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갈애와 배고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하는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 6. 12:33

 

갈애와 배고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하는 이유는

 

 

 

 

 

 

폭설후에 강추위가 연일 계속 되고 있다. 영하 15도 정도 되는 날이 연일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 겨울은 삼한사온도 있어서 지낼 만 하다고 했는데 요즘 겨울을 삼한사온이 실종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추위가 한 번 시작 되면 연10일 정도 지속 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쌓인 눈이 녹지 않아 빙판길로 변한 길에 자동차도 그다지 많이 다니지 않는다. 자동차운행을 포기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자동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두부류이다.

 

한 부류는 눈이 와도 자동차가 깨끗한 경우이고, 또 한 부류는 자동차에 눈이 가득 쌓인 채 운행 하는 경우이다. 결국은 지하주차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고, 가진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 볼 수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겨울 나기가 참 힘들다. 겨울은 여러 모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난방 일 것이다. 따뜻한 여름과 달리 난방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 힘들게 하는 것은 일자리일 것이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겨울은 견디기 힘든 계절일 것이다. 더구나 폭설이 내리고 거기에다 강추위까지 이어 지면 꼼짝 없이 집에 있어야 한다. 날씨가 풀리기만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형벌 같은생활 이라는 것이다.

 

밖에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실내에서 사는 사람들은 바깥의 고통을 잘 모른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쳐도 안온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는 모습을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매우 단순하다. 건강하게 가족과 함께 별탈 없이 한 세상 잘 살아 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안정된 직장과 축적된 재산이 있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해소 되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하는 일이 잘 되어 성공 하여 명예를 얻는 것, 또 할 수만 있다면 권력까지 쟁취하는 것, 바로 이런 것이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이다.

 

불교에서 이런 행복추구를 오욕락이라고 하였다. , 식욕, 색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이다.

 

법과 제도를 만들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에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색욕, 안락욕을 추구 한다. 그런데 이런 욕구를 충족 시키려면 재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다 재물욕을 추구 한다.

 

그러한 재물욕을 추구 과정에 있어서 불법도 서슴지 않는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도 오욕락을 추구 하기 위하여 정당화 되는 것이다.

 

실제로 주식은 국가가 인정하는 도박판이라 볼 수 있다. 또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부동산 투기가 이를 가장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불법과 탈법도 불사 하고 부동산과 주식에 올인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한평생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투기가 아니더라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법과 제도를 만들어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평생 걱정 없이 살다 갈 수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제도는 모두가 바라는 복지사회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혜택이 모든 국민들에게 돌아가면 좋으련만 힘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소위 공무원 같은 케이스이다. 한번 그 조직에 들어 가게 되면 정년까지 보장 될 뿐만 아니라 정년 후에도 늙어 죽을 때 까지 연금생활을 할 수 있고, 도중에 본인이 사망하더라도 가족에게 60%가 승계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살아서는 물론 죽은 다음에도 물려 줄 수 있는 그와 같은 완벽한 사회보장 제도는 누가 만들었을까.

자신들이 현직에 있을 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닥쳐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수의 힘 있는 자들에게만 늙어 죽을 때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혜택은 국가가 망하기 전까지는 안전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들지 못하는 자들은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다. 미래는 커녕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날씨 마저 추워서 꼼짝 없이 냉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 하고 있을까.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불교에서 말하는 사악도이다. 그런 사악도는 사후에 악업을 쌓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한다. 또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이 있다. 그런 세상은 선업의 공덕을 쌓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한다.

 

현실에서도 그런 세상을 볼 수 있다. 지옥 같이 견디기 힘든  삶이 바로 지옥일 것이고, 바로 지금 행복에 겨운 삶이 모두가 바라는 천상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옥과 천상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지옥과 천상이 실재 하고 공존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더 정확히는 마음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뿐이라는 것이다.

 

밖에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그리고 비바람과 천둥이 치는 날씨에도 안온한 집안에서 가족끼리 맛있는 저녁한끼 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행복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할지라도 저녁이 되면 배가 고파진다.

 

점심때 부페에서 산해진미로 포만감 있게 훌륭한 식사를 하였어도, 끼니 때가 되면 배가 고파 어쩔 줄 모른다. 이런 현상은 식욕만 그럴까. 색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으로 이어지는 나머지 욕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욕락의 추구를 갈애라고 비유 하였다. 그 갈애를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 한다면 배고픔이라고 볼 수 있다.

 

생이지(生而知)와 학이지(學而知)

 

그러한 오욕락에서 벗어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에서는 출세간의 도를 지향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재가불자들에게 있어서 출세간의 도를 어떻게 지향해야 할까.

 

불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정혜 삼학을 닦을 것을 권유 한다. 그런 좋은 예가 청정도론의 서문에 나온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S.i.13)

 

 

상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이 설한 내용이다.

 

이 게송을 보면 출세간의 도를 어떻게 지향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와 있다. 먼저 이 게송에서 크게 사람을 두가지 부류로 나누고 있다. ‘생이지(生而知)’학이지(學而知)’이다.

 

태어나면서 도를 깨닫는 자를 생이지라 하고, 배워서 도를 깨닫는 자를 학이지라 한다.

 

그렇게 본다면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생이지에 해당된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통찰지를 갖추었는데, 그것은 전생의 업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 전생에 선업공덕의 과보를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근면하고 슬기로운이라는 말은 학이지를 말한다. 후천적으로 노력하여 도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

 

후천적으로 라도 도를 깨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진으로 보존하고,

통찰지로 알아차림을 행하면서,

계에 굳건히 머물러

마음과 통찰지로 표현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

 

 

생이지를 가지고 태어 나지 않은 사람들이 출세간의 도를 지향 한다면,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통찰지인데 바로 알아차림을 말한다. 그렇게 하여 엉킴(jata)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엉킴이란 무엇일까. 엉킴은 갈애를 말한다.

