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0. 07:44

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구경법(究竟法)을 말한다. 이를 빠라맛타담마(parāmaṭṭhadhamma)라고 한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등 감각과 관련된 것들도 구경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는 것 듣는 것 등이 왜 법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법임을 말한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면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벌써 세 개의 법이 있게 되는 것이다. 눈이라는 법, 형상이라는 법, 시각의식이라는 법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청각에 대한 것도 있고 후각에 대한 것도 있다. 감각에 대한 것을 모두 모아 보면 열여 덟가지가 된다. 이를 십팔계라고 한다.

우리 몸 자체도 법이고 우리 마음 자체도 법이다. 오온이 법인 것이다. 좀 더 확장하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법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신의 작용도 법이다.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마음의 작용도 법인 것이다.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모두 52가지 법이 있다.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삼라만상 산천초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세계를 말한다. 시각으로 만든 세계나 청각으로 만든 세계 등을 말한다. 그래서 세계는 창조 되었다가 파괴되기를 반복한다. 그것도 순간적이다. 순간에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글을 하나 올렸다. 계행에 대한 것이다.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이 계를 지키고자 목숨마저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청정도론 제1장 계행에서 마하띳사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기근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으면 탁발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비구계에서는 주지 않는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있다. 이는 오계에도 있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해서는 안된다. 불투도계(不偸盜戒)를 말한다. 더구나 비구는 초목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율장의 가르침도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장로는 배가 고파도 망고를 따 먹을 수 없었다.

허기에 지친 장로는 망고나무 아래에 쓰러졌다. 장로 주변에는 떨어진 망고로 가득했다. 그것도 잘 익은 것이다. 그러나 장로는 집어먹지 않았다. 주지 않은 것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로는 아사 직전에 구출되었다. 지나가던 재가의 남자신도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재가자는 망고즙을 내서 장로에게 주었다. 장로는 비로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런가? 오후였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있다. 그래서 망고를 주지 않고 즙을 내서 준 것이다. 이런 전통은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도 볼 수 있다.

집중수행 들어가면 선원에서 살아야 한다. 팔계를 지켜야 한다. 팔계를 보면 오후에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오후불식계가 있다. 이는 하루 한끼의 식사를 하고 밤에 식사하는 것을 삼가고 때 아닌 때 식사하는 것을 삼간다.”(A8.42)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루를 출가자와 똑같이 살고자 하는 것이다.

 

재가자의 팔계에 대하여 하루밤하루낮계라고 한다. 단 하루만 유효한 것이다. 재가자는 생업이 있기 때문에 팔계를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후불식에 대한 계가 그렇다. 그래서 매일 팔계를 지키려면 매일 계를 받아야 한다. 선원으로 집중수행하러 가면 매일 아침 팔계를 새로 받는다.

 

선원에서 저녁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특히 재가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기를 느낄 것이다.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 한다. 아침에는 죽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 때 즙은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주스타임이라고 하여 저녁먹을 시간에 주스가 제공된다.

수행은 절박한 심정으로 해야 한다. 안락한 환경보다는 거친 환경에서 더 효과를 볼 수 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이유라고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숲이나 나무아래, 동굴, 빈집, 오두막에서 선정에 들라고 했다. 장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사직전의 장로는 재가자의 보시로 인하여 구출되었다. 장로는 아사직전까지 법을 관찰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법이다. 먹을 것과 관계된 법도 있을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갈애가 일어났을 때 이를 관찰한 것이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법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삼특상, 법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한 관찰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삼법인이라고 한다.

법을 관찰하면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법에도 성품이 있는 것이다. 어떤 성품인가? 망고를 보았을 때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식탐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그 탐욕을 보아야 한다.

탐욕은 거머쥐려 하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 반대로 성냄은 밀쳐내려고 하는 고유한 성품이 있다. 이처럼 법은 각자 고유성품이 있다. 마치 개인에게 개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법은 공통적 성품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법이든지 예외없이 무상, , 무아라는 세 가지 공통적 성품이 있음을 말한다.

장로는 아사직전까지 법의 성품을 관찰했다. 배고프다고 때 아닌 때에 먹지 않은 것이다. 계율을 지키며 위빠사나 수행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무상, , 무아의 공통적 성품에 대한 외경이 일어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이 실현된 것을 말한다.

