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은 현자들만이, 한국불교의 역사는 아비담마 이전과 이후로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27. 10:40

 

법은 현자들만이, 한국불교의 역사는 아비담마 이전과 이후로

 

 

 

 

 

 

 

 

불교교양대학에서

 

재가불자들이 불교를 체계적으로 접 할 수 있는 곳은 불교교양대학이다. 그러나 교양대학도 나름이다. 장기로 교육시키는 곳이 있는가 하면 4개월 정도 교육시켜 수계를 하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불교의 맛만 보았다고 할 것이다. 사찰 예절이라든가 이러 저러 한 기도가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사찰에서 실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입학생을 조직화 하여 계속 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계획의 일환으로서 경전반을 들 수 있다. 보통 1년 과정이다. 과목은 대부분 금강경육조단경이다. 그 1년이 지나면 고급 과정이 있다. 보통 불교대학원이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한다면 불교 교양대학원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배우는 과목은 비교종교학, 불교사, 초기불교등인데 유명스님이나 교수등 외부 강사를 초빙 하여 강의 하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은 2년인데 일주일 한번 수업이 있다. 아는 법우 중에 이 과정을  2년간 다녔는데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의문을 풀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불자라면 이 정도 경전은

 

불교교양대학에서 금강경까지 들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였다. 그 것은 다름 아닌 대승경전 읽기이다. 여러 대승경전 중에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법화경화엄경을 선정 하였다. 불자라면 이 정도 경전은 읽어야 되지 않았나 싶어서이다.

 

이들 경전을 구입하여 읽어 나갔다. 한자어 번역투성이인 경전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몹시 어려웠다. 용어자체가 생소 할 뿐만 아니라 시대와 너무 동떨어진 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읽다 말다를 반복 하다 수개월에 걸쳐서 한번씩 보게 되었다. 또 해당 경전에 대한 해설서를 빌려서 몇 권 읽었다. 이렇게 억지로 보게 된 경전이 그다지 마음에 남을 리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승경전에 대한 이론서를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대승경전에 대한 이론서는 무어니 해도 대승기신론이다. 이 책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고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유명한 를 남긴 대승불교의 진수라고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책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문제 이었다. 인터넷에서 지운스님의 강의도 들어 보았으나 결국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경(寫經)’ 하기로 하였다.

 

200자원고지에 만년필로

 

금강경을 공부 할 때 사경을 몇 차례 하였다. 어려운 한문을 한글자 한글자 사경한 다음에 해설서를 읽으면 더 뜻이 다가옴을 느꼈다. 그리고 5,249자를 통째로 외웠다. 다시 그런 기분을 맛 보기 위하여 대승기신론도 사경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사경 하기에 너무 방대하여 포기 하였지만 대승기신론은 사경을 하기에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았다. 금강경 보다 좀 더 많아 보였지만 사경 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200자원고지에 만년필로 사경 하면서 참고 한 책은 서광스님지은 현대심리학으로 본 대승기신론이다. 그 책은 한자어 원문에 대한 직역이 있고, 또 그 직역에 대한 해석이 있어서 이중 번역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두 번 사경을 하였다. 두 번 사경을 하였지만 일심사상(一心思想)’이 와 닿지 않았다. 매우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일심에서 이문(二門)이 나오는데 하나는 심진여문이고 또 하나는 심생멸문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바로 그런 사상을 여래장사상이라는 것이었다.

 

대승기신론에서 한가지 특이 하였던 것은 마지막 품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을 모두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 과정에 있어서 여러 장애가 나타나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극복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단락은 앞서 나타난 일심의 여래장 사상과 매우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고, 나중에 공부한 아비담마의 칠정정과 16단계의 지혜이론과 매우 흡사함을 느꼈다.

 

한 마음을 도저히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대승기신론등으로 이어진 대승경전을 보았지만 무언가 허전 하였다. 보긴 보았지만 채워지지 않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이들 경전들이 여래장계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일심이나, 일여, 진여, 진아, 참나, 본마음등 하나의 마음을 향하여 가는 한 마음 즉, ‘일심사상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결코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 또한 그 한마음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참선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보통 그런 수행법을 사마타라 한다. 대상과 일치 하려는 수행을 말한다. 그래서 열심히 ‘108도 하고 관음정근도 따라 하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을 채울 수 없었다. 그 것은 한마음을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한마음이라는 것이 자꾸 유일신교의 그것과 클로즈업 되었기 때문이다. 또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그 한마음 대신에 유일신교의 그것과 대체 하여 놓아도 분간을 못할 정도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 마음에 대한 거부감은 이미 오래 전 고교시절 미션스쿨에서의 유일신 강요와 같은 그 다지 좋지 않은 기억에서 유래 한다. 따라서 생리적으로 한 마음 운운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방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어느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하였던 4성제나 8정도, 37조도품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듣기에도 생소한 위빠사나에 대하여 소개 하였다.

