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느낌이 왜 괴로움일까, 16단계 지혜로 본 느낌과 탐진치와의 관계는
느낌의 여왕
수행처에 인터뷰시간이 있다. 우리말로 면담시간이다. 수행이 끝난 다음에 느꼈던 사항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수행지도를 받는 시간이다.
그런데 자주 질문 하는 사람만 질문하고 대다수는 그저 듣기만 한다. 듣다 보면 남이 하던 이야기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질문을 자주 하던 사람 중에 별명이 ‘느낌의 여왕’이 있었다. 주로 느낌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별명이 붙여진 모양이다.
수행 중에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느낌이야 말로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라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느낌을 이야기 하지 않는 다면 그 것은 ‘개념(빤야띠)’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념이라고도 말하는 개념은 수행처에서 피해야 할 말이다. 만일 ‘본마음’이니 ‘참나’와 같은 개념을 말한다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가지 느낌이 있는데
요즘시대를 ‘감성의 시대’라 한다. 이를 우리말로 ‘느낌’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필링(feeling)’이라 한다. 그런 감성을 자극 하는 것은 도처에 깔려 있다. 그 중에 매스컴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매스컴에서는 이른 바 필을 꼽기 위하여 오관을 자극한다. TV화면에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화면과 음성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광고’ 일 것이다. 광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자극으로 넘쳐 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만 뜨면 마주치는 모든 대상은 어서 나를 보아 달라고 유혹하는 듯 하다. 그런데 여섯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이 마주치는 대상(색성향미촉법)은 모두 느낌을 동반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느낌을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즐거운 느낌이다. 편안한 느낌이라고도 한다.
둘째, 괴로운 느낌이다. 고통스러운 느낌이라고 한다.
셋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덤덤한 느낌이라고도 한다.
느낌을 극복해야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느낌에 대하여 이 세가지의 경우를 설하였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좀 더 세분 하여 다섯가지로 보고 있다.
느낌에 대한 초기경과 아비담마 차이
초기경 |
아비담마 | ||
내용 |
빠알리어 |
키워드 | |
즐거운 느낌 (樂受) |
육체적 즐거움 |
수카 (sukha) |
즐거움 |
정신적인 기쁨 |
소마낫사(somanassa) |
기쁨 | |
괴로운 느낌 (苦受) |
육체적 고통 |
둑카 (dukkha) |
고통 |
정신적인 불만족 |
도마낫사(domanassa) |
불만족 | |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不苦不樂受) |
중립적인 느낌 |
우뻭카(upekkha) |
평온(지둔함) |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각각 육체적 정신적으로 구분 한 것이다.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중립적인 느낌을 평온으로 대체 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평온(우뻭카)은 일반적으로 공평무사한 고결한 정신적인 특질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온은 기쁨이나 낙담으로 기울지 않는 정신적으로 ‘중립적인 느낌’을 말한다.
이 평온이 욕계에서 사용 될 때는 ‘낮은 차원의 평온’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둔(至鈍)함’이라고 말한다.
모든 느낌은 극복의 대상이다. 극복 되지 않으면 느낌이 갈애로 발전 하여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집착은 ‘고통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느낌의 단계에서 극복 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 느낌을 극복 하는 것이 수행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느낌 중에 괴로운 느낌만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운 느낌도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미세한 느낌도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느낌의 극복이야말로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다.
도표로 보면
수행처에서 왜 느낌을 그토록 강조하고 개념이나 관념을 이야기 하면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칠정정과 16단계의 지혜 그리고 느낌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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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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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단계 지혜 |
느낌(탐진치)의 극복 |
1 |
계청정 (sīla visuddhi, 지계의 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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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심청정 (citta visuddhi, 마음의 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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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수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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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견청정 (diṭṭhi visuddhi, 견해의 청정) |
1 |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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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도의 청정 (kaṅkhāvitaraṇa visuddhi,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 |
2 |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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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도비도지견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바른 길을 아는 청정) |
3 |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
괴로운 느낌의 극복 (성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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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
즐거운 느낌의 극복 (탐욕) |
6 |
행도지견청정 (ñāṇadassa visuddhi,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 |
5 |
소멸의 지혜 (bhaṅg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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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두려움에 대한 지혜 (bhay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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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고난의 지혜 (ādīnav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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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혐오감에 대한 지혜 (nibbidā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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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해탈을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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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다시 살펴보는 지혜 (paṭisaṅkhā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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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saṅkhārupekkhā ñāna) |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극복 (어리석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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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적응의 지혜 (anulom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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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성숙의 지혜 (gotrabhu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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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도의 지혜 (magga ñā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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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과의 지혜 (phal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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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지견청정 (paccavekkhaṇa ñāna, 지혜통찰의 청정) |
16 |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지혜 (paccavekkhaṇa ñā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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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는 제따와나 선원의 일묵스님이 작성한 도표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보고 작성하였다.
