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히야 다루찌리야의 드라마틱한 삶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4. 11:49

 

바히야 다루찌리야의 드라마틱한 삶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달리기 하는 장면이 있다. 수염을 기른 주인공이 미국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따라 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 붙었다. 시간이 갈수록 차츰 늘어난다. 그가 멈추기라도 하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뒤따르는 무리들도 따라서 뛰기 시작한다.

 

 

포레스트 검프가 뛰기 시작한 것은 괴로운 일을 잊기 위해서였다. 가만 있으면 참을 수 없어서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몇날 몇일을, 그리고 몇 달을 뛰었을 때 사람들은 무언가 있어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도인이 출현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까지 더부룩하다.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한마디 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이 장면을 보면 바히야가 연상된다.

 

대양무역상 바히야

 

우다나에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인물이 있다. 바히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바히야는 어찌하다보니 아라한으로 살게 되었다. 아라한이 아님에도 아라한처럼 산 것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젊어서 집에서 지내다가 무역을 하기 위해 많은 상품을 배에 싣고 바다로 나아가 연속적으로 항해하면서 일곱 번이나 인더스(Sindhu)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덟 번째로 쑤반나부미(Suvannabhūmi)로 가자.’라고 상품을 채우고 배에 올랐다. 그러나 배가 대양으로 깊이 들어가다 원하는 지역에 도착하지 않고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과 함께 물고기와 거북이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바히야는 난파한 배의 판자를 잡고 파도의 힘으로 차츰 밀려나와 칠 일 째에 쑵빠라까(Suppāraka) 항구의 해안에 도착했다.”(UdA.77-79, DhpA.II.209-216)

 

 

인연담을 보면 바히야는 무역을 하는 무역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대양무역을 한 것이다. 대양무역은 늘 위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양항해를 성공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히야는 일곱 번째 까지는 인도대륙 서쪽, 즉 인더스 강 아래 해역에서 무역했다. 오늘날 아랍반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덟 번째 항해 때는 정반대로 인도 동쪽 대양을 항해하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쑤반나부미라고 했다.

 

쑤반나부미는 어느 지역일까? 빠알리사전을 찾아보니 “Suvannabhūmi is generally identified with Lower Burma, probably the Pagan and Moulmein districts. It probably included the coast from Rangoon to Singapore.”라고 설명되어 있다. 양곤 으로부터 싱가포르에 이르는 해안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말레이반도 서안을 말한다. 여기서 쑤반나부미(Suvannabhūmi)‘land of gold’의 뜻으로 금국(金國), 금의 나라를 말한다.

 

바히야는 쑤반나부미를 향하여 대양 항해하다가 배가 난파되었다. 그는 운좋게 살아서 쑵빠라까(Suppāraka) 항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쑵빠라까는 어디에 있는 도시일까? 빠알리사전을 찾아보니 Sopāraでムンバイの北方라고 되어 있다. 뭄바이 북쪽에 있는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뭄바이는 인도 서쪽에 있는 대도시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바히야는 인도 서북 해안 지역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위선(僞善)을 택한 바히야

 

바히야는 큰 꿈을 안고 대양 항해했으나 배가 난파되어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몸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어지는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바다에 빠져 모든 옷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벌거벗은 채 해안에 누워 지친 몸을 추수리고 기운을 찾고 일어났다. 벌거벗어 창피하기 때문에 숲으로 들어가 덮을 만한 것을 찾았으나 다른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어서, 제비풀의 줄기를 잘라 그 껍질을 벗겨서 하의와 상의를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나무조각을 쪼개서 껍질로 엮어서 하의와 상의를 만들어 입었다고도 말했다. 하여튼 나무로 만든 것을 오래 걸치고 다녔기 때문에 그 전의 이름 바히야에 다루찌리야(Dāruciriya)라는 별명이 부가되었다.

 

그는 그렇게 걸치고 한 야자수 껍데기를 발우로 삼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 세상에 거룩한 님이 있다면, 이러한 분일 것이다. 이 고귀한 분이 옷을 보시하면 받을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여의어 받지 않을 것인가?’라고 그를 실험하기 위해 여러 지방에서 옷을 가져왔다.”(UdA.77-79, DhpA.II.209-216)

 

 

바히야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이어지는 인연담을 보면 바히야의 고민이 나온다. 바히야는 내가 이러한 삶을 거부하면, 그들은 나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이러한 삶을 살면 어떨까? 그러면 나에게 이익과 명성이 생겨날 것이다.”(UdA.77-79, DhpA.II.209-216)

라고 생각한 것이다.