 

흔히 갈애는 무명과 더불어 윤회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무명이 과거의 원인이라면,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된다. 무명이 자신도 어찌 할 수 없이 태어나게 만든 요인이었다면, 갈애는 자신이 하기에 따라 달려 있다. 따라서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갈애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보통 안의 감각장소인 안이비설신의가 바깥의 감각장소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을 만났을 때 발생 하게 된다.

 

이런 갈애가 아래 위로 계속해서 일어 나기 때문에 청정도론의 게송에서는 엉킴이라고 표현 하였다. 그런 엉킴을 푸는 자를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라고 표현 하였다.

 

여기서 비구(bhikkhu)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를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윤회에 대하여 두려움을 보는자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 하고 모두 비구라 볼 수 있다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통찰지의 칼로서

 

엉키고 설킨 갈애를 어떻게 타파 할 것인가. 만일 지혜의 칼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직설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의 땅위에 굳게 서서

삼매의 돌위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위빠사나의 통찰지의 칼을

정진의 힘으로 노력한 깨어 있는

통찰지의 손으로 잡아

자기의 상속에서 자란

갈애의 그물을

모두 풀고

자르고

부수어 버릴 것이다.

 

 

참으로 통쾌한 표현이다. 위빠사나라는 통찰지의 칼로서 난마 같이 얽혀 있는 갈애의 그물을 모두 베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다음의 표와 같이 설명 될 수 있다.

 

 

계정혜 삼학의 덕

 

 

1

공부

높은 계를

공부짓는 것

높은 마음을

공부짓는 것

높은 통찰지를

공부짓는 것

2

교법

처음이 좋은 것

중간이 좋은 것

마지막이 좋은 것

모든악을 짖지않음

(제악막작, Dhp183)

유익함을

받들어 행함

(중선봉행, Dhp183)

자기마음을

맑히는 것

(자정기의, Dhp183)

이것이

부처님들의 교법

(시제불교, Dhp183)

3

조건

세가지

영지에 의지

여섯가지

초월지에 의지

무애해의

분류에 의지

4

극단과

중도

괘락의 탐닉에

몰두함을 피함

자기학대의

몰두함을 피함

중도의 실천

5

뛰어넘는

방법

악처를

뛰어넘는 수단

욕계를

뛰어넘는 수단

모든 존재를

뛰어넘는 수단

6

번뇌를

버림

대체하여 버림으로

오염원을 버림

억압으로

오염원을 버림

근절함으로

오염원을 버림

7

위범의

방지

오염원의

위범의 방지

얽매임의 방지

잠재성향의 방지

8

오염의

정화

삿된행위로 인한

오염원의 정화

갈애로 인한

오염원의 정화

사견으로 인한

오염원의 정화

9

성자의

원인

예류자와

일래자의 원인

불환자의 원인

아라한의 원인

 

 

 

이렇게 아홉가지로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두번째 항목인 교법에서 모든악을 짖지않음(諸惡莫作), 유익함을 받들어 행함(衆善奉行), 자기마음을 맑히는 것(自淨其意), 이것이 부처님들의 교법(是諸佛敎)이라는  칠불통계(七佛通戒)게의 예를 들었다.

 

어떤 비난과 칭찬에도

 

그런데 칠불통계게가 법구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이 법구경의 183게송이라는 것이다. 온전히 다 나온 그 법구경 게송을 찾아 보았다.

 

 

Sabbapāpassa akaraa 삽바빠빠싸 아까라낭

kusalassa upasampadā 꾸살라싸 우빠삼빠다

sacittapariyodapana 사찟따빠리요다빠낭

eta buddhāna sāsana 에땅 붇다나 사사낭.

 

일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착한 공덕을 힘껏 행하며

자기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법구경14 – 183)

 

 

부처님의 교법을 빠알리어로 붓다 사사나(Buddha-sasana)’라 한다. 다른 말로 부처님의 명령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에서는 법원을 사사나라고 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사나의 정점은 통찰지이다. 통찰지가 마지막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평정을 유지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좋은 문구를 또 법구경에서 발견 할 수 있다.

 

 

Selo yathā ekaghano 셀로 야타 에까가노

vātena na samīrati 와떼나 나 사미라띠

eva nindāpasasāsu 에왕 닌다빠상사수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나 사민잔띠 빤디따.

 

큰 바위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법구경6 – 81)

 

 

법구경 81게송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통찰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 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바랬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가장 큰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그래서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올 일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극복해야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무명은 과거의 원인으로서 현재의 결과로서 받고 있는 것이기에 어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미래의 원인이 되는 갈애 만큼은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갈애의 극복이야말로 불교를 믿고 공부 하는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누구나 갈애를 바란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도 갈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 상태가 불행한 곳이든, 처참한 곳이든, 파멸처이든, 행복한 곳이든 모두 다 자신이 바랬기 때문에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바램이 곧 갈애이고 모든 사람들이 추구 하는 오욕락으로 집중된다. 식욕, 색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푸짐하고 양껏 먹고 나서 단 몇 시간 만 지나도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갈애는 배고픔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배고픔을 출세간의 도로서 극복 해 보자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비구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윤회에 대하여 두려움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다 해당 되지 않을까.

 

 

 

 

2010-01-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