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일체중생을 어머니같이, 청전스님의 보리심과 김성철교수의 체계불학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 4. 14:11

 

일체중생을 어머니같이, 청전스님의 보리심과 김성철교수의 체계불학

 

 

 

 

 

 

 

얼마나 만나나

 

살아 가면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날까. 어떤 이는 1,000명 이내라고 말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1,000명 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속에는 원해서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도와 관습에 의하여 만날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학교나 군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 될 것이다.

 

그 외에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만날까. 전통적으로 책을 통하여 만난다.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원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원하든 원치 않든 또 만날 수 밖에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방송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유명배우나 가수, 탤런트, 유명정치인등을 알게 된다. 비록 단 한마디도 해 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다.

 

책을 통하여

 

책을 통하여 알게 된 분 중의 하나가 청전스님이다. 청전스님이 지은 책을 통해서이다. 달람살라에서 공부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사항에 대하여 쓴 구도서적 달라이라마와 함께 지낸 20이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카알라스 순례기이다.

 

카알라스까지 도보로 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숙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민가에서 잘 경우는 티벳인들이 린포체에 대한 지극한 예를 갖추어 존중해 주는 것을 느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서 약품과 달라이라마의 사진을 건네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느낀 것은 티벳의 자연환경이다. 나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메마르고 척박한 대지에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리고 흰 구름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장면등이다.

 

그런 청전스님을 동영상으로 만나게 되었다. 불교tv의 법회(http://www.btn.co.kr/preach/preach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MT_01&PID=P485&DPID=56065)를 통해서이다.

 

법문을 참 잘하는

 

동영상으로 본 청전스님의 모습은 책에서 본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은 뿔테 안경에 지적이고 샤프한 용모는 전형적인 학자스타일이다. 그래서 일까 20년 째 공부를 하고 있고, 티벳불교 수행의 결정판인 람림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한 것이다.

 

두번에 걸친 동영상법회를 보면서 느낀점은 법문을 참 잘 한다는 느낌이었다. 말을 청산유수로 잘해서가 아니라 매우 진지하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빨려 들어 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금방 지나감을 느낀다.

 

또 개인적인 신변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 하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 중에 보리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발보리심과 행보리심 모두 스님이 강조한 사항이다. 아마도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略論)에 나오는 이야기일 것이다.

 

보리도차제론은

 

그렇다면 티벳불교의 수행에 대한 결정판이라 불리우는 보리도차제론은 어떤 내용일까.

 

티벳어로 간단히 람림 (Lam rim)이라고 하는 보리도차제론은 문자 그대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하사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사도, 상사도를 거쳐서 단계적으로 깨달음을 실현 한다는 것이다.

 

그 단계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김성철 교수의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을 참고 하였다.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略論, Byang chub lam gyi rim pa)

 

    

     

하사도

(下士道)

 

삼악도를

벗어나

내생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길

 

① 죽음과 무상에

대한 사유

명예욕과 재물욕에서 벗어나 진정한 종교심이 발생함

② 삼악도와 천상의

고통에 대한 사유

 

인간의 소중함을 자각

三惡道의 고통: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의 고통에 대한 상세한 설명

天上의 고통: 恐怖苦, 死苦 등.

③ 삼보에의 귀의

 

④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

 

중사도

(中士道)

 

번뇌를 끊고

삼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고자 하는

출리심(出離心)

의 성취

① 사성제 중

고성제에 대한 사유

 

출리심을 강화한다.

생노병사의 사고와 팔고에 대한 생각을 체화한다.

② 사성제 중

집성제에

대한 사유

고의 원인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삼독심을 끊을 것을 다짐한다.

③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대한 사유

윤회의 과정과 해탈의 이치에 대해 이해한다

상사도

(上士道)

 

대보리심을

발하여

불과(佛果)

위해 보살행을

닦는 길

 

① 보리심을 발생시킨다

 

七種因果: 知母→念恩→報恩→慈心→悲心→强化→大菩提心

自他相換法: 나와 남을 바꾸어 봄으로써 자비심을 훈련함

② 보살행의 실천

 

육바라밀: 자신의 불법을 성숙시킴

사섭법: 다른 중생을 攝受함

③사마타

(śamatha,)

수행

 

정심: 부정관, 자비관, 연기관, 계분별관, 수식관

觀佛修行: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수행

④위빠사나

(vipaśyanā, )

수행

 

아공과 법공에 대한 자각(淸淨見)을 지향.