 

바히야는 위선(僞善)을 선택했다. 이는 장사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장사꾼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계산적일 수 있음을 말한다. 옷을 거절함으로 인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구나 명성까지 얻을 수 있다.

 

결국 바히야의 뜻대로 되었다. 바히야가 옷을 거절하자 사람들은 이 고귀한 분은 욕망을 여의었다.”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바히야는 뜻하지 않게, 또는 자신의 의도대로 아라한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겉모양만 보고 판단했을 때

 

사람들은 바히야를 거룩한 님, 아라한으로 대우했다. 사람들은 옷뿐만 아니라 먹을 것과 거처도 보시했다. 바히야가 사원 쪽으로 걸어가자 사원을 보시한 것이다.

 

이제 바히야는 거룩한 님, 아라한으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바히야는 이들은 옷을 입은 것만 가지고 믿음을 일으켜서 나와 같은 존재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마땅히 그들을 위해서 훌륭한 삶을 살아야 겠다.”라고 다짐한다. 겉모양만 거룩한 자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평가한다. 그 사람의 학력이나 경력, 즉 스펙이 좋으면 품성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품성이 스펙에 비례할 수 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과 같다. 바히야와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바히야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위하여 위선을 택했다. 그래서 거룩한 자처럼 살았다. 거룩한 자처럼 살면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일까? 머리를 깍고 출가하여 절에서 살면 저절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일까?

 

바히야는 사람들이 그를 거룩한 자라고 평가하자, 그 자신도 거룩한 자라고 생각했다. 이는 착각이다. 그럼에도 그는 점점 더 존경받고 숭배받게 되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바히야 경 본문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거룩한 님이거나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이 있다면, 나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다.”(Ud.6)라고 실려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바히야의 전생을 보면

 

바히야는 스스로 아라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존중해 주고 공경해 주니 아라한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경에서는 하늘사람(天神)이 등장한다. 예전의 친지였던 하늘사람을 말한다.

 

예전의 친지였던 하늘사람은 바히야 다루찌리야가 있는 곳으로 찾아 갔다. 찾아 가서 바히야여, 그대는 거룩한 님도 아니고, 또한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도 아닙니다. 그대는 거룩한 님이 될 수 있거나 거룩한 길에 들어서는 수행을 닦지 않았습니다.”(Ud.6)라고 말해 준다.

 

여기서 예전의 친지였던 하늘사람과 바히야는 어떤 관계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이 하늘사람은 깟싸빠 부처님 시대에 바히야의 동료 수행승이었다.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의 가르침이 퇴전하자 일곱 명의 수행승들이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가르침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자.”(UdA.77-79, DhpA.II.209-216)라고 생각했다.

 

일곱 명의 수행자들은 정법이 사라지기 전에 깨닫고자 했다. 그래서그들은 황금탑에 숭배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당시에 그들은 빨리 해탈하기 위해 사다리를 사용해서 가파른 산위로 올라가서 사다리를 내던져버리고 명상했다.” (UdA.77-79, DhpA.II.209-216)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건너온 다리를 불살라 버린 것과 같다. 불퇴전의 각오로 수행에 임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수행한 것이다.

 

일곱 명의 수행자는 각자 근기가 달랐던 것 같다. 가장 연장자는 하루 밤 만에 거룩한 경지, 즉 아라한과에 도달했다. 다음날 두번째 연장자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不還果), 즉 아나함과에 들었다.

 

아라한 경지에 든 자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고, 불환자는 정거천에 태어났다. 나머지 다섯 명은 정진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다섯 명의 수행승은 거기서 소진하여 죽었다.

 

천상계를 윤회하다가

 

다섯 명의 수행자는 천상계에 태어났다. 이는 수행공덕 때문일 것이다. 주석에 서는 그들은 거기서 소진하여 천상계에 태어나 부처님과 부처님 사이의 시대에 하늘사람으로 윤회하다가 부처님이 출현하자 천상계에서 죽어서 한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UdA.77-79, DhpA.II.209-216)라고 했다.

 

다섯 명의 수행자는 깟싸빠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있을 때 수행했다. 여기서 깟싸빠부처님은 석가모니 바로 전에 출현했던 과거부처님이다. 현겁의 세 번째 부처님으로 과거칠불 중의 하나인 것이다.

 

다섯 명의 수행자는 천상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부처님이 출현했을 때 인간계의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 주석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 하나는 왕 뿍꾸싸띠가 되었고, 하나는 꾸마라 깟싸빠가 되었고, 하나는 답바 말라뿟따가 되었고, 하나는 유행자 싸비야가 되었고, 하나는 바히야 다루찌리야가 되었다.”(UdA.77-79, DhpA.II.209-216)라고 했다.