느낌과 탐진치와는 어떤 관계이길래
모든 느낌은 ‘불선업’을 지을 잠재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불교에서 가장 멀리해야 하고 피해야 하고, 극복해야 만 하는 ‘탐진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에 대하여 수행중에 일어나는 느낌의 순서와 극복의 과정이 위의표와 같다. 위의 표 중에 핵심은 다음과 같은 원인에 기인 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괴로운 느낌에서는 성냄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둘째, 즐거운 느낌에서는 탐욕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셋째,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는 어리석음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복의 대상인 탐진치가 모두 느낌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서 고통스러울 때 잘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가 나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있는 동안 성냄과 슬픔이 연달아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즐거운 느낌으로 편안할 때 잘 알아차리지 못하면 즐거운 느낌이 있는 동안 ‘편안함을 너무 좋아하기에’ 탐욕이 반복해서 일어 난다는 것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 날 때 역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반복 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느 낌 |
요 인 |
반복되는 결과 |
괴로운 느낌 |
화가 나기에 |
성냄, 슬픔 |
즐거운 느낌 |
편안함을 너무 좋아 하기에 |
탐욕 |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
분명하지 않기에 |
어리석음 |
결국 느낌으로 인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하려면 ‘알아차리는’ 방법 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 그 구체적 방법에 관하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참고 하였다.
괴로운 느낌을 극복 하려면
몸이 아프면 몹시 고통스럽다. 뒷골이 땡긴다든가, 이빨이 아프다든가, 가렵다든가등의 온갖 통증은 조금도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럴 때는 한시 바삐 통증이라는 고통에서 벗어 나고자 한다.
통증이 연달아 일어나거나 반복적으로 되면 성냄 또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정신적 불만족도 함께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성냄을 극복 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의 절반은 성공 했다고 보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행자는 보통 다음의 세가지 태도로 접근 한다고 한다.
첫째, 현재의 괴로운 느낌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알아차리는 것이다.
둘째, 현재의 괴로운 느낌을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히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셋째, 괴로운 느낌의 성품을 알기위해 알아차리는 것이다.
첫째의 경우, 고통스런 느낌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편안해지고 싶어 하는 탐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은 욕심만 더욱 키워 번뇌가 들어 오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의 경우, 적극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일종의 ‘성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알아 차린다면 성냄만 더욱 더 키워서 번뇌만 더욱 더 증장 된다는 것이다.
셋째의 경우가 바람직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이다. 대상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일어남’과 ‘정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안다고 한다. 어떻게 알게 되는가.
통증은 ‘절정’은
통증이 강해 지면 그 느낌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그 위치가 뼈가 될 수도 있고, 혈관이 될 수 도 있다.
만일 두통이라면 머리의 뒷골에 꿰뚫어 보듯이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통증이 어떻게 시작 되었고, 통증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통증의 크기를 재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꿰뚫어 지듯이 지켜 보면서 “통증, 통증” “쑤심, 쑤심”하고 알아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알아차린다. 네번에서 다섯번 알아 차릴 때 통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계속 알아차리면 그 후부터 자연스럽게 통증은 줄어 든다는 것이다.
통증이 증가할 때 네번에서 다섯번 알아차리고 나면 통증이 줄어드는 것이 통증의 성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라지는 성품을 이해 하는 지혜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 세번째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이고 괴로운 느낌, 즉 성냄을 극복 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즐거운 느낌을 극복 하려면
편안하고 즐거우면 그런 느낌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일어 난다. 이 것은 일종의 ‘탐욕’이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은 ‘괴로운 느낌’이라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왜 괴로운 느낌일까. 바로 그런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3단계의 지혜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단계를 지나면 괴로운 느낌이 극복 되어서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 단계가 4단계인 생멸의 지혜에 이른 단계이다. 그래서 그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상태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편안함을 느꼈을 때 편안함이 계속 되지 않고 그 사이에 ‘정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편안한 느낌이 끝까지 유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은 곧 사라지고 편안한 느낌이 새로 일어 나는 것이다.
