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길들이기,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마음 알음알이 식(識) 그리고 윈냐나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은 ‘마음공부’ 이었다. 불교공부라는 말 대신에 마음공부라는 말을 즐겨 사용 한 것이다.
생멸하는 마음을 보는 눈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도 한다. 따라서 불교는 어떤 대상에 믿고 의지 하기 보다 자신의 본마음을 보아서 성불에 이른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영향이 동아시아 불교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불교는 ‘마음을 닦는 종교’로서 불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의 종교인 불교가 남방과 북방에서 마음을 서로 달리 해석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아마도 마음을 ‘생멸(生滅)’로 보느냐, 생멸로 보지 않느냐의 견해 일 것이다.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마음을 생멸로 보지만,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마음을 본래 생멸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점은 이세상을 보는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남방불교에서는 오온으로 보았을 때 이세상 더럽고 괴로운 것이라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여 벗어날 것을 요구하지만, 북방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세상일 뿐이니 그 ‘본성’을 깨달으라고 요구한다.
이와 같이 같은 마음을 두고서 상반된 주장을 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마음을 생멸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별망상을 쉬어라
마음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북방불교의 경우 ‘분별’하지 말 것을 특히 강조 한다. 분별하지 않고 쉬는 공부, 놓아 버리는 공부를 하였을 때 오염 되지 않은 본래의 마음 즉, ‘참나’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북방불교의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월호스님은 ‘불교와 깨달음-밖으로 치달리는 분별망상 쉬어라’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곧 '쉬는 것'이다. 무엇을 쉬는가? 마음의 분별심과 몸뚱이 착(着)을 쉰다.
어떻게 쉬는가? 마음과 몸뚱이가 아닌 성품자리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저절로 쉬어지게 된다. 언제 어디서 쉬는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쉰다.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위하여 쉬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쉬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헐즉보리,歇卽菩提-능엄경)’이라고 한다.
또 안이비설신의로 이루어진 여섯감각기관이 주체가 되어 내는 분별심을 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수행방법은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 한다. 역시 능엄경에 나오는 이 용어는 ‘소리를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 (反聞聞性,반문문성)’이다. 즉, 관찰자를 관찰하는 것(觀觀者,관관자)이라 한다.
그러나 마음을 생멸 현상으로 보는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대상과 일치 하는사마타 수행이 아닌 대상을 분리 하여 지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지혜를 얻고자 한다. 순간 순간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여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일 수 밖에 없다는 통찰지혜를 얻어 해탈 열반을 실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쳐 날 뛰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
마음공부가 본마음 참나 찾기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면, 남방에서는 마음공부라는 말 대신에 어떤 말이 사용 되고 있을까. ‘위빠사나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라는 책을 보면 마음공부와 비슷한 용어가 나온다. 그 용어는 바로 ‘마음 길들이기’ 이다.
마음길들이기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아마도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 하기 때문에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와 같이 ‘미쳐 날 뛰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설하였다는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Dunniggahassa lahuno 둔닉가하싸 랄후노
yatthakāmanipātino 얏타까마니빠띠노
cittassa damatho sādhu 따차 다마토 사두
cittaṃ dantaṃ sukhāvahaṃ 땅 단땅 수카와항.
마음은 붙잡기 어렵고 경솔하여
어디나 좋아하는 곳에 쉽게 머문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진정 훌륭하니
잘 다스린 마음이 행복을 가져온다.
(담마빠다 35게송)
이 게송을 보면 마음이 생멸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곤 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은 붙잡기 어렵다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게송에 대하여 책의 저자 ‘우 쿤달라 비왐사’는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역 하였다.
길들이기 매우 어렵고,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야 마는,
마음을 길들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를 부유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혹은 천인으로 태어나게 하고,
결국은 열반에 이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길들이는 것은
도과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책의 저자 ‘우 쿤달라 비왐사’는 마음이 길들이기 매우 어렵지만 마음을 길들이게 된다면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 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탈과 열반도 실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길들이는 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서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가며, 자유롭게 떠돌아 다닌다는 것이다. 과연 마음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의 나라로 들어 오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는 장벽이 없는 것이다.
둘째,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한다. 한 순간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 슬퍼지는 것이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화를 내기도 한다. 또 이순간에 공손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은 감각대상에 반응 할 경우 재빠르게 변한다. 부처님이 지혜의 눈으로 본다면 번개가 번쩍이는 동안, 또는 눈이 한번 깜박 거리는 동안에 몇 조에 달하는 의식이 일어나고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지혜가 성숙한 수행자는 스스로 , 마음이 빠르게 일어나서 빠르게 사라지는 것, 또 매우 빠르게 변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셋째,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자기가 선택한 마음의 대상에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가기도 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불 법 승 삼보와 정신, 물질이라는 특정한 마음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 수행을 시작한 사람이 정신적대상이나 물질적 대상에 집중을 하려 해도 마음이 여기 저기로 돌아 다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마음은 시장으로, 사무실로, 학교로 어디든 돌아다니는 것이다.
넷째, 마음은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마음은 여간해서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 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 개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 하기 때문이다. 또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길들여 지지 않은 거친 마음
길들여 지지 않은 거친 마음을 빠알리어로 ‘윈냐낭(viññāņam)’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알음알이’ 또는 ‘다양하게 아는 것’을 뜻한다. 또 한자어로 표현 하면 식(識)이 된다.
식은 여섯감각기관(육근)이나 감각장소(육처)가 그 감각대상(육경)과 부딪쳐서 일어 났을 때 일어나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등 여섯가지 ‘알음알이’를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식은 대상을 접했을 때 ‘대상이 있음을 아는 알음알이’로서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과 매 순간 순간 맞닿을 때마다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하는 ‘순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 식은 알아진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가 매순간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온에서 말하는 색수상행식 할 때의 식(識) 역시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 매순간 변화 해 가는 알음알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대상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 하여 취착하게 되면 괴로움(苦, dukkha)을 가져다 줄 뿐이며, 그러므로 나라고 내세울 아무런 실체가 없음(無我, anatta)을 통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찌따(심)와 윈냐나(식)는 구분 없이 사용 하고 있고, 다만 마노(의)는 감각기관과 관련해서만 사용 되는 것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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