 

 

바히야는 자신의 전생을 잊어버렸다.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음에도 전생을 잊어 버리고 무역을 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위선으로 사는 것이다. 거룩한 자가 아니면서 거룩한 자처럼 사는 것이다. 이는 전생에 수행자로 산 업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하늘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곱 명의 수행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사람이다. 불환자가 되어서 정거천에 태어난 하늘사람을 말한다.

 

정거천에 태어난 하늘사람은 바히야의 행각을 보고서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위선을 행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침 세상에 부처가 출현했기 때문에 고따마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고자 했다. 그래서 바히야여, 북쪽나라의 싸밧티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지금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계십니다. 바히야여, 그 세존께서 거룩한 님이신데, 그가 거룩한 경지를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십니다.”(Ud.6)라고 알려 주었다.

 

마음이 급해진 바히야는

 

바히야는 더 이상 위선자로 살 수 없었다. 하루 빨리 부처님에게 가서 가르침을 듣고 거룩한 자, 아라한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경에서는 즉시 쑵빠라까를 떠나서 단 하룻밤 사이에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도착했다.”(Ud.6)라고 되어 있다.

 

인도 서부해안에서 사밧티까지 어떻게 하루밤 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하늘사람의 초월적 능력에 의해서 가능했다.”(UdA.85)라고 표현했다.

 

바히야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아라한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밧티 시로 탁발 나가고 없었다. 이에 바히야는 탁발 현장까지 달려 갔다. 거기서 부처님을 보았다. 경에서는청정하고 경건하고 감관이 고요하고 마음이 고요하고 위없는 수련과 멈춤을 이루었고 길들여지고 수호되고 감관이 잘 제어된 용을 보았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경에서는 부처님을 용(nāga)으로 묘사했다. 용을 뜻하는 나가는 ‘na-āga’의 형태로서 언어적 유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석에서는포기된 탐욕 등 오염을 통해 가지 않고, 더 이상 태어남으로 가지 않는 자로 해석하고, 법신으로 헌신의 가치를 지닌 존재, 잘 제어된 감관을 지닌 존재”(UdA.87)라고 설명했다.

 

탁발행렬을 멈추게 하고

 

바히야는 탁발중인 부처님에게 가까이 갔다. 가까이 가서는 부처님의 두발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서는 세존이시여, 제가 오랜 세월 유익하고 안녕하도록,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 올바로 잘 가신 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Ud.6)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참으로 난감했을 것 같다. 탁발 중임에도 앞을 가로 막고 가르침을 달라고 했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부처님은 바히야여, 지금은 알맞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도시로 탁발하러 가는 길이다.”(Ud.6)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바히야는 듣지 않았다. 무려 두번이나 똑 같은 말로 간청했다.

 

본래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설하려 한다면 피곤한 것이다. 거리에서 길거리 전도사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인도불교전통에서는 세번을 청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바히야는 세번 청했다.

 

바히야는 몹시 급했던 것 같다. 탁발 나가는 부처님을 붙잡고서 법을 설해 달라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 급했을까? 이는 두번째 청했을 때 세존이시여, 세존의 목숨이 얼마나 길고 제 목숨이 얼마나 긴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오랜 세월 유익하고 안녕하도록,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 올바로 잘 가신 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Ud.6)라고 말했다.

 

바히야는 부처님을 부를 때 두 가지 칭호를 썼다. 하나는 존경 받는 님이고, 또 하나는 올바로 잘 가신 님이다. 여기서 올바로 잘 가신 님은 수가따(sugata)에 대한 것이다.

 

바히야는 왜 수가따라고 불렀을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1)고귀한 길을 따라 감으로 가는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에, 2)불사의 열반이라는 좋은 장소로 가기 때문에, 3)이미 끊어버린 오염상태로 퇴전하지 않고 흐름에 든 길 등을 통해서 올바로 가기 때문에, 4)올바로 말하기 때문에”(UdA.88)라고 했다.

 

수가따를 한자어로 선서(善逝)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좋은 곳으로 가신 분으로 번역된다. 열반을 말한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네번째 올바로 말하기 때문에수가따라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우루벨라의 경을 보면, “때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한다면”(A4.22)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알 수 없다. 이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밤 죽을 수 있다. 아니 한시간 후에 죽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시가 급한 것이다. 바히야는 한시가 급했다. 부처님 앞길을 가로 막고 막무가내로 법을 설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 같다.