열반 체험을 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실현된다. 구출된 장로는 재가남자의 등에 업혀 갈 때 아라한이 되었다. 도와 과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법은 생멸한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한다. 잘 주의집중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무상, , 무아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열반을 체험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열반이다. 출가는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여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을 성취하여 성자의 흐름에 든다면 아무리 못 잡아도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난다는 것이다. 불사가 되는 것이다.

 

불사이기 때문에 불생이 된다. 불생불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해하는 것 같다.

장로와 망고이야기를 카톡방에 올렸다. 어느 법우가 계금취견(戒禁取見)이 아닌지 물었다. 계율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 아니냐는 것이다. 계금취견은 외도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후불식을 계금취견으로 본다면 가르침에 대한 무지로 본다. 빠알리 삼장을 읽어 보았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질문을 페이스북에서도 받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생계형이나 도피형 출가자라면 아무 때나 먹을 겁니다.”라고 짤막하게 답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배고픔론을 말했다. 그는 이렇게 메세지를 남겼다.


배고프면 무엇인가 먹는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배고픈 데 왜 참는거죠? 수행을 위해서? 그런데 머리속에는 배고픔으로 꽉 차있다면 그게 수행일까요....? ㅎ밥을 먹는다는것은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를 좋은 곳으로 쓴다면 좋은 것일 아닐까요? ㅎㅎ.....그러고 보니 제가 남방불교의 계에 대해서 너무나 쓸데 없는 말을 많이 한것 같군요....죄송하고...좋은 휴일 되십시요 ()”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끼니 때가 되면 밥을 먹는다. 하루 세 끼 먹는다. 그러나 노동을 하면 새참도 먹고 밤참도 먹는다. 하루 세 끼가 아니라 네 끼도 되고 다섯 끼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는 출가수행자는 하루 한끼로도 족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배고픈 상태에서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것이다.

수행자는 하루 한끼만 먹고도 살 수 있다. 배고프다고 때 아닌 때에 먹는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욕망에 지배된 자를 수행자라고 말 할 수 없다. 하루 굶는다고 큰 일 나는 것은 아니다. 사흘 굶었다고 담 넘어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식해보면 알 수 있다.

단식해 본 적이 있다. 비록 효소단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주일을 버텼다. 힘이 빠지긴 했지만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수행도 하고 등산도 하는 등 할 것 다 했다. 그럼에도 오후 한끼 못 먹어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오후불식에 대해서 경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스님들도 반대한다. 남방과 북방은 수행환경이 같지 않음을 말한다. 북방은 춥기 때문에 오후불식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는 스님들이 오후불식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는 것을 보면 이유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오후불식한다면 한국불교는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특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스님들이 오후불식을 실천한다면 스님으로서 인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스님들은 출가할 때 소유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출가정신에 맞지 않는다. 스님들은 비구계 또는 비구니계라는 구족계를 받는다. 한평생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족계는 통과의례용 같다. 누구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율장에 수많은 계율이 있지만 지키지 않는 것 같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한다. 소소계는 버려도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개차(開遮法)을 말하기도 한다.

본래 계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식카빠다(sikkhāpada)’라고 한다. 이는 학습계율이라는 뜻이다. 계행은 학습에 의해서 완성됨을 말한다. 그래서 계율을 어기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녀야 한다. 계가 파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파계자로 있을 수 없다. 술을 마셨다면 불음주계를 어긴 것이 된다. 다음 법회에 참석하여 오계를 받아야 한다. 계를 복구해 놓는 것이다. 출가자들 역시 계를 파했다면 복구시켜 놓아야 한다. 보름마다 포살법회 하는 이유라고 본다. 그럼에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 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키지도 못하는 계는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럴 경우 계를 반납해야 할 것이다. 비구계를 받은 자가 200개 이상 되는 계를 지킬 자신이 없을 때 계를 내놓는 것이다. 남방으로 단기출가한 재가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지키지도 못할 계를 붙들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하띳사 장로는 계를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다. 아사 직전까지 떨어진 망고열매를 먹지 않았다. 주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는다는 불투도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이고, 배고파 죽겠네.”라며 배고픔 타령하지 않았다.

 

장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도와 과를 이루었다. 법의 성품을 본 것이다. 열반을 체험했을 때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사나, 십년을 사나, 백년을 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진리를 보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한국적 현실에서 탁발은 가능하지 않다. 대안으로서 오후불식을 채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율장대로 살기 힘들면 율장정신만큼이라도 지켜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오후불식하며 하루 한끼로 산다면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스님들이 하루 한끼만 먹고 산다면 한국불교는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


2021-05-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