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잘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고, 누군가 해야 할이라면 내가 한다." 참으로 명문이다. 이 말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처럼 완전한 문장체로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늘 아침 에스엔에스에서 본 것이다.
답글을 달았다. "쓰레기를 보면 먼저 보는 사람이 줍고, 맞벌이하면 먼저 퇴근한 사람이 준비한다."라고. 이런 말을 글을 쓸 때 수도없이 사용했다. 맛지마니까야와 율장대품에 실려 있는 아누룻다 존자에 대한 이야기에 실려 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Vin.I.352)
이것이 근거가 되는 경이다. 이 말은 "집안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주어야 한다."라는 말의 근거가 된다. 이런 논리를 맞벌이 부부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먼저 퇴근한 사람이 저녁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
저녁에 저녁상을 차린다. 아내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저녁밥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며 반찬을 준비한다. 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것은 기본이다. 요리하는 것도 이제 능숙하다. 국이나 찌게, 무침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설거지는 늦게 온 사람이 한다. 먼저 퇴근한 사람이 저녁상을 준비하고 나중에 온 사람이 뒷정리를 하는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도 그랬다. 아누룻다 존자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뒷정리하는 자에 대하여 "그는 자리를 치우고 음료수 단지나 세정수 단지나 배설물통이 텅 빈 것을 보는 자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치웁니다.”(Vin.I.352)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훈련소 때 일이다. 논산훈련소 신병훈련소 때를 말한다. 그때 주임상사는 훈련병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상사는 "먼저 본 사람이 먼저 행하자!"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면서 휴지를 예로 들었다. 길바닥에 휴지나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먼저 본 사람이 줍자는 것이었다. 이 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길가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을 때 줍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도 줍지 않는 사람이 밖에서 줍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줍는 사람은 따로 있을까?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줍는 사람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줍지 않을 것이다. 누가 주어야 할까? 아마 청소부가 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집안이라면 누가 주어야 할까?
솔선수범이라는 말이 있다.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먼저 본 사람이 줍는 것도 솔선수범에 해당될 것이다. 집 안에서이건 집 밖에서이건 먼저 본 사람이 먼저 행할 때 아름답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상사는 이런 점을 칭찬했다. 어느 훈련병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담배피는 사람 중에는 양심불량인 자도 있다. 피다 만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던지는 것이다. 차창 밖으로 던지는 사람도 있다. 누가 치우란 말인가? 거리를 지저분하게 하는 최악의 양심불량자라고 볼 수 있다.
고백하건데 양심불량 행위한 적 많다. 점심을 먹고 요지질 하다 이쑤시게를 거리에 버린 것이다. 하수구가 대상이 된다. 남들 하기에 따라 한 것이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하수가 막힐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거리가 깨끗하면 감히 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거리에 담배 꽁초 하나 휴지 한조각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감히 버릴 수 있을까? 양심이 바른 자는 슬쩍 주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리가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면 슬쩍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쓰레기는 쓰레기를 부르는가 보다.
요즘 도시의 거리는 대체로 청결한 편이다. 어느 도시를 가나 반듯한 모양이다. 건물도 반듯하고 간판도 반듯하다. 차도와 인도는 잘 정비되어 있다. 버스정류장에서는 실시간으로 교통정보를 알려 준다. 사람들 모습도 반듯하다. 옷을 잘 차려 입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도시가 전반적으로 반듯해 보인다. 질서도 잡혀 있고 치안도 큰 문제가 없다. 이런 변화는 삼사십년전과는 크게 차이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식도 반듯해졌을까?
외국에 자주 다녀 보지 않았다. 최초로 외국에 간 때는 1990년이었다. 개발한 제품을 양산해야 하는데 생산하기 위한 장비를 검수할 목적으로 일본에 간 것이다. 가나가와현 작은 도시에 있는 닛츠키라는 장비생산업체였다. 일본통신기라는 회사이다.
일본 작은 소도시를 처음 접했을 때 충격받았다. 이를 신선한 충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반듯했다. 건물도 반듯했고 차도도 반듯했고 인도도 반듯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반듯해 보였다. 그때 퇴근시간 무렵이었는데 샐러리맨들의 옷차림도 반듯했고 표정도 여유 있어 보였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사람을 접하면서 누그러졌다. 일본 군국주의지들이나 극우세력은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보통사람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 나는 것도 있었다. 정류장에서 줄서기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위축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 처음 간 것은 1991년 이었다. 통일되기 전이었다. 트러블슈팅하기 위해서 갔었다. 개발한 셋톱박스를 양산해서 독일로 수출했는데 품질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를 현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파견된 것이다.
처음 본 독일의 인상은 움추려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늘 분주하게 사는 모습만 보다가 안정된 사회를 접하니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것도 신선한 충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없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담배꽁초나 휴지한조각 보이지 않았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분은 무엇일까? 그것은 질서라고 본다. 질서가 잘 잡혀진 사회는 모든 것이 반듯하게 보인다. 우리나라도 그런 단계에 진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동남아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렇다면 의식도 선진화 되었을까?
먼저 본 사람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선진화지표일 것이다. 맞벌이하면 당연히 먼저 온 사람이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에스엔에스에서 본 문구가 새롭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잘하고,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고, 누군가 해야 할 이라면 내가 한다."
2022-01-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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