 

짧지만 심오한 법문

 

부처님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부처님은 바히야가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그것은 수가따의 설명에서 언급된 네가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짤막한 법문을 해주었다.

 

 

“Tasmātiha te, bāhiya, eva sikkhitabba –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ī’ ti. Evañhi te, bāhiya, sikkhitabba. Yato kho te, bāhiya,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tato tva, bāhiya, na tena; yato tva, bāhiya, na tena tato tva, bāhiya, na tattha; yato tva, bāhiya, na tattha, tato tva, bāhiya, nevidha na hura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6)

 

 

부처님은 감각에 대한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여섯 가지 감각능력 중에서 시각, 청각이 먼저 나온다. 이는 시각과 청각이 감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똑 같은 내용이 상윳따니까야 여섯 가지 감역의 모음’(S35)말룽끼야뿟따의 경’(S35.95)에도 실려 있다.

 

볼 때는 보여질 뿐

 

볼 때는 보여질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이는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과 같다. 왜곡해서 보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이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에서는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망상은 어떻게 일어날까? 먼저 눈으로 형상을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M18.17)라고 설명된다. 이를 흔히 삼사화합이라고 말한다.

 

삼사화합에서 시각의식은 식별된 것은 아니다. 분별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각의식에 대하여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지 않는다.”(UdA.90-94, Srp.II.383-387)라고 설명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분별이 이루어지기 전단계를 말한다.

 

부처님이 볼 때는 보여질 뿐이라고 말한 것은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고,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17)라고 했다.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볼 때는 보여질 뿐이고,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다. 마치 위빠사나 수행에서 대상을 보았을 때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볼 때는 볼 뿐, 들을 때는 들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형상이나 소리로 인한 갈애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대상과의 접촉하면 세 가지 느낌이 발생한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이 느낌을 알아 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일어난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탐욕이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성냄이 일어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느낌은 중립인데, 조건에 따라 즐거운 느낌 또는 괴로운 느낌으로 바뀐다. 이런 삶은 다름 아닌 탐욕과 분노와 미혹의 삶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 , 치로 살아간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부처님은 바히야에게 무탐, 무진, 무치의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래서 볼 때는 보여질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tato tva, bāhiya, na tena)”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그대에게 탐욕 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는 그곳에 있지 않다.”(UdA.90-94, Srp.II.383-387)라는 것이다.

 

재빨리 곧바로 아는 님 가운데 제일

 

부처님은 바히야에게 짤막한 법문을 해 주었다. 탁발을 막고 가르침을 청했을 때짧은 법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매우 심오한 법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자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세존으로부터 이 간략한 가르침을 듣고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했다.”(Ud.6)라고 했다.

 

바히야는 가장 짧은 법문을 듣고 가장 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바히야에 대하여 재빨리 곧바로 아는 님 가운데 제일(khippābhiññāna agga)’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부처님의 명료한 진술의 깊이와 바히야의 정신적 능력의 성숙때문으로 보고 있다.

 

바히야는 부처님으로부터 짧고 심오한 법문을 듣고 난 다음 곧바로 깨달았다.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런데 법문을 듣고 얼마되지 않아 암소에 받혀 죽었다는 것이다. 송아지가 있는 암소에 받혀 죽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히야가 탁발행렬을 막고 배움을 청한 것은 바히야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천만다행이 된다.

 

부처님 제자들은 바히야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래서 그의 운명은 어떻고 그의 미래는 어떠합니까?”라며 물어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현자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진리에 따라 가르침을 실천했으며, 가르침을 이유로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수행승들이여,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Ud.6)라고 말해 주었다.

 

, , 치의 뿌리가 뽑힌 자는

 

바히야는 부처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짤막한 법문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로 시작 되는 법문이다. 이렇게 실천했을 때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속에 없다.”(Ud.6)라고 했다.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대는 그속에 없다고 했다. 이는 그대는 탐욕에 의해서 생기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증오에 의해서 자극되지 않고, 그러한 어리석음에 의해서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Srp.II.383)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탐, , 치 삼독에서 자유로움을 말한다.

 

아라한은 번뇌가 소멸된 자를 말한다. 다른 말로 탐, , 치의 뿌리가 뽑힌 자를 말한다. 자아관념이 없는 무아의 아라한에게는 죽음이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불사라고 한다. 불사이기에 태어남도 없다. 불생불사의 아라한의 수명이 다하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을 탐착하고 마네.

그래서 형상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안에서 자라나

마음이 혼란하게 되어

탐욕과 분노도 더불어 자라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운다면

그에게 열반은 멀다고 하리.”(S35.95)

 

 

2021-05-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