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왜 종교일까, Religion과 다른 종교의 의미는
불교는 종교일까. 이교도들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불교는 철학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불교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한다. 구원이 있는 기독교야 말로 진정한 종교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무식’을 폭로 하는
19세기의 서세동점의 시대에 서양의 문물들이 물밀 듯이 동양으로 들어 왔다. 그 중에 학문도 있었다. 서양의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가 일본 이었는데 그들은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자 용어부터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말이 ‘철학’이나 ‘사회’ 같은 용어이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에서 사용 되는 새로운 용어의 99%는 일본인 들이 근대화 시기에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런 용어 중에 ‘종교’도 있다. 종교라는 말은 원래 있었던 말인데 이를 확대 적용 시킨 것 또한 일본인이라 한다. 즉, 기독교의 Religion을 종교로 사용 한 것이 바로 그 예라 볼 수 있다.
Religion은 기독교 용어이다. 이 말은 오로지 기독교에서만 사용 되고 타종교에서 사용 되지 않는 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Religion이 종교로 불려 지다 보니, 종교는 반드시 ‘신을 섬겨야’ 종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불교도 종교인가?” 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불교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식을 폭로’ 하는 것과 같다. Religion과 종교에 대하여 모르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신학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Religion은 ‘결합’을 의미 한다. 신약 같은 경우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하여 신과 인간의 새로운 계약을 의미 한다. 이렇게 신과 인간의 계약에 따른 새로운 약속은 오로지 기독교에 만 존재 한다. 이런 계약 관계를 탐구 하는 학문이 신학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 되면서 이런 양상에 변화가 일어 났다.
영국 같은 경우 인도를 정복 하면서 기독교와 다른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힌두교의 경우 신을 믿긴 믿되 자신들이 믿는 신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즉 신과 인간의 계약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불교나 자이나교의 경우 창조주 같은 신을 전혀 인정 하지 않고 그들이 믿는 기독교와 같은 형태를 유지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제국주의자들의 신학에서 Religion을 달리 해석 하게 되었다. 즉, 신과 인간의 계약관계가 아니더라도 ‘교주’와 ‘교리’와 ‘교단’이 있으면 Religion으로 인정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기독교만을 연구 하는 유럽의 신학이 아시아를 지배 하면서 ‘종교학’으로 발전 하게 된 것이다.
불교가 왜 종교일까
Religion이 기독교의 전문용어인 것에 반하여 ‘종교는 불교의 전문 용어’이다. 이미 능가경 등에 종교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가 왜 종교일까. 그 것은 종교라는 낱말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에서 종자는 ‘마루 종(宗)’자이다. 이 말은 ‘으뜸’ 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싯단타(Siddhanta)’라 한다. 또 종교의 교(敎)자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이의 산스크리트어는 데사나(Desana)이다. 그래서 ‘가장 의뜸 되는 가르침’이 종교인 것이다. 바로 그 종교가 불교라는 것이다.
종 |
宗 |
Siddhanta(싯단타) |
으뜸 |
교 |
敎 |
Desana(데사나) |
가르침 |
이 종교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종은 ‘승의(勝義)’라 하고, 교는 ‘언설(言設)’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이 승의와 언설을 설명하려면 부처님의 ‘깨달은 사건’을 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기독교의 십자가 사건과도 같이 불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일주일간 고민 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깨달은 사건을 누가 이해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깨달음을 말로 설명 하기가 곤란 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수승하고 가장 궁극적인 경지의 깨달음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도 생각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진리를 말로 설명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일주일간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그래도 말로 설명해 보자”는 것이었다. 잘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설법 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것이 이른바 대기설법이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8만4천 법문이 모두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서 설명한 대기설법이라 볼 수 있다.
중도(中道)사상이란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깨달은 내용은 궁극적인 진리이다. 언어로서 설명이 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 으뜸이 되는 진리가 산스크리트어로 파라마르타(paramartha)라 하고 중국어로 번역 하였을 때 승의(勝義)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궁극적인 진리를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말로 설한 것을 산스크리트어로 브야바하라(vyavahara)라 하고 한자어로 언설(言設)이라고 한다.
이들 승의나 언설 모두 ‘진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궁극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진리’를 승의제(勝義諦)라 말하고, ‘언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진리’를 언설제(言設諦)라 한다.
이 승의제와 언설제를 다른 말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깨달음만 진리가 아니라, 중생의 근기에 따라 말로 설명 되는 법문도 진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는 두가지 진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유일신교와 같이 진리는 오로지 하나라고 절대화 하지 않는다. 진리를 절대화 하지 않고 상대화 시켯을 때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사상이 부처님이 강조한 중도(中道)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상구보리 하화중생해야 하나
진제는 말을 떠난 진리이기 때문에 ‘이언(離言)’이라 볼 수 있고, 속제는 말에 의지 하기 때문에 ‘의언(依言)’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진제와 속제는 ‘지혜’와 ‘자비’로 구현 된다는 것이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국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귀결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표로 정리 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불교
|
종(宗) |
으뜸 |
승의 (勝義) |
말 할 수 없는 것 (離言) |
진제 (眞諦) |
지혜 |
상구 보리 |
교(敎) |
가르침 |
언설 (言設) |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依言) |
속제 (俗諦) |
자비 |
하화 중생 |
이와 같이 불교는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고 결과적으로 지혜와 자비를 추구 하는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실천 방법은 위로는 진리를 탐구 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 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이와 같은 모든 과정이 종교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인 것이다.
종교는 Religion과 다르다
종교는 Religion과 다르다. Religion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 한다면, 종교에서의 긴장은 ‘진리와 언어’ 사이의 긴장이다. 즉, 말할 수 없는 진리를 얼마나 어떻게 언어로 표현 할 것인가에 대한 긴장이다. 따라서 불교가 얼마나 철학적인가를 또한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를 가장 심오한 철학이라고도 한다.
불교tv의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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