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최상의 공양, 법주사 팔상전에서
어제 탈진했었다. 직지사에서부터 네 시간 운전하고 난 다음 드러누운 것이다. 힘이 완전 방전된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몸은 복원력이 있는 것 같다. 탈진한지 한두 시간이 되자 서서히 충전되기 시작했다. 홍삼엑기스를 물에 타서 마셔서 그런 것일까? 그런데 몸은 축 늘어졌지만 귀는 멀쩡했다.
탈진된 상태에서 유튜브를 들었다. 정치유튜브를 들은 것이다. 최동석 선생의 유튜브를 들었다. 김대중 이후 지난 이십 년 동안 나라가 정체되고 퇴보한 것은 순전히 미숙한 최고권력자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숙한 리더에 문재인도 다르지 않았다. 개혁하라고 표를 몰아 주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를 바꾸어 보라고 촛불을 들었음에도 눈치만 보다가 시간만 보냈다.
축 늘어진 상태에서 유튜브만 들었다. 주로 소형유튜브 채널이다. 대형스피커 채널에 대항 하는 수많은 유튜브 채널을 들어 보면 누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인지, 누가 공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타산지석이라고 한다. 또한 역지사지라고 한다. 타인의 언행에서, 타인의 행위에서 자신을 되돌아 본다. 이렇게 본다면 타인은 나를 되돌아 보는 거울이 된다. 나는 공익형인간인가?
리더가 비난 받는 것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리더가 공적인 마인드가 없으면 그 모임이나 조직,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 최동석 소장의 유튜브를 보면서 문재인정부의 실정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움직이기 힘들다. 죽을 때가 되면 거의 누워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귀는 살아 있다. 가만 누워 있어도 소리는 다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임종순간에 귀에 대고 선업공덕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몸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몸이 아프면 책도 읽을 수 없고 공부도 할 수 없고 수행도 할 수 없다. 몸이 건강할 때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해야 한다.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여행도 해야 한다.
8월 25일과 26일 이틀간 국내여행을 했다. 충북알프스자연휴양림을 예약함에 따라 일박이일 여행이 된 것이다.
불교인은 산에 가면 절로 간다. 풍광 좋은 산 속에 있는 자연휴양림 주변에는 절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삼천리방방곡곡 명당 자리에는 절이 있다.
일박이일 여행에서 첫날 법주사에 갔다. 법주사는 여러 번 갔었다. 가장 처음에 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 간 것이다.
명산에는 대찰이 있다. 세상에 멀리 떠나 산속 깊은 곳에는 별유천지비인간이 있다. 그곳은 불세계, 부처님의 나라이다.
명산대찰에 가면 부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특히 법당에 앉아 있으면 이곳이 천상처럼 느껴진다.
전국에는 수많은 자연휴양림이 있다. 국립과 공립을 합하여 백군데 가량 될 것이다. 이 많은 곳을 아직 다 가보지 못했다. 인터넷예약에서 당첨되면 가는 것이다.
휴양림 있는 곳에 대찰이 있다. 또한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고색창연한 산사가 있다. 불자라면 당연히 가보아야 할 곳이다.
절에 가면 대웅전으로 향한다. 대웅전이 없으면 주불이 모셔져 있는 전각을 찾아 가면 된다. 극락전이나 미타전 같은 곳이다.
법당에 가면 먼저 삼배를 한다. 단지 불상에 절하면 우상숭배가 된다. 불상 그 자체에 절하면 기복신앙이 된다. 불, 법, 승 삼보에 절해야 한다. 스님에게 삼배 할 때도 스님 그 자체에 절하면 스님을 절대시하게 하게 된다. 스님에게 삼배 올릴 때도 붓다(佛)와 담마(法)와 상가(僧)에 절하는 것이다.
법당은 절에서 가장 명당자리이다. 기가 가장 센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자리에서 삼배만 하고 나온다면 멀리서 달려온 것이 허망한 것이 된다. 단지 오분만이라도 앉아 있어야 한다.
법당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불상과 수미단 등 화려한 단청이다. 천상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귀로는 풍경소리가 들린다. 코로는 향 사르는 냄새가 난다. 육근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법당에 앉아 위빠사나를 하고자 한다. 눈을 감고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한다.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풍대에 따른다. 또한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 정신적 현상이다. 이와 같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새겨야 한다.
법주사에 팔상전이 있다. 수년전 법주사에 순례갔었는데 그때는 공사중이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팔상전은 법주사를 대표하는 전각이다. 처음 들어가 본 팔상전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목재가 수백년된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덟 가지 부처님의 행적에 대한 장면이다.
