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조록의 저승사자와 법구경, 칠정정과 16단계 지혜 중 소멸의 지혜와 유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 30. 18:47

 

마조록의 저승사자와 법구경, 칠정정과 16단계 지혜 중 소멸의 지혜와 유사성

 

 

 

 

 

 

 

기대 수명은 얼마나

 

살아 가면서 좀처럼 인정 하기 싫은 것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에게 그럴 일이 닥칠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 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 하기도 한다.

 

그런 배경에는 앞으로 살아 갈 날이 많이 남아서 일 것이다. 특히 나이가 젊은 사람일수록 죽음은 저 먼 산 넘어 있는 것처럼 남의 일 같이 생각 한다.

 

그렇게 생각 하는 우리나라의 기대 수명은 얼마나 될까. 최근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남녀 평균 80.1세라 한다. 이 것은 2008년 태어난 아이의 기준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것은 기대여명이다.

 

현재 연령대의 사람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다. 자료를 바탕으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기대여명과 기대수명

현재 나이

성별

기대여명

기대수명

30

남자

47.5

77.5

여자

54.1

84.1

45

남자

33.3

78.3

여자

39.6

84.6

65

남자

16.6

76.6

여자

21.0

86.0

                                               출처 ;www.newsbeat.co.kr

 

 

남자는 70대 후반, 여자는 80대 초중반을 살다가 죽을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것은 희망사항이다.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70대말이나 80대초반까지 살다 죽을 것이 보장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들이닥친 저승사자

 

살다가 갑자기 죽음이 닥쳐 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불교tv에서 유명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마조록(馬祖錄)’에 나온 이야기를 예를 들어 그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마조스님의 옆에 태안사라는 절에 출가 한지 40년이나 되는 주지가 살았는데, 마음법을 깨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승사자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저승사자는 다짜고짜 가자라고 말하면서 데려 가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주지스님은 손이 발이 되도록빌면서 단 하루만 여유를 달라고 간청 하였다.

 

간신히 하루를 유예한 그 주지스님은 마음법을 깨치지 못하였으므로 저승에 가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는 것이다. 학식이나 말재간을 가지고 있어서 생계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생사일대사 문제를 해결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인근의 마조도일스님을 방문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러자 마조스님은 자신을 믿고 자신의 옆에 하루 동안 앉아 있으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저승사자가 당도 하였는데 두분의 스님의 눈에는 저승사자가 보였으나, 저승사자의 눈에는 두분의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승사자는 그대로 돌아 가고, 태안사 주지스님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선종에서 말하는 요지는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를 분별하게 되면 업을 짖게 되어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승사자가 끌고 가는 것은 분별심이라는 것이다.

 

분별심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종에서는 놓아 버리는 공부, 쉬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공부를 하는데 화두를 드는 간화선이야말로 생사일대사를 해결 하는 가장 빠른 길이고 가장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본마음 참나를 찾자고 법문에서 이야기 한다.

 

법구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그런데 저승사자이야기를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도 보았다. 칠청정에서 소멸(무너짐)의 지혜를 설명할 때 이다. 내용은 마조록의 저승사자 이야기와 유사하지만 출처는 법구경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을 물거품처럼,

신기루 처럼 보는 자를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

(법구경170)

 

 

이 게송에 대한 내용은 소멸의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 넣어 졌다. 그러면 소멸의 지혜는 무엇일까. 먼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칠청정과 16단계 지혜를 알아야 한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는

 

그 것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지계의 청정

(sīla visuddhi)

 

 

2

마음의 청정

(citta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3

견해의 청정

(diṭṭhi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4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

(kakhāvitara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4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5

바른 길을 아는 청정

(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6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

(ñāadassa visuddhi)

5

소멸(무너짐)의 지혜

(bhaga ñāna)

6

두려움에 대한 지혜

(bhaya ñāna)

7

고난의 지혜

(ādīnava ñāna)

8

혐오감에 대한 지혜

(nibbidā ñāna)

9

해탈을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

(paisakhā ñāna)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sakhārupekkhā ñāna)

12

적응의 지혜

(anuloma ñāna)

13

성숙의 지혜

(gotrabhu ñāna)

14

도의 지혜

(magga ñāna)

15

과의 지혜

(phala ñāna)

7

지혜통찰의 청정

(paccavekkhaa ñāna)

16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지혜

(paccavekkhaa ñāna)

 

 

 

이 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나와 있는 표와 약간 다르다. 수행처에서 사용하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를 참고로 하여 만든 것이다. 번역어도 각기 다르지만 빠알리 원어는 똑 같다.

 

수행의 대전환점은

 

16단계의 지혜 중에 중요시 하게 여기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 청정도론을 편역한 대림스님의 서문에 따르면 네번째의 생멸의 지혜와 다섯번째의 소멸(무너짐)의 지혜 그리고 열한번째의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라 한다. 이 세가지 지혜가 매우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의 대전환은 소멸(무너짐)의 지혜라 한다.

 

소멸의 지혜로 인하여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조합되어 ‘나’니 ‘내 것’이니 자아니 영혼이니 하면서 굳게 뭉쳐있던 무더기들이 해체되고 부서지고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방 스님들도 이 무너짐의 지혜를 수행의 대전환점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멸의 지혜에 대한 더 구체적인 내용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나 중에 집중과 지혜가 더 성숙하여 강화 되면,

마음의 대상만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따라서 아는 마음도 바로 사라진다.