 

위빠사나는 대상과 일치 하려는 사마타와 달리 대상과 분리 하여 보는 수행이라 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 한 편에서는 대상과 일치 하려 하고, 또 한편에서는 놓아 버리는 수행인 것이다. 더구나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최초로 발견한 수행 방법이고, 또 그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셨다고 하니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도 한마음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거저가르쳐 주는

 

어떻게 인연이 되어서 초기불교와 접하게 되었다. 매일 인터넷공간을 들락날락 하지만 바로 옆에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하여 수행처를 찾아 갔다. 미얀마에서 수년간 수행하고 온 재가법사가 지도 하고 있었다.

 

그 법사님은 돈에 대하여 일체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한번 들어 보고 나서등록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년 가까이 되는 교육 기간 중에 단 한차례도 회비에 대하여 단 한 마디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철저 하게 자율 보시를 하는 것이다.

 

교육 기간중에 회비를 보니 한달에 5만원 꼴이었다. 그러나 수행처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따진다면 시간당 3,500원 꼴이다. 이런 정도 비용이라면 시간당 최소임금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거의 거저가르쳐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 것도 하루에 법문 1시간 반, 경행 30, 좌선 1시간, 인터뷰 30분 합하여 3시간 반을 보내는데 한달로 계산 하면 14시간이나 된다. 더구나 법문 내용 자체가 부처님의 생생한 말씀이 담긴 니까야를 기본으로 하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의 이론이 깃들인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의 법문은 이제 까지 접해 보지 못한 격조 높은 이야기 들이었다. 그리고 일관성이 있었다.

 

남방에서 공부 하고 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 결 같이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불교가 아니라 누구 한 테 들어도 그 내용은 동일 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법문을 듣고 나자 금강경에서 왜 무주상 보시나 무아상을 이야기 하는 지 이론 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닙바나를 추구 해야 되는지, 불교의 지혜와 자비를 어떻게 회향 하는지에 대한 내용들이다.

 

법을 설하는 그 순간이

 

어떤 이는 말하기를 테라와다를 소승이라 말하고, 아비담마를 번쇄 하고 난삽한 이론으로 쓸모 없는 것이라 폄하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그 깨달음을 혼자 누리다 열반에 들었다면 전형적인 소승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아니 소승 보다 못한 일승이라 불러야 마땅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범천의 세번에 걸친 간청과 깨달은 법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설한 다면 누군가 알아 들을 수 있을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법을 설하기로 결정 하였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을 대승으로 본다고 어떤 이는 말하였다.

 

따라서 소승이니 대승이니 편가르기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설하면 그 순간이 대승이고, 자신이 깨달은 법을 자신 혼자만 즐긴다면 바로 그 것이 소승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으로 본다면 비록 작은 깨달음이라도 함께 한다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공유 하는 것도 대승의 발로라 볼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글을 쓰는 행위나, 자료를 공유 하는 것도 이에 해당 될 것이다.

 

100% 부처님의 말씀

 

아비담마는 테라와다 불교의 모든 것이라 한다. 위빠사나의 완벽한 이론서라고 한다. 왜 이런 칭호를 붙이게 되었을까. 그런 최고의 찬사를 붙이게 된 이유는 그 만한 값어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비담마는 법에 대하여라는 말이다. 빠알리어 담마(dhamma)()’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위로, ~에 대하여, 넘어서라는 의미의 접두어 abhi가 첨가 되어 만들어진 단어 이다. 또 중국에서 현장스님은 대법(對法)이라고 번역 하였다. 이 또한 풀이 하면 법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용어의 풀이와 같이 아비담마는 직설적이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이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한 초기경전과 다른 것이다. 보통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 하는 방식을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aya-desana)’이라 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법이라 한다. 그런데 그런 법을 말로 설명 하다 보니 8 4천 법문이 되었다고 한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대기설법 하다 보니 그렇게 많아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주제는 항상 무아와 연기이다. 서로 들어 가는 문은 달라도 나오는 문은 항상 같다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해 놓은 것이 아비담마이다 . 따라서 아비담마는 ‘100%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아비담마는 중생의 근기를 고려 함이 없이 법에 대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렵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법에 대하여 현자들만이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법은 현자만이

 

그런 현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숫따니빠아따(Sutta-nipāta)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발견 하였다.

 

 

난다가 물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현자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현자로 보는지요.

지식이 해박한 사람을 현자라 합니까.

아니면 간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일러

현자라 합니까.(1077)

 

스승;

난다여.진리에 도달한 이들은 이렇게 말했느니

"철학적 견해에 의해서

또는 학문이나 지식에 의해서는

결코 현자가 될 수 없는 법.

욕망의 군대를 격파했으므로

이제 더 이상 고뇌도 없고 헛된 바람도 없이

오직 그 자신의 길만을 묵묵히 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자인 것이다."(1078)

 

 

여기서 스승은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하는 현자는 누구를 말할까. 보통 위빠사나와 도()와 과()와 관련된 통찰지(, 빤냐, panna)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그런 통찰지는 세계적인 철학자, 종교의 창시자, 유명한 작가나 과학자가 지닌 세속적인 지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성별, 나이, 교육에 상관없이 위빠사나 통찰을 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성스로운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법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장님 꼬끼리 만지기 식으로

 

현자가 아닌 범부들은 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장님 꼬끼리 만지기 식으로 한마디씩 하는 것이다.

