향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길을 가는 자는 좌표가 있다. 그래서 나에게 갈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길을 간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 그러니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해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무엇보다 정진해야 겠다.”(A8.80)라는 마음의 각오가 있는 것이다.

 

삶의 좌표가 있고 삶의 방향이 있다면 이는 삶이 정초 되어 있는 것이다. 불수념하는 것은 삶의 토대를 다지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길로 주욱 나아가면 될 것이다. 이것이 정초를 뜻하는 아랍바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불수념을 닦으면

 

열 가지 부처님에 대한 새김(buddhānussati: 佛隨念)’을 닦으면 어떤 공덕이 있을까? 청정도론에서는 경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이와 같이 탐욕 등에 사로잡히지 않음으로써 장애를 제압하고 명상주제를 지향하며 올바로 정초된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의 덕성으로 향하는 사유와 숙고가 일어난다. 모든 부처님의 덕성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희열이 일어난다. 희열이 있으면 희열을 토대로 하는 안온을 통해서 신체적-정신적 불안이 지멸된다. 불안이 지멸되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복이 생겨난다. 행복이 생겨나면 부처님의 덕성을 대상으로 마음이 삼매에 든다.”(Vism.7.65)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이 내용은 앙굿따라니까야 마하나마의 경’(A6.10)과 병행한다. 불수념을 하면 삼매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덕성을 생각하면서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삼매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근본삼매에 도달하지 못하고 단지 근접삼매에 도달한 선정이 된다.”(Vism.7.66)라고 했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는 수행을 붓다누사띠(佛隨念)라고 한다. 부처님의 덕성만을 생각한다면 그 순간에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불수념에 대하여 근본삼매(본삼매)가 아니라 근접삼매라고 했다. 네 가지 선정과 같은 근본삼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 가지 선정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삼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자애수행편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불수념은 왜 기초적 삼매(mūlasamādhi)인가?

 

어떤 수행승이 있었다. 그 수행승은 부처님에게 법을 청했다. 이전에도 찾아와서 청한 수행승이었다. 이에 부처님은 내가 가르침을 설했는데도 언제나 나를 따라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A8.63)라고 말씀 했다. 약간은 짜증 섞인 듯한 말이다. 법문을 잘 귀담아듣지 않아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수행승을 위하여 먼저 자애를 닦으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근본삼매를 닦기 전에 예비수행으로 자애관을 닦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수행승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잘 정립되어야 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겨나도 마음이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라고 배워야 한다.”(A8.63)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충고했다.”(Vism.9.114)라고 표현했다.

 

말귀를 잘 못알아 듣는 수행승을 위하여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다시 한번 법을 설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런데 이러한 경책으로 내적 의미에서 단지 마음의 통일이 생겨난 것에 다름 아닌 기초적 삼매를 설한 것이다.”(Vism.9.114)라고 했다.

 

여기서 기초적 삼매(mūlasamādhi)”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KPTS번역본에는 각주에서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더구나 초기불전연구원본에서는 물라사마디에 대하여 근본삼매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두 가지 번역이 다르다. KPTS본 번역에서 물라사마디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그런데 이러한 훈계를 통해서 자신의 내적으로 단지-심일경성(cittekaggatāmatta)이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 가장 최초의 집중적인 기초적 삼매를 설한 것이다.’라는 뜻이다.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수행을 추구하는데 닦여지지 않고 얻어진 집중을 기초적 삼매라고 한다.”(Vism.9.114)

 

 

부처님은 말 귀를 못 알아듣는 수행승을 충고하고 훈계했다. 근본삼매를 닦기 전에 먼저 예비수행 단계로서 자애수행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애수행은 근본삼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물라사마디라고 했는데 KPTS에서는 기초적 삼매로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본삼매로 번역했다.

 

빠라맛타만주싸에 따르면 불수념에 대하여수행을 추구하는데 닦여지지 않고 얻어진 집중을 기초적 삼매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물라사마디는 기초적 삼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찰나삼매(khaika samādhi)에 대하여

 

근본삼매는 심일경성, 즉 마음의 통일에 있다. 자애수행이나 불수념하면 마음이 통일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언어적 사유에 대한 마음의 통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첫 번째 선정 정형구에서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S45.8)이라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본격적인 마음의 통일은 두 번째 선정에서부터 가능하다. 이는 두 번째 선정 정형구가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 (S45.8)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본격적인 삼매는 두 번째 선정부터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선정은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ā)를 떠난 것이다. 이는 언어적 형성이 사라진 것을 말한다. 그래서 쩻따소 에꼬디바왕(cetaso ekodibhāva)”(S45.8)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이 하나로 통일 되는 심일경(心一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심일경에 대하여 KTPS본 청정도론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마음의 통일, 즉 심일경성은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나는 안으로 마음을 확립하고 제어하고 통일하여 삼매에 든다.’(MN.I.116)라고 시작하는 구절에서처럼 찰나적 삼매로 여겨진다.”(KPTS역 청정도론, 1762번 각주)

 

 

전재성 선생은 왜 이렇게 각주를 달았을까? 이는 이어지는 각주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각주를 보면 마음의 최초의 통일은 나태하지 않게 열심히 정진을 도모했고, 혼란스럽게 않게 새김을 확립했고, 격동하지 않게 몸을 고요히 했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했다.’(MN.I.21)에서의 묘사처럼 정진과 새김의 두 가지 과정을 통해서 찰나적 삼매로서 인식되기 때문이다.”(KPTS역 청정도론, 1762번 각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찰나적 삼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순간삼매를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삼매라 하여 반드시 근본삼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삼매도 있다는 것이다.