사마타가 성취된 輕安의 상태에서 중론에 대해 귀류논증파적으로 이해함

 

 

 

하사도를 닦으면 일단 삼악도는 면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 나는 발판을 마련 하는 것이다. 이 하사도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반드시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라고 말한다.

 

중사도는 소승대승이 모두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며, 상사도는 일반적 대승수행자와 밀교행자가 모두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밀교행자의 경우는 상사도까지의 수행이 완성되고 나서 선지식에 의해 대관정(大灌頂)을 수지하고 밀교수행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김성철교수의 논리는

 

그러한 김성철교수의 논리대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단 계

  

  

하사도

재가/출가의 공통수행

덧셈

중사도

소승/대승의 공통수행

곱셈

상사도

일반대승/밀교행자 공통수행

인수분해

밀교수행

대관정(大灌頂)을 수지한 밀교행자

미적분

 

 

김교수는 하사도를 덧셈에 비유 하였고, 가장 높은 단계인 밀교수행을 미적분에 비유 하였다. 또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으로 간주 하고 곱셈정도의 수준으로 비유 하였다.

 

결국 상사도 또한 밀교수행을 위한 공통수행과정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상사도 과정에 있어서 위빠사나 수행 또한 중론적 관점에서 이해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일까 최근 김성철교수는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데 불멸 후 오백여 년 지나 난삽한 아비달마 교학이 발달하였다. 단순, 명료했던 초기불교였는데, 인간의 언어와 생각으로 인해 번쇄해짐으로써 치심의 번뇌만 더 증장되었다. 이를 단칼에 쳐버리는 것이 바로 반야중관학의 공사상이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61)

 

 

이런 내용에 대하여 지난 2009년 10월 27 지적(http://blog.daum.net/bolee591/16154464) 하였다. 그런데 같은해 12 31일 법보신문에 권오민 교수, 김성철 교수 불교학 비판이라는 기사 가 실렸다. 그 기사의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김성철 교수가 지난해 한 논문에서 “치심의 번뇌만 더욱 증장시킨 난삽한 아비달마 교학을 단칼에 쳐버리는 것이 반야중관학”이라고 명시한 것과 관련해 권오민 교수는 이를 계기로 김성철 교수가 그간 발표한 여러 논문들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4494&Hcate1=4&Hcate2=28&Hcmode=view)

 

 

김성철교수의 체계불학에 대해서 비판 한 것이다. 체계불학은 바로 보리도차제론을 말한다. 이어서 권오민 교수의 본격적인 비판이 교계 인터넷신문(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915&thread=23r04)에 실렸다.

 

귀류논증파적으로

 

티벳불교를 종합불교라고 한다. 마치 종합선물셋트같이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와 밀교에 이르기까지 전 불교의 과정이 총 망라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티벳불교야 말로 가장 완성된 불교라고 보는 것이 티벳불교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래서일까 초기불교를 소승이라 부르고, 아비담마와 같은 테라와다의 핵심논서를 치심만 증장시키는 난삽한 교학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 영향이어서 인지 보리도차제론의 상사도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와 있는 위빠사나에 대하여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공과 법공에 대한 자각(淸淨見)을 지향한다.

사마타가 성취된 輕安의 상태에서 중론에 대해 귀류논증파적으로 이해함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읽어 보면 아비담마는 위빠사나 수행의 지침서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이고, 위빠사나가 아비담마라는 공식이 성립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사도에서 말하는 위빠사나는 중론에 대해 귀류논증파적으로 이해함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 위빠사나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대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를 꽤뚫어 아는 통찰지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일체중생을 어머니같이

 

청전스님은 두번의 법회에 걸쳐 보리심에 대하여 강조 하였다. 티벳불교를 신앙의 불교, 보살의 불교, 자비의 불교로 일깨워 주는 보리심이야 말로 티벳불교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런 보리심은 무엇일까. 그리고 보리심은 어떻게 일으키는 것일까. 가장 예로 많이 드는 것이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일체중생을 어머니같이 여겨라!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이 보리심의 원인이고, 발보리심의 열매라고 한다. 왜 그럴까.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모든 중생은 누구든지 언젠가 한번쯤은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었을 것으로 생각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을 어머니 대하듯 하라는 것이다. ,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비심의 발로가 보리심이라는 것이다.

 

 

 

2010-01-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