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 번역어 논쟁을 보고, 조만간 마나시까라와 쩨따시까도
한국불교에서 있어서 초기불교의 관심은 어느 정도 일까.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그 것이 있는 줄 조차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는 것을 느낀다. 키워드 검색을 하다 보면 도처에서 그런 현상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블로그와 카페, 이어서 지식, 웹문서, 게시판, 뉴스, 이미지, 책, 등으로 ‘스크롤다운’ 하다 보면 수 많은 검색결과와 마주친다.
도표와 함께
그런 초기불교의 용어 중에 ‘사띠’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교계신문을 대표 한다는 법보신문에 사띠의 용어에 대한 해석의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발단은 인경스님이 ‘마음챙김은 정체불명의 수행법’이라는 도발적 기사로부터 시작 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최근에 올린 인경스님의 글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4488&Hcate1=4&Hcate2=28&Hcmode=view)에는 사띠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여러 용어에 대한 정의도 도표와 함께 보여 주었다.
무슨 내용이든지 도표가 들어가면 한 눈에 이해 하기 쉽다. 그 도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지와 행동선택의 과정
변하는 대상 |
인지-명상 |
행동선택 |
몸(身) |
알아차림(念, sati)à 분명한 앎(知, sampajañña)à 통찰(觀, vipassana) |
à소유방식의 챙김(세간) à존재방식의 내려놓음(출세간) |
느낌(受) | ||
마음(心) | ||
현상(法) |
사실 그 동안 사띠나 삼빠잔나, 위빠사나라는 용어를 접할 때 마다 그 용어가 그 용어 같아서 혼란 스러웠다. 그 중에 사띠와 삼빠잔나의 관계가 특히 그러하였다.
그런데 표로 정리된 것을 보니 확연히 들어 온 느낌이다.
이미 게임이 끝난
사띠의 번역어가 ‘마음챙김’이냐 ‘알아차림’이냐라는 논쟁이 지면상에서 치열한 듯 보이지만, 수행처에서 보는 관점에서 이미 ‘게임이 끝난’ 상태이다.
수행처에서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쓰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법문이든, 경행이든, 좌선이든 알아차리라는 말 뿐이다.
그야말로 알아차림으로 시작 해서 알아차림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한차례도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쓴 경우를 보이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알아차림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면담시간이라 불리우는 인터뷰시간에도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 나는 일들에 관한 문제들이다. 그러고 보면 수행처에서 지도법사의 역할은 수행지도 뿐만이 아니라 인생상담도 잘 해 주어야 한다는 느낌도 든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 시부모와 긴장, 직장에서 상사와의 관계등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갈등과 긴장에 대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피튀기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을까. 지금 상태가 행복 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굳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벅찬 경우는 종교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의지처를 찾는 것이다.
그 대상이 신이 될 수도 있고, 말씀이 될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성스런 승가공동체에 의지 하라고 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피난도 된다. 그래서 귀의 한다는 말이 영어로 refuge인데 ‘피난처’라는 말로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법승 삼보에 피난온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벌어지는 ‘전쟁과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다.
마음이 어떻고 마음의 작용이 어떻거나, 생멸의 지혜나 무너짐의 지혜등 교과서적인 이야기 보다 문제를 어떻게 수습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절실하다. 그런데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알아차림’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아차리라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에게 어려운 용어는 통하지 않는다. ‘마음챙김’ 같은 용어를 사용 한다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말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쉬운 말로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도록 실례를 들어 설명 해야 한다. 그런 방법 중에 하나가 ‘가슴으로 와라’라는 말이 있다.
가슴의 ‘콩닥거림’을
싸우거나, 갈등 또는 긴장 관계에 있다 보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미는데 그 때 가슴으로 와서 가슴의 ‘콩닥거림’을 보라고 한다.
이 말뜻은 일시적으로 관심을 분산 시키자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마음은 오로지 한 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한다’라는 대 전제가 깔려 있다.
화가 났을 때 누구나 가슴이 두근 거리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때 재빠르게 가슴의 콩닥거림을 보자는 것이다. 그 콩닥거림을 느낀 다면 ‘내가 화가 나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화가 났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래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오직 본능적인 반응을 보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커다란 실수를 할 수 있다. 그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순간을 알아 차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그 순간을 모면 해야 한다. 그 분노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이 ‘관심을 다른데’ 두는 것이다. 그래서 가슴으로 오자는 것이다.
그러면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 있고 그 때서야 ‘내가 화가 났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사띠’라고 보통 말 한다.
분명하게 안다는 것
사띠가 현재의 순간에 대한 개별적 대상,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을 의미한다면 삼빠잔나는 ‘분명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분명한 앎’이라고 번역 한다.
따라서 삼빠잔나를 단순하게 ‘알아차림’이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분명하게 안다는가.
어떤 이는 삼빠잔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밥먹을 때도 밥먹는 것을 알고, 화장실에 갈 때도 화장실을 알고’ 하는 식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법보신문에서 인경스님은 이를 삶의 넓은 영역에 걸쳐서 ‘보편적인 특성을 전체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다. 그 가장 좋은 예로서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용어의 ‘어근’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경스님은 삼빠잔나의 어근 풀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빠잔나(sampajañña)의 경우에 접두어 ‘sam’은 ‘바른’ 혹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pajañña’는 지혜[智]를 의미하는 pañña와 성스런 앎[知]을 뜻하는 ñāna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용어로 ‘이해’, ‘앎’, ‘지혜’ 등으로 번역한다. 곧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이런 삼빠잔나에 대하여 한자어로 표시한다면 ‘정념정지(正念正知)’라고도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림, 분명한 지혜라고 옮기기도 한다.
