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누가 죽였을까, 니체가 말하는 셈족의 유일신과 아리안의 다신
어느 네티즌이 쓴 글 중에 불교에 대하여 ‘허(虛)’와 ‘무(無)’를 보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 네티즌은 불교인이 아니라 불교를 공격하기 위한 외도 이었다.
이 세상은 환영에 불과하다고
그 네티즌이 불교를 허와 무 즉, 허무로 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불교에서 무(無)자를 너무 많이 쓰고 또 공(空)자를 많이 써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불교는 과연 허무주의 종교이고 니힐리즘의 원조일까.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요소는 없었을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용수의 공사상을 들기도 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며 모든 실체는 공(空)하다고 한다. 또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런 공사상에 대해, 오해를 불러 일으킨 ‘허무주의’를 비판하고, ‘공(空)’이 성립하는 장소로서 ‘식(識)’의 존재를 인정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것이 유식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진제와 속제로 나누어 이원론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더 나간 결과 발생 된 필연적 결과라 볼 수 있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가 허무주의 라는 오해를 사고 있는데 그렇다면 기독교는 허무주에서 안전 할까.
신이 죽었다는 데
기독교의 신은 현대서양철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 언급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철저히 비판 받아서 더 이상 신은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서양철학에서 신은 죽은 것이다. 그 신을 누가 죽였을까.
니체를 근대서양철학과 현대서양철학의 다리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의 의미는 근대서양철학이 끝났다는 것을 말하고, 동사에 현대서양철학이 비로소 시작 된 것을 뜻한다.
신이 죽었다는 데 신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것은 명백히 기독교의 신 즉,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말한다. 즉, 유일신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의 다신(多神)이 ‘다시’ 들어 온 것이다.
셈족의 종교, 아리안의 종교
니체가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들이 되자”고 하였을 때 그 신들은 그리스적 다신을 말한다. 이 말은 결국 셈(Sem)의 유일신과 아리안(Ariyan)의 다신의 대결이 된다.
문명사적으로 보았을 때 크게 셈족의 유일신과 아리안족의 다신으로 나뉘게 된다. 니체가 파악한 개념은 다음과 같다.
종족 |
지역 |
명칭 |
비 고 |
셈족 |
메소포타미아 |
일(IL) |
IL을 공통어로 하는 유일신 |
유태교 |
엘로힘(Elohim) | ||
기독교 |
야훼(Yahweh) | ||
이슬람 |
알라(Alilah) | ||
아리안 |
그리스 |
디오니소스 |
니체가 선호 |
페르시아 |
차라투스트라 |
페르시아 아리안의 대표 | |
인도 |
붓다 |
인도 아리안의 대표 |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 한 것은 결국 셈족의 유일신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살리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아리안의 그리스적 다신들 그 중에 특히 ‘디오니소스’이다. 또 다른 아리안인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인도 아리안을 대표 하는 ‘붓다’이었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아리안의 부활을 의미한다.
셈족의 유일신을 죽여 버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이었을까. 니체의 ‘안티크리스트’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그 죽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떤 이유로 죽었을까
니체가 파악한 기독교적인 신개념은 병자로서의 신, 거미로서의 신, 정신으로서의 신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것은 지상에 실현 되었던 것 중에서 가장 부패한 신 개념의 하나이다.
신개념은 대단히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신은 가장 썩어 빠지고, 부패하고, 천박한 신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것은 신유형의 하향적 전개에 있어 바닥순위를 나타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여러 신의 유형이 있는데 상향도 아니고, 하향적으로 전개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바닥에 속한다는 것이다.
신이 삶에 대한 미화이자 삶에 대한 영원한 긍정이 되는 대신 삶에 대한 반박으로 변질되어 버리다니!
인간이 발견한 상향 개념의 신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의 다신을 들 수 있다. 그런 신들은 살아 가는데 긍정적이고 미화를 하지만 셈족의 유일신은 정반대라는 이야기이다.
신 안에서의 삶과 자연과 삶에의 의지에 대한 적대가 선언되고 있다니!
그러기 때문에 셈족의 유일신이 가장 천박하고 낮은 단계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왜 허무주의인가
이 세상에 대한 온갖 비방의 공식이자 ‘저 세상’에 대한 온갖 거짓 공식이 신이라니!
기독교에서 이 세상과 저세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이세상은 부정적이고 저 세상은 긍정적으로 본다. 따라서 이세상에 대해서 온갖 비방과 험담을 늘어 놓고 저세상에 대하여 온갖 공식의 이야기는 결국 기만이고 거짓이 아니냐는 이야기이다.
신안에서 무가 신격화 되고 무에서의 의지가 신성시 되다니!
보통 이세상을 부정하는 것을 허무라 한다. 또 세상을 부정 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無) 밖에 없다. 그래서 허무주의라 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세상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 라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니힐리즘(Nihilism)이라 한다. 이 말뜻은 라틴어에서 무를 뜻하는 니힐(nihil)을 그 어원으로 삼기 때문에 허무주의라 말한다.
