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생무상과 깨달음의 불일치, 삼법인과 삼특상의 순서를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0. 2. 9. 21:44

 

인생무상과 깨달음의 불일치, 삼법인과 삼특상의 순서를 보면

 

 

 

 

 

 

 

 

골든벨에서 마지막 문제가 나왔다. 삼법인이 무엇이냐에 관한 문제이었다. 이 문제만 맞추면 골든벨을 울리게 되는데 최후로 남은 퀴즈왕은 결국 그 벽을 넘지 못하였다.

 

아나운서의 설명에 따르면 삼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 말하고 때로는 제법무아 대신에 열반적정을 넣어서 삼법인 또는 다 포함 하여 사법인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불자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삼법인 문제는 골든벨에서 고난이도임에 틀림 없다.

 

삼법인과 삼특상은

 

법문을 할 때 무상 고 무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법문이 품위 있고 격조가 높아 보인다. 따라서 법문 하는 법사는 물론 듣는 사람들까지 격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무상 고 무아에 대한 남방과 북방의 시각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점에 대한 글을 후박나무님 글 삼법인과 삼특상 (http://blog.daum.net/whoami555/11284986)’에서 볼 수 있었다.

 

 

삼법인과 삼특상은 어떻게 다른가. 이를 표로 요약하여 보았다.

 

 

구분

내용

사용

특징

순서

삼법인

dharmamudra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북방불교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정리한 것

순서 바뀌어도 무방

삼특상

tilakkhana

무상(無相)

()

무아(無我)

남방불교

오온으로 대표되는 유위법의 세 가지 보편적 특징을 밝힌 것

순서 바뀌면 절대 안됨

 

 

북방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 부르고, 남방에서는 삼특상(三特相, 띠락까나, tilakkhana)이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에서 가장 눈에 띠는 점은 부르는 순서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또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로 불라우는 삼법인의 부르는 순서는 바뀌어도 무방 하지만, 삼특상의 무상’ ‘’ ‘무아의 순서를 바꾸어 부르면 스스로 무지를 폭로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순서는 무상à à무아순이다.

 

왜 순서가 중요한가

 

왜 순서가 바뀌면 안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세존]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
라훌라]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
라훌라]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
라훌라]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자신의 아들인 리훌라에게 질문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먼저 무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다음에 고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상과 고가 일종의 자연의 이법이자 상식이기 때문에 먼저 설명해주고 가장 이해 하기 어려운무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질문 형식으로 답을 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순서는 법구경에서도 볼 수 있다.

 

 

무상(無常)

 

[Sabbe sakhārā anicca] ti [삽베 상카라 아닛짜]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빠싸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277)

 

 

()

 

[Sabbe sakārā dukkhā] ti [삽베 상카라 둑카]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빠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둑카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대해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 278)

 

 

무아(無我)

 

[Sabbe dhammā anattā] ti [삽베 담마 안앗따]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빠싸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모든 담마에는 자아가 없다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대하여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 279)

 

 

삼특상에서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이유가 최종적으로 무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방불교에서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고 말하였을 때 순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행무상 다음에 일체개고가 들어 가는 경우도 있고, 열반적정이 들어 가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모두 다 들어 가서 사법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순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방불교가 삼법인을 법의 도장으로 활용하는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인지 아닌지 삼법인이라는 잣대로 판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서에 있어서도 남북방 불교의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라면 그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북방불교가 삼법인을 법의 도장으로 활용 하는 것에 비하여 남방불교는 삼특상을 수행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나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 지고 있는 물심의 현상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무상 고 무아의 삼특상을 파악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온에서의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키워드가 무상 고 무아인 것이다.

 

인생무상과 깨달음

 

보통 사람들은 무상하다는 말을 많이 쓴다. 인생도 무상하고, 세월도 무상하고, 자연도 무상 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삼특상에서 말하는 무상은 그런 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 있는 상태에서 자연도 인생도 세월도 무상 하게 변해 가는 인생무상또는 삶의 회의와 같은 다소 낭만적인 무상을 결코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비담마길라잡이에 나온다. 그렇다면 삼특상에서의 무상은 어떤 무상을 말하는 것일까.

 

손가락을 한번 퉁기는 사이에도 수 많은 마음과 마음부수와 물질들이 생멸을 거듭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이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하여 하나도 놓치지 말고 통찰 하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인생무상’ ‘삶의 회의와 같이 지극히 감상적인 상념은 도저히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감상이 있다면 무상은 느낄지 모르지만 고와 무아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가 있다는 가정 하에 무상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연의 현상이나 세월의 변화, 이웃의 죽음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나()가 있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에서 매찰나의 전광석화와 같은 변화를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삼특상에 대한 청정도론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삼특상

삼특상의 정의

삼특상의 특징

무상

오온이 무상한 것이다

생기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 때문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계속해서 압박 받기 때문

무아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기 때문

 

 

삼특상은 오온에서 경험 되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경험 되어 지지 않았다면 무상도 고도 무아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나서 수십만명이 죽어 갔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을 때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설령 그런 사실을 알더라도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한번도 본일도 없고 만나지도 않은 대상에 대하여 괴로움을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오온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

 

법의 도장을 받을 수 있는 불교는

 

삼법인은 법의 도장으로서 불교인지 아닌지 판가름 하는 기준으로 사용 되고 있다. 그래서 겉모양은 불교가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삼법인과 일치하면 불교로 인정 하고, 무뉘는 불교인데 삼법인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보았을 때 삼법인과 맞지 않는다면  불교가 아닌 것으로 판정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은 아마도 삼법인 중에 가장 핵심이랄 수 있는 제법무아일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수 많은 불교가 있다. 대게 불교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수 많은 종파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불교와 종파에 대하여 삼법인의 제법무아라는 잣대를 들이 대었을 때 과연 법의 도장을 받을 수 있는 불교는 몇 개나 될까.

 

 

 

2010-02-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