꽤뚫어 안다는 것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듣는 ‘위빠사나’이다. 보통 ‘분리하여 지켜본다’등으로 알고 있으나 이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말하기를 ‘대상이 본래 존재 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소유방식을 내려 놓는 것’으로 정의 하였다. 즉, ‘출세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빠사나는 결국 ‘통찰지’를 말하는 것인데 그 통찰지란 무엇일까.
지혜를 나타내는 술어 중에 여러가지가 있지만 통찰지는 대상을 단지 피상적으로 분별(윈냐나, 識)해서 알거나, 뭉뚱그려 아는 것(산냐. 想)을 ‘넘어서’ 아는 것을 말한다. 꽃을 예로 들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꽃들이 있구나(산자나띠)라거나 백합, 라일락이 있구나(위자나띠)라고 대상을 그냥 인식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대상을 변하는 것으로(無常, anicca) 알고, 그러기에 필경에는 고(苦, dukkha)일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알며, 그러기에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無我, anatta) 아는 것을 빤냐라 한다.
이와 같이 빤냐는 ‘대상을 넘어서 아는’ 통찰지인 것이다.
인경스님이 말한 사띠와 삼빠잔나, 위빠사를 정리 하면, 사띠가 현재의 순간에 대한 개별적 대상,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을 의미하고, 삼빠잔나는 넓은 영역에 걸쳐서 보편적인 특성을 전체적으로 아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대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를 ‘꽤뚫어’ 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멋진 번역은
최근 니까야 논쟁이어 이번 사띠 논쟁에 이르기 까지 불자들의 관심은 뜨겁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만큼 초기불교가 불자들 곁으로 바싹 다가 왔다는 것이다. 그 것도 생소하고 듣고 보지도 못하였던 빠알리어 용어에 대해서 이다.
사띠, 삼빠잔나, 위빠사나, 담마, 닙바나등 수 많은 빠알리 용어들이 등장 하고 많이 사용 됨에 따라 점점 친숙한 용어로 정착 되어 감을 또한 느낄 수 있다.
이들 용어가 별 부담 없이 수용 되는 이유는 영어의 영향도 크다. 빠알리와 산스크리트어를 보면 영어와 어근이 일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영어가 우리생활에 익숙한 생활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빠알리어를 이해 하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 하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삼빠잔나를 ‘확실한 앎’으로, 웨다나를 ‘느낌’으로 하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 하는 과정에서 한자어를 쓸 수 밖에 없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산냐를 ‘인식’으로, 나마를 ‘정신’으로, 쩨따시카를 ‘마음부수’로 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부수에 나오는 삿다라나(sadharana)를 북방불교에서와 같이 ‘변행심소(遍行心所)’라고 부르면 어려워져 보인다. 그 경우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는 ‘반드시들’로 번역 하였다. 알아듣기 쉽고 이해 하기 쉬운 ‘멋진’ 번역어라 생각 한다.
수마나님의 지적을 보면
그러나 그런 열의가 너무 지나치게 되면 ‘현실과 동떨어진’ 역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함’일 것이다.
빠알리어 마나시까라(manasikara)를 우리말화 하는 데 있어서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보면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나와 있다.
그런 현상에 대하여 이미 블로그에 지적 (http://blog.daum.net/bolee591/16154313)한 바 있다. 수행처에서는 마음의 잡도리함 보다는 ‘주의 기울임’이라는 말을 사용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번역의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한 사람이 또 있다. 스리랑카에서 공부 하고 있는 수마나님이다. 수마나님은 ‘상좌불교 용어 마나시까라 살펴보기’라는 글(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수행에 대한 글 폴더, 1297번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 하였다.
먼저 우리말로도 이 '마음에 잡도리함'이란 말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정립하기 어려울 뿐더러 또 다시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들이게 됩니다.
결국 여러 사전을 찾아본 결과 이 용어의 우리말 개념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다’라는 용어로 사용 된 듯 합니다. 그리고 한역을 참고한 다른 번역서에서는 ‘작의(作意)’로 나와 있습니다.
작의라....? 뜻을 만든다? 한역투의 용어도 역시 이해가 어려운건 마찬가지 입니다. 옛날의 한역은 수천년의 시차를 둔 지금 중국에서 쓰이는 백화체 중국어와도 차이가 있을 뿐더러 한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글세대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영어권에서 나온 불교사전과 용어집을 찾아보니 아주 간단명료하게 paying attention, 또는 그냥 attention이라 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미에서 통용되는 이 정의를 참고한다면 마나시까라를 가장 잘 풀이한 우리 말은 ‘주의 기울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마나님의 지적을 보면 '마음에 잡도리함'에 대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중으로 사전을 들쳐보는 수고를 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간다하게 '주의기울임'정도로 번역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마나시까라와 쩨따시카도
빠알리어 경전의 번역의 역사가 짧다 보니 발생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라 여겨 진다. 그렇다고 해서 구태의연한 한자투의 용어를 사용 한다면 불교를 더욱 더 어렵게 만들고 대중들과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이미 죽은 언어인 한자투의 용어에 대한 폐해는 매우 심각 하다. 한자용어에 대한 극복은 한국불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널리 통용 되지도 않는 ‘생뚱맞은’ 한글번역도 지양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PTS(Pali Text Society)의 영역본을 해석 하여 도입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이유는 구미권의 빠알리와 테라와다에 대한 연구가 이미 100년이 앞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고, 영어가 이미 우리의 생활어로 정착 되었기 때문이다.
인경스님이 제기한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에 이어 마나시까라(마음에 잡도리함 vs 주의 기울임)에 대한 논쟁도 언젠가 제기 될 것이다. 이어서 쩨따시카(마음부수 vs 마음의 작용)도 제기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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