 

찰나삼매를 순간삼매(khaika samādhi)라고도 한다. 순간적으로 현전하는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왜 이렇게 순간에 집중해야 할까? 그것은 현상이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순간 집중해야 한다. 이는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심일경성이 있어야 순간포착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순간삼매는 근본삼매와 같은 것으로 본다. 청정도론에서는“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하여 찰나삼매(순간삼매)를 말하고 있다.

 

찰나삼매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두 갈래 사유의 경’(M19, MN.I.116)두려움과 공포의 경’(M4, MN.I.21)을 근거로 한다. 두 가지 인용문을 보면 공통적으로 심일경성을 말하고 있다.

 

순간삼매에 대한 경문을 보면 이처럼 나는 안으로 마음을 확립하고 제어하고 통일하여 삼매에 든다.’ (M19, MN.I.116)라고 했다. 이는 과도한 사유와 숙고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과도하게 사유하고 숙고하면 나의 몸이 피로해진다. 몸이 피로해지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면 마음이 삼매에서 멀어진다.”(M1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수념이나 자애관을 하고 난다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본격적인 삼매 수행을 해야 함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경우 순간삼매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수념이나 자애관은 예비수행에 대한 성격이 짙다. 이는 불수념이나 자애관이 기초적 삼매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네 가지 예비적 수행

 

자애관이나 불수념이나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또한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예비 수행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좌선에 임하기 전에 먼저 네 가지 예비수행을 한다. 찬먜사야도는 이를 ‘네 가지 보호’라고도 말했다.

 

찬먜사야도의 법문집 ‘위빳사나 수행 28일’(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보면 네 가지 예비수행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1) 부처님 덕성에 대한 숙고, 2) 자애의 계발, 3) 몸의 혐오에 대한 숙고, 4) 죽음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찬먜사야도가 말하는 예비수행으로서 불수념은 어떤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을 떠 올리면서 “부처님,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정신적 오염원과 장애를 타파하시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일체중생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고 숙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하면 기쁨을 느껴 열심히 수행할 수 있도록 고무된다고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예비수행으로서 또는 기초적 수행으로서 불수념과 자애수행 등 사마타 명상주제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예비수행 또는 기초적 수행단계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수행승이여, 그대는 이와 같은 기초적 삼매를 이와 같은 자애를 통해서 닦았으면, 그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이 기초적 삼매를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네 가지 선정이나 다섯 가지 선정을 성취하면서 사유를 수반하고 숙고를 수반하는 선정 등의 방식으로 닦아야 한다.”(Vism.9.116)라고 했다.

 

불수념이 예비적 수행인 것은 분명하다. 본수행에 앞서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는 수행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하시 전통에서는 좌선에 임하기 전에 먼저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을 한다. 그렇다면 네 가지 예비적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가지 예비수행하는 방법이 찬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다. 마하시 전통애서는 모두 하는 것이다. 불수념에 대해서는 “부처님,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통해 모든 정신적 오염원과 장애를 타파하시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셨고, 그럼으로써 일체중생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며 부처님의 덕성을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자애관에 대해서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부정관에 대해서는 “몸은 창자, , 가래… 등과 같은 불결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며 몸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수념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지만 지금 당장, 또는 내일이나 모레 등 어느 순간이라도 죽을 수 있다. 삶은 확실하지 않지만 죽음은 확실하다.”라며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는 것이다.

 

 

불수념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불수념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는 수행을 하면 다음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부처님에 대한 새김에 매진하는 수행승은 스승에 대하여 존경하고, 섬기고, 믿음이 확장되고, 새김이 확장되고, 지혜가 확장되고, 공덕이 확장되고, 희열과 기쁨이 많아지고,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고, 스승과 상응하는 삶의 지각을 얻는다. 또한 부처님의 덕성에 대한 새김을 지닌 몸도 탑묘처럼 공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 되고, 마음은 부처님의 경지로 향하게 되고, 위범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면, 스승이 현전하는 것처럼,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생겨난다. 또한 더 이상 현관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세에는 좋은 곳으로 간다.”(Vism.7.67)

 

 

불수념 공덕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마하나마의 경에서는 불수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때에 여래에 관하여 올바로 마음이 정초됩니다.”(A6.10)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불수념하면 삶의 좌표가 설정되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오로지 한방향으로 주욱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불수념 했을 때 더 이상 현관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세에는 좋은 곳으로 간다.”라고 했다. 이런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수념하여 본격적인 삼매로 들어가서 진리를 꿰뚫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예비적 수행단계, 즉 기초적 삼매에 머물더라도 그 공덕으로 인하여 삼십삼천과 같은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2021-04-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