 

아비담마는 번쇄 하고 난삽하다든가, 쓸모 없는 이론으로 치심만 더욱 더 증장 시킨다든가 하는 말들이다. 또 사념처 수행법만 배우면 되지 그 어려운 법을 배워서 어디에 써 먹어야 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도 말한다.

 

이 모두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경우라 볼 수 있고, 또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그런 것 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비담마야 말로 철저 하게 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처님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는 것 까지 법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기쁨과 함께 미소 짓는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은 89가지 마음(선정을 포함 하면 121가지) 중에 하나로 들어 간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도 놓치고 있고 있다는 것이다. 또 경전에 없는 이야기는 결코 써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전에 나와 있는 8 4천 가지나 되는 방대한 대기설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론화 시킨 것이 아비담마 라는 것이다.

 

마치 참고서 같은

 

아비담마를 보면 모든 궁금한 사항이 풀린다. 흔히 불자들이 말하는 마음이라든가, 업과 업보, 연기법, 윤회, 생과 사, 수행방법, 열반에 이르는 길 등 모든 의문점에 대하여 총 망라 되어 있는 종합 참고서와 같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전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국어, 산수, 자연등 여러 과목을 배운다. 그런데 이런 과목을 한권으로 모아 놓은 책이 전과(全科)’이다.

 

그 전과를 들여다 보면 상세한 해설이 특징이다. 그 해설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한 것이다. 이렇게 한 권으로 된 전과는 교과서를 공부 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공부 하는 방향을 잡아 주기도 한다. 이런 참고서는 학년이 올라가도 예외 없이 나온다.

 

고교 시절에 배우는 영어, 수학등 대표적인 참고서가 또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이렇게 아비담마는 종합참고서이자 개론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비담마는 언제부터

 

그런 아비담마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아마도 부처님 당시부터 체계화 내지 이론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부처님이 45년간 설법한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지 체계적으로 정리 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지혜제일 사리뿟따 존자가 이런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본다. 부처님의 법을 체계화 한 역할을 맡았던 사리뿟따 존자를 법의 사령관(法將, 담마세나빠띠, Dhammasenapati)’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빠알리 경전은 니까야 하나만 있을까. 니까야 만 경전이고 나머지는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보통 불교 경전은 경, , 론 삼장을 가리킨다. , 경은 부처님의 말씀, 논은 부처님 이후의 재자들이 경과 율에 대한 주석등을 말하고, 율은 계율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 세가지를 합쳐서 흔히 경이라고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띠삐따까(Tipitaka)라 하고 보통 빠알리 삼장이라고 말한다.

 

빠알리  삼장은 처음부터 갖추어 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부처님 입멸후 제1차 결집에서 500명의 비구가 7개월간 합송 하면서 이 승인 되었고, 그 후 150년이 지난  3차 결집(기원전 247)에서 빠알리 삼장이 완성 되었기 때문이다.

 

미적분과도 같은

 

아비담마를 몰라도 수행을 할 수 있다. 들숨 날숨을 챙긴다거나 사념처 수행을 통하여도 얼마든지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행이 이론적인 밑 바탕이 없다면 단지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자신이 배운 기법만 정통이라고 우기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위빠사나라는 수행을 통하여 팔정도라는 큰 길로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아비담마를 위빠사나의 길잡이라 하고 테라와다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미적분을 배운다. 그런데 미적분은 수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외에는 사회에서 써 먹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적분을 공부 하지 않는 다면 결코 교과과정을 마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단계로 나아 갈 수 없다. 아비담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무식을 폭로 하는

 

들숨 날숨 호흡만 보아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세상의 이치 즉, 연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알고 수행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비담마를 알게 되면  불교의 목표인 닙바나를 더 빨리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비담마는 8 4천가지나 되는 대기법문을 한 목에 요약한 지도책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수행 한 사람들도 별도의 아비담마 공부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비담마가 번쇄 하고 난삽하여 쓸모 없는 이론 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 하는것과 같다. 그 것은 마치 더하기와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알면 세상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지장이 없는데, 굳이 어려운 미적분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 까 하고 회의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아비담마 이전과 이후로

 

초기불교가 알려 지기 시작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통 초기 불교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기를 보통 1980년대 말로 잡는다. 지금 시점에서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불자들의 관심은 매우 높다. 왜 그럴까 .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의 방법으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한계를 극복 할 수 있는 방법을 초기불교에서 발견 한 것이다. 특히 교리나 수행방법 등 에서이다.

 

처음 접한 교리나 수행법은 충격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관념을 모조리 뒤집어 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감한 발상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 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기 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남방국가로 몰려가서 수행법과 교리를 배워온 역할이 무척 크다. 특히 빠알리 삼장의 번역에서 특히 그렇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역경자로서 각묵스님을 들고 있다.

 

그래서 어떤 네티즌은 말하기를 한국 불교의 역사는 각묵 이전과 이후로나누어 질 것이라고 말 하였다. 그러나 이를 역경서 기준으로 본다면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역사는 아비담마 이전과 이후로나누어 질 것이다.”

 

 

 

 

 

2009-1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