이렇게 편안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점점 더 빨라지면 어떻게 될까. 수행의 지혜가 깊어지면 일어남과 사라짐이 너무 빨라지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의 괴로움이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편안한 느낌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즐거운 느낌 안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탐욕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사야도의 선창에 따라 다음과 같이 외치는 모양이다.
즐거움이 일어날 때
그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이 바른 알아차림이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16단계의 지혜중 네번째인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이고 즐거운 느낌 즉, 탐욕을 극복 하는 지혜를 말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극복 하려면
어리석음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아비담마에서는 중립적인 느낌(따뜨라맛자따, tattramajjhata)이라 하였고 ‘지둔함’으로 표현 하였다.
위빠사나 지혜가 깊어져 11번째 지혜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의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일상생활에서 두렵고 걱정스러운 감각대상을 만나거나 수행중에 두려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도 동요 하지 않고 무시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현상에 대한 표현을 아비담마에서는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라고 표현 하였다. 이 말뜻은 마치 수행자가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는 것처럼 편안 하다는 것과 같다.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을 만나도 마치 “소가 닭 쳐다 보듯이” 구경꾼이 되어, 알아차리는 마음은 알아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너무 쉽다 보니
‘현상에 대한 평등(saṅkhārupekkhā ñāna)’이라는 말은 마음의 형성력인 행(상카라, saṅkhāra)과 평등(우뻭카, upekkhā)의 결합어이다. 여기에는 두려움도 즐거움도 없다.
소멸의 지혜와 두려움에 대한 지혜의 수준에서 법을 이해 하게 되면서, 가지게 되었던 두려움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생멸의 지혜에서 가졌던 즐거운 느낌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감각대상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즐거움이 없어서, 수행자는 안정적이어서 즐거움이나 불쾌함 때문에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초점을 맞추는 것과 꿰뚫어 보듯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잊어 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알아차림이 혼돈스러워지고 체계가 없어진다. 이 때 어리석음이 일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에는 어리석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문제는 알아차림이 너무 잘 되어 알아차림이 쉽다 보니 어리석음이 일어나서 머무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 11번째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즉,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지혜를 말한다.
정지가 있음으로 해서
성냄과 탐욕과 어리석음을 극복 하기 위한 세가지 지혜에서 공통적으로 강조 되는 사항은 알아차림이다.
그런데 그 알아차림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정지(머묾)’라는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있어서 정지를 말함이다.
그 정지가 있음으로서 통증은 계속 되지 않고, 즐겁거나 편안함 느낌 또한 계속 되지 않는다.
만일 일어남만 있고, 사라짐이 없다면 통증이나 편안함은 계속 될 것이다. 그 정지가 있음으로 해서 고통을 제어 할 수 있고, 즐거움이 곧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으로 인한 성냄, 즐거움으로 인한 탐욕과 같이 거친 요소는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지만 알아차림이 너무 잘되어 쉽게 되다 보면 어리석음과 같이 미세한 요소는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인 평온함 즉, 어리석음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지(머묾)에서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머물러있는’ 어리석음을 버리자는 것이다.
바로 그 것은 모든 현상이 영원하지 않고 무상함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너무 머리로만 알려고 한다는데
어떤 이들은 지혜를 너무 머리로만 알려고 애쓴다고 타박 하기도 한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너무 지식에 의존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법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과 통찰을 함께 하는 것이라 한다.
즉 교학(빠리얏띠, 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빠알리 삼장(띠삐따까, ti-pitaka)을 말하고, 수행(빠띠빳띠, patipatti)란
이렇게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더구나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불리우는 사성제에서도 분명히 나와 있다.
참고로 ‘후박나무님’의 글(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39)을 인용 하였다.
나는 알아야 할 것(苦聖諦)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集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자)이다.
(숫따니빠따 558게)
수행이라는 것이 아는 것, 버리는 것, 실현하는 것, 닦는 것으로 설명 되고 있다. 그래서
첫째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아는 것(parinnaa),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를 완전히 버리는 것(pahana),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를 실현하는 것(sacchikiriya),
넷째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진리를 닦는 것(bhavana)
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깨닫는 것 하나로 수행의 목표를 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알 것인가, 무엇을 알 것인가, 어떻게 버릴 것인가,무엇을 버릴 것인가,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무엇을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닦을 것인가,무엇을 닦을 것인가 라는 문제들을 더 종합적으로 사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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