기독교가 왜 허무주의인가. 그 이유는 기독교의 신개념에서부터 시작 된다. 기독교의 유일신은 ‘존재 그 자체’이다. 그 말뜻은 무(無)의 가능성이 털끝만치도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절대유’인것이다.
그런 신이 이 세상을 부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즉, “신안에서 무가 신격화 되고 무에서의 의지가 신성시 되다니!”라는 의미는 저 세상을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 한 것이 아니라 이세상을 지워 버렸다는 것이다.
기독교야말로 신의 존재로 인하여 충만해야 하나, 오히려 허무로 넘쳐 나고 있다는 것이다. 무를 신격화 한 기독교가 철저한 허무주의 종교라는 것을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니체는 기독교의 유일신은 인간의 작품으로 보았고, 신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도 억측을 부려서 최하위의 바닥과 같은 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가 죽였을까
서양현대철학에서 신은 이미 죽었다. 과거 완료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었을까. 그리고 누가 죽였을까. 니체는 그 세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신들이 신을 죽였다.
여기서 신들은 복수형으로서 그리스적 다신을 말한다. 그리스적 다신이 유태교의 기독교유일신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신들이 신을 죽였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였을까.
기독교의 십계명 중에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나 이외 다른 신을 믿지 말라”이다. 이 말 뜻은 다른 신을 제거 하라는 말과 같다.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믿으라는 강압적인 표현이다.
니체가 이에 대하여 ‘개그적’으로 한말은 “다신들이 웃었다” 이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 때 모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마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웃기고 있네”
바로 이런 말이 역설적으로 다신들이 유일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유일신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뉘앙스로 저주와 험담을 퍼 부었지만, 그리스적 다신들은 ‘비웃음’으로 죽여 버린 것이다. 저주의 말로서 죽이는 것 보다 웃겨서 죽이는 것은 아예 존재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신들이 유일신을 죽인 것은 폭력이 아니라 ‘웃음’을 통하여 죽였고, 죽은 유일신은 ‘바보’가 된 것이다. 시비는 유일신이 먼저 걸었지만 “웃기네” 한방으로 날려 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둘째, 인간이 신을 죽였다.
이 말은 근대인이 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근대인들이 어떻게 신을 죽여 버리게 되었을까. 그 것은 사는 것이 너무 천박해서라고 한다.
근대서양인들이 너무 천박하게 살다 보니 그 천박한 것도 신의 창조물이라 생각한 것이다. 신은 고귀하고, 고귀한자의 창조물이 너무나 천박하니까 고귀한 자의 존재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니체의 광인에 나오는 대사중 “너희들이 신을 죽였다”라는 의미가 바로 근대인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초인이 신을 죽였다.
실질적으로 인간이 신을 죽였다고 하였을 때 초인이 죽인 것을 말한다. 초인은 왜 신을 죽였을까. 그 것은 인간이 ‘신들이 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신들은 그리스적 다신을 말한다. 즉, 초인이 되기 위하여 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니체의 무신론과 불교의 무신론은
니체는 무신론자이다. 니체의 무신론과 불교의 무신론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먼저 신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창조신이고 또 하나는 자재신(自在神)이다.
자재신이란 자기 스스로 존재 하는 신을 말하는데 인도에서 볼 수 있는 신의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자재신은 물론 창조신도 인정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오로지 상호의존하여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기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연기하므로 ‘무상’하고, 또 연기하므로 ‘무아’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나가 있는다 상아(常我)개념인 ‘아트만’이나, 이 아트만이 우주적으로 설명 되었을 때의 브라만과 같은 ‘자재신’을 불교에서는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신이나 자재신 모두 허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무신론이다.
니체의 무신론과 불교의 무신론의 공통점은 똑같이 신을 부정하고 허구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니체의 무신론의 경우 권력의지에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을 대신하여 그리스적 신들과 같은 초인의 지배에 의한 권력의지를 말한다. 반면에 불교의 무신론은 신조차 집착하지 않아 철저하게 ‘비우는 것’을 말한다.
이상 불교TV에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별한다면
기독교가 허무주의 종교라는 것을 기독교인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세상을 이세상과 저 세상으로 나누어 이분법적으로 설명한다면 허무주의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저 세상을 의미 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은 하루 빨리 떠야 할 괴로움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당 같은 저 세상을 향하여 목매달고 있을 때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설명 되어 지는 이세상과 저 세상 역시 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극락이나 정토 같은 개념을 말할 때이다.
영원히 변치 않고 죽지 않는 나가 있어서 상락아정의 열반을 상정 할 때 이분법적인 개념이 성립 하는 것이다. 영원히 살고 영원히 존재 한다는 것은 불교의 교리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별하여 하루 빨리 상락아정의 저 세상에 가고자 한다면 바로 그 것이 허무주의 아닐까.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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