팔상도를 보면 한국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식 기와지붕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도순례를 다녀 온 사람이 이를 본다면 상당한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팔상도는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덟 가지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팔대성지와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의 여덟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미얀마에서도 볼 수 있고 스리랑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나라 문화에 맞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매우 사실적이다. 이는 아마도 최근에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팔상전에 있는 부처님일대기를 보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설명을 보고서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인지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일반사람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한자문화권 불교에서 문자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군가 그림을 설명해 주었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글로벌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정보는 오픈 되고 공유화 된다. 옛날 한문을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독점된 지식은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더구나 부처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법주사 팔상전에서 보는 부처님일대기는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와지붕으로 묘사된 그림은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것 같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이것이 최상이었다. 이것보다 더 앞선 정보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전통사찰은 골동품 같은 것이 되었다. 단지 볼거리에 지나지 않는 문화재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한시대의 사명을 다했다. 그리고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남아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한국불교는 옛날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시대에 따라 불교도 변화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교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변함 없어야 한다. 다만 잘못 전해진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자신의 스승 스님의 글을 연재하고 있다. 그런 스님의 글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이지 않는다. 스승이 부처님인 것이다. 그런 스님의 스승은 “본래부처”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부처님당시의 불교와 다르다. 한국의 스님이나 선사가 “본래불”이라고 했을 때 이는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팔만사천리 떨어진 것이다.
한국불교를 체험해 보지 않은 자가 한국불교를 비판한다면 구업 짓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테라와다스님도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
오늘날 현명한 불자들은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바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초기경전과 대조해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교묘한 논리로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스님들과 학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또 하나의 불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윤회에 대한 것이다. 일부 스님들과 학자들은 윤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연구한 학자도 이렇게 말하고, 놀랍게도 테라와다 가사를 걸친 한국스님도 이렇게 말한다.
모르면 당하게 되어 있다. 문자를 모르던 시절 사람들은 문자를 아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따랐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가 높아지는 것과 같다.
향봉스님은 무아를 주장하면서 영혼장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세가 없다는 단순한 논리도 펴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공부를 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의 말이라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윤회를 부정한다.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윤회는 믿음의 영역일까?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윤회는 법칙이다. 업과 업의 과보로 보면 내세와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이라고 내치는 것이다.
언젠가 방송에서 어느 스님이 귀신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스님은 “귀신이 있다고 믿으면 귀신이 있고, 귀신이 없다고 믿으면 귀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귀신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사구부정이 있다. 이는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산자야 벨라뿟따의 회의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스님이 귀신에 대하여 “귀신이 있다고 믿으면 귀신이 있고, 귀신이 없다고 믿으면 귀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사구분별로 말하지 않았다. 특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만약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면 윤회에 대해서도 “윤회가 있다고 믿으면 윤회가 있고, 윤회가 없다고 믿으면 윤회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산자야 벨라뿟따의 이론에는 결론이 없다.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책임회피도 된다. 그래서 뱀장어를 잡듯 혼란스러운 이론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윤회에 대하여 믿음의 영역으로 본다면 산자야 벨라뿟따의 회의론을 신봉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귀신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귀신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윤회에 대하여 ‘윤회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윤회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문즉설의 법륜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윤회를 믿음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는 이리저리 빠져 나가는 뱀장어이론과도 같다. 그렇다면 스님은 왜 윤회를 믿음의 영역으로 보는 것일 것? 아마 그것은 스님이 전국구 스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전종교적 스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종교는 물론, 무신론자, 일반국민들까지 포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는 육도윤회를 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테라와다 가사를 두른 스님도 윤회를 부정한다. 어떻게 부정하는가? 이는 붓다빠라 스님이 ‘있다고 믿으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믿으면 단견에 빠진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설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연기설을 말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연기법은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이다. 업과 업보의 법칙에 따르면 내세가 있고 윤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있다고 보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보면 단견에 빠진다.’하고 하여 양도논법으로 압박한다면 이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부류에 이중표 교수도 해당된다.
한국불교의 스님들이나 학자의 말을 들어 보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 많다. 본래불을 말하는 스님은 영원주의를 말하는 것과 같고 윤회를 믿음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스님은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과 같다.
자연휴양림에 가면 명산대찰을 찾는다. 산사에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명산대찰에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많다. 산신각 등 민속신앙을 포괄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진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 가장 심각하다.
아기는 포대기에 있다. 그런데 포대기에 아기가 없다면 어떠한 마음이 들까? 한국불교가 그런 것 같다. 불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가 없는 것이다. 마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과 같다.
시대가 바뀌었다. 누구나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산사에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법당에 앉아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기도한다.
불교인이라면 기도 보다는 불공을 드려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바라는 기도도 좋지만 내면의 공양을 올려야 한다. 그것은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의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휴양림에 가면 산사를 찾는다. 휴양림에서 하루를 쉬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명산대찰을 찾아서 공양 올리는 것이 더 수승한 것이다. 물질적 공양보다도 정신적 공양을 올려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최대의 공양이다.
2024-08-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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