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불교근본주의가 뭐 어때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8. 09:54

불교근본주의가 뭐 어때서?

 

 

사람들은 근본주의 하면 백안시하는 것 같다. 특히 종교근본주의가 그렇다. 아마도 종교근본주의 폐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근본주의 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다. 원리주의이다. 근본주의 종교와 원리주의 종교가 충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불교에도 근본주의가 있을까? 아직까지 불교근본주의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정복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근본주의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교근본주의라는 말을 쓴다.

 

글을 쓸 때 종종 나는 불교근본주의자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런 선언에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어느 많이 배운 자는 요즘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한다. 또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는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웃종교와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근본주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폭력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에 충실하자는 뜻에서 근본주의를 말한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말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근본가르침이다.

 

불교의 아위힝사(不傷害)

 

유일신 종교에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를 말하면 위험하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무리 근본주의를 말해도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부처님 근본 가르침 그 어디에도 폭력적 가르침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폭력 가르침으로 넘쳐난다.

 

팔정도에서 삼마쌍깝뽀(正思)를 보면 아위힝사쌍깝뽀가 있다. 폭력을 여읜 사유로 번역된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폭력을 싫어 한다. 이런 가르침은 오계에서 불살생으로 나타난다. 이는 팔정도 삼마깜만또(正命)에서 빠나띠빠따 웨라마니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겠습니다.”(S45.8)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불살생계는 살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해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동물이나 곤충도 해쳐서는 안된다. 심지어 식물도 대상이 된다. 자애경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Stn.146)라고 했다. 심지어 율장에서는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은, 심지어 풀잎이라도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목적으로 갖지 말아야 한다.(Vin.I.96)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사람은 당연하고 동물은 물론 식물도 해쳐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 때리면 맞는 것이다. 그래서 “ ‘그는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진다.”(Dhp.4)라고 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dhammavijaya)

 

불교에서는 폭력을 싫어한다. 때리면 맞는다. 그에게 원한이 있어도 원한을 갚지 않고 원한을 내려 놓아 버린다. 화 내는 자가 있으면 화를 내지 않는다. 서로 서로 승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아소까대왕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정복전쟁을 포기했다. 깔링가 전투의 참상을 보고서 칼로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을 그만 둔 것이다. 그 대신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를 담마위자야(dhammavijaya)라고 한다.

 

아소까는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천명했다. 그렇게 한 것은 부처님의 담마야말로 이 세상에서의 평화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평화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세계에 담마사절단(dhammadūta)’을 파견했다.

 

담마사절단은 전세계 열 나라에 파견되었다.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갖고,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동쪽으로는 미얀마, 북쪽으로는 힌두쿠시 지역까지 갔다. 이는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평화의 가르침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이념에 갇혀 버리면

 

요즘 노자를 읽고 있다. 최진석 선생의 나홀로 읽는 도덕경을 말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이념화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정치와 종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기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92)라고 했다. 왜 그런가? 자신을 포기하고 이념적 구호를 외쳤을 때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수행도 되어 있지 않은 자가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거창한 구호를 외쳤을 때 사기꾼이기 쉽다. 그런데 구호는 정치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사교 모임에서는 정치나 종교 얘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은 다음번 모임에 초대를 못 받아요.”(92)라고 했다. 이 글을 보고서 뜨끔 했다. 글을 쓰면서 불교를 너무 드러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념적 구호를 외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도덕경에서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아낀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1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와 민족,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 등과 같은 거창한 이념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몸부터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이 되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하도 사랑할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도 있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이 어느 곳을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남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되리.”(S3.8)라고 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은 남도 혐오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국가와 민족,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을 외쳐 보지만 결국 폭력으로 변질된다.

 

특정한 이념에 갇혀 버리면 경색되고 만다. 이념이 가치론적으로 빠졌을 때 분열과 갈등이 시작된다. 이념이 기준이 되었을 때 나와 네가 구분되고, 나의 편이 아니면 배제된다. 이렇게 기준, 구분, 배제의 과정을 거치면 나중에는 폭력이 된다. 개인 수행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가 이념에 빠졌을 때는 폭력적 성향을 띠게 된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교를 단지 문자적으로만 믿으면 폭력이 될 수 있다. 종교라는 이념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 수행이 따르면 아름다운 실천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나처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계를 지키고 수행을 하면 자신도 수호되고 상대방도 수호된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면 자타가 수호되는 것이다. 

 

경전을 신봉하면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십년 넘게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매일 쓰는 것은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한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는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다. 늘 새롭다. 그래서 쓰고 또 쓰게 된다. 나의 현실과 비추어 보았을 때 딱 들어 맞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종교에 너무 빠지면 근본주의자처럼 본다는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경전은 부처님과 같다. 부처님이 지금 계시지 않지만 말로 남긴 것이 글로서 남아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지금 여기 계신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경전을 신봉하는 듯 하는 태도에 비판도 있다.

 

포항에 있는 어느 수학자는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이라고 했다. 마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바이블의 한구절 한구절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초기경전을 모두 읽어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경전을 읽어 보지 않고 경전을 비판하는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비난하는 자는 근거가 없다. 근거 없이 인신모독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은 근거를 갖고 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신봉하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 바이블과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본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불교근본주의를 비난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역시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른 확신이다. 그래서 삿다(saddha)라고 한다.

 

가르침을 자신의 처지에 대입해서 보았을 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믿는 것이다. 사성제가 그렇고, 팔정도가 그렇고, 십이연기가 그렇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 어느 것 하나 삐띠(喜悅)’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망상이라느니,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아직까지 불교근본주의라는 말은 없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왜 그런가? 불교는 근본적으로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 그 어디에도 폭력적 요소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주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불교가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 멀어졌다는 것이다.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불교가 되어 버린다. 결국 가르침이 변질되어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정법이 사라지면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어느 때 부처가 출현하면 다시 정법시대가 될 것이다.

 

불교근본주의를 주장한 사람이 있다. 홍사성 선생을 말한다. 홍사성 선생은 불교평론에서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 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불교평론 200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너무 멀어져 있어서 이것이 불교인지 의심이 들정도가 되었다. 어떤 교리는 부처님 근본가르침과 정반대로 되어 있다. 어디를 보아도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 업과 윤회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개산조 스님 이야기만 있을 때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멀어진 것이다.

 

불교가 근본가르침에서 멀어지면 변질되어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홍사성 선생은 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 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불교평론 2003)라고 주장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근본가르침으로 회귀해야 함을 말한다.

 

본래 가르침에서 팔만사천리나 동떨어진 불교가 되었을 때 무늬만 불교가 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 가르침이 없는 불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근본가르침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잃어버린 불교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근본주의가 뭐 어때서?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초기경전 문구를 인용하고 주석을 인용하여 쓴다. 그러다 보니 초기경전 신봉자가 되었다. 이런 나를 누군가는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자로 볼 것이다. 마치 기독교 근본주의자나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동급으로 취급할지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가 경전을 비난한다는 말이 있다. 해 보지 않은 자가 비난하는 것이다. 수행도 그렇다. 수행도 해보지 않은 자가 수행무용론을 주장한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도 그렇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르는 자가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비난한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면 근본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유일신교 근본주의자나 원리주의자처럼 호전적이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자애와 연민으로 넘쳐난다. 왜 그런가? 불교는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 연기법이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S12.21)라는 연기송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은 관계를 말한다.

 

연기법은 상호의존하여 조건발생하는 법칙이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평화의 종교가 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불교근본주의가 뭐 어때서?

 

 

2021-05-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