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식물

해탈의 꽃과 수행자의 과위(果位)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6. 17:48

해탈의 꽃과 수행자의 과위(果位)
 
 
무늬접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꽃이 피었다. 작은 오엽의 흰 꽃이다. 또한 새끼접란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접란은 다년생 화초이다. 난처럼 생겼으나 풀에 가깝다.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 창동에서 분양받은지 사년만의 일이다.
 

 

 

 
 
어떤 일이든지 기록해 둔다. 무뉘접란 분양 가져 온 것도 예외가 아니다. 창동 장모집 일층에 페인트 가게가 있는데 거기에 무뉘접란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화초 줄기 도둑’(2020-09-26)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왜 화초 줄기 도둑인가? 주인에게 허락받지 않고 가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접란의 생장이 폭발해서 수십 개의 새끼접란을 만들어 냈는데 그 중에 일부를 채취해 온 것이다. 주지 않은 것을 끊어 왔으니 도둑질임에 틀림 없다. 이에 대하여 “비록 주지 않은 것을 취해서 가져왔지만 잘 키워 무성해진다면 찾아오는 사람에게 분양하려 한다.” (2020-09-26)라고 써 놓았다.
 

(2020년 9월 창동 페인트가게 접란)
 

 
무뉘접란을 가져 온지 4년 되었다. 이제 그때 당시 페인트 가게 접란만큼 커졌다. 물만 주었을 뿐인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완전한 개체가 된 것 같다. 마치 병아리가 자라서 어엿한 장닭이 된 것 같다.
 
새끼접란은 수경재배 해야 한다. 뿌리를 내린 다음 화분에 옮겨 심어야 한다.
 
새끼접란을 페트병에 수경재배 했다. 수경재배한지 2주가 되자 뿌리가 만족할 만큼 나왔다. 이에 “화분에 옮기고 나니 사무실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다. 위로 쭉쭉 뻗은 잎을 보니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2020-10-09)라고 기록을 남겼다.
 

(2020년 10월 수경재배)

 
 

(2020년 10월 수경한 것 화분에 옮김)

 
 
새끼무뉘접란을 가져온지 4년만에 엄청나게 상장했다. 마침내 꽃이 피었다. 꽃이 피면 절정에 이른 듯하다. 마치 완성에 이른 듯 했다. 여기에 열매까지 맺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식물은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열매를 맺을 것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장의 절정일 것이다. 마치 아이가 성년이 되는 것과 같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자는 도를 닦는다. 그런데 도를 닦으면 결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밀린다팡하 ‘나무특성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이 있다.
 
 
“대왕이여, 나무는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와 수행에 전념하는 자는 해탈의 꽃과 수행자의 과위를 맺어야 합니다.”(Mil.400)
 
 
어느 나무에서나 꽃이 핀다. 그런데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자가 도를 닦으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수행자가 도를 닦는 것은 나무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다. 이는 수행의 절정이다. 이에 대하여 밀린다팡하에서는 해탈의 꽃이라고 했다.
 
해탈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밀린다팡하에서는 ‘수행자의 과위(果位)’ 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의 성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도를 왜 닦을까? 도인이 되기 위해서 닦는 것일까? 만일 도닦는 것이 해탈에서 멈추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행의 결실이 없는 것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도를 닦으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해탈의 꽃을 피워 수행자의 과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반을 실현해야 한다.
 
불교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해야 사쌍팔배의 성자가 된다.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경지를 맛보지 않고서는 성자의 과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해탈의 꽃이 피어 수행자의 과위라는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해마다 봄이 되면 식물에 꽃이 핀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식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수행자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봄이 되면 새는 짝짓기 해서 알을 낳는다. 알이 부화되어서 새끼가 나오면 그 때부터 폭풍성장을 하게 된다. 기한 내에 자라서 하늘을 날아야 한다. 새가 해야 할 일이다.
 
동물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번식하는 것이다.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해서 새끼를 낳는다.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가는 축생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단지 식욕과 번식욕으로 살아간다면 축생과 다름 없을 것이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마치 식물이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고, 축생이 짝짓기 해서 새끼를 낳는 것과 같다.
 
아무나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없다.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야 저 언덕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를 닦아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 커다란 물이 있는데 이 언덕은 위험하고 두렵고 저 언덕은 안온하고 두려움이 없지만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S35.238)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거센 물살이 있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폭류, 존재의 폭류, 견해의 폭류, 무명의 폭류를 말한다. 이런 네 가지 폭류를 가르침의 뗏목, 즉 팔정도의 뗏목으로 건너고자 한다. 두 손과 두 발이라는 정진과 노력으로 건너고자 하는 것이다.
 
도를 닦아 해탈에 이르면 꽃이 피는 것과 같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다. 해탈의 꽃이 피면 성자의 과위라는 열매를 맺는다.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성자가 되는 것이다.
 
무뉘접란을 가져 온지 4년 되었다. 마침내 성장이 절정에 이르렀다. 꽃이 핀 것이다. 더구나 새끼접란도 생겨났다.
 
새끼접란은 분양할 수 있다. 채취해서 수경재배 한 다음 분양하는 것이다.
 
백권당에는 여러 개의 수경재배 접란이 있다. 작은 병에 담구어 두면 뿌리가 나온다. 이를 손님에게 선물할 수 있다. 분양하는 것이다.
 
4년전 코로나가 극성일 때 창동에서 무뉘접란을 가져 왔다. 주지 않은 것을 가져 왔으니 도둑질 한 것이다. 그러나 밖에 있는 것으로 새끼접란이다. 누구나 채취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새끼접란은 엄청나게 자랐다. 마치 성년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새끼접란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년전 약속대로 인연 닿는 사람에게 분양하고자 한다.
 
 
2024-06-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