 

 

마음의 대상이 일어남이 분명하지 않은 반면에 사라짐만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마음의 대상 뿐만 아니라 그 것을 아는 마음도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물질적인 요소는 영원 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無常)을 느끼는 것이다. 또 소멸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수행자는 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고()라고 아는 것이다. 또 그 소멸에 대하여 누구도 막지 못하고 통제 하거나 다스릴 방법이 없어서 무아(無我)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를 철견 하기 때문에 소멸의 지혜를 위빠사나 수행의 대전환점으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저승사자 이야기의 원조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전환점을 맞으면 그 다음 부터는 일사천리라 볼 수 있다. 커다란 한 고비를 넘겼다면 이제 그냥 그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표현을 아비담마에서 법구경의 죽음의 신에 대한 예를 들어 표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체가 ‘나’니 ‘내 것’이니 자아니 영혼이니 하면서 굳게 뭉쳐있던 무더기들이 해체되고 부서지고 무너졌다면 죽음의 왕도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법구경의 게송을 빠알리 원어와 함께 다시 적어 본다.

 

 

Yathā pubbulaka pass           야타 뿝불라깡 빠쎄

yathā pass marīcika             야타 빠세 마리찌깡

eva loka avekkanta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레자 나 빠싸띠.

 

만일 누구든지 간에 세상 보기를 물거품같이 보고

자기 마음을 아지랑이 같이 본다면

그의 발자취, 마라도

그 주인을 찾지 못하리.

(법구경 170)

 

 

여기서 세상은 오온을 말하고, 마라는 죽음의 왕을 말한다. 또 무아이므로 주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라고 믿었던 몸과 마음이 모조리 해체 되고 무너졌기 때문에 나가 있을 수 없어서 죽음의 왕이 찾아 와도 도무지 그 주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마조록에 나오는 이야기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법구경이 마조록 보다 1000년도 넘게 훨씬 오래 전에 존재 하였고, 더구나  부처님이 직접 설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승사자 이야기의 원조는 법구경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참선의 위치는

 

마조록을 예로 들어 가며 한국의 선사들은 분별하지 말고 놓아 버리고 쉬는 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저승사자의 눈에 보이지 않아 잡아 가지 못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분별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고 참선을 하여 본마음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정도론의 편역자인 대림스님의 서문에 따르면 참선은 사마타와 동의어라고 한다. 즉 무분별한 경지가 본삼매이고 증득이고 사마타이고 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등식이 성립 한다고 말한다.

 

 

본삼매(초선~4)=증득(samapatti, 等至)= 사마타(samatha, )=()

 

 

, 참선과 사마타는 같은 말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선은 간화선을 제외한 일반적 의미의 일반적인 모든 선()을 말한다. 그러나 간화선도 단지 화두를 단순히 집중을 위한 대상쯤으로 여긴다면 분명히 사마타 수행일 것이다.

 

칠정정과 16단계 표에서 참선은 고작 두번째 단계인 마음의 청정단계라 볼 수 있다. 사마타를 통하여 지혜를 개발 할 수 없기 때문에 지혜에 속하지 않고, 계정혜 삼학 중에 정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출세간의 도와 과를 얻는 단계가 명확하게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에서는 체계적인 수행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려 놓고 쉬는 공부를 하라고 한다. 그래서 분별하지 않으면 생사일대사가 해결 된다는 것이다. 그런 한국불교에 대하여 최근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승불교에 젖어들다 보면 쉽게, 너무도 쉽게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서로 접목하여 ‘둘이 아니다.’라거나 ‘본래 없다.’라는 말을 책임 없이 내뱉게 됩니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교학과 수행에 대한 참으로 무책임하고 두려운 접근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hobul, 유식무경에 대한 짧은 소견)

 

 

둘이 아닌 불이사상과 본래 없는 것이라는 무분별만을 주장 한다면 무책임한 태도라는 것이다.

 

좀 더 격조 높은 법문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초기불교를 접하고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와 많은 것을 비교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몰랐던 사항도 많이 알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마조록에 나오는 저승사자이야기도 들어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저승사자 이야기의 원조격이 법구경에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이다. 이제까지 조사스님들의 이야기가 최초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면 이미 초기경전에 나온 이야기이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법문에서 분별하지 않고 놓아 버리고 쉬고 가는 공부를 하면 본마음 참나를 찾을 수 있다는 듣기에 따라 막연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또 한가지 사항은 간화선을 제외한 모든 참선이 사마타와 동의어이고 또한 칠정정에서 두번째 단계인 마음의 청정단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5단계의 청정과 16단계의 지혜는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에서 언급 되고 있지 않은 사항이다.

 

생멸의 지혜이니 소멸의 지혜이니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이니 같은 용어는 생소 하기 그지 없다. 그런 용어를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재가자는 물론 출가자도 마찬 가지이다. 그렇다면 모든 정보가 오픈 되고 공유 되는 정보통신시대에 있어서 한국불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1700년 역사와 전통만 주장 할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의 교학을 받아 들여서 좀 더 격조 높은 법문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는 재가불자의 수준이 전적으로 법문 하는 법사에 달렸기 때문이다.

 

 

 

 

2010-01-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