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움과 권태 허무에 빠질 겨를이 없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순환적시간관
‘이 세계’와 ‘저 세계’가 있는데
세계는 두 개가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이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세계관은 서양문화의 산물이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와 기독교의 신을 들 수 있다.
이데아와 신은 저 세계를 상징 하지만, 이데아의 복사판과 같고 신의 피조물과 같은 존재들은 이 세계에서 산다.
현대이전의 서양철학에 있어서 세계관에 대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세 계 |
저 세 계 |
비 고 |
가상 |
원본 |
|
복사본(Copy) |
이데아(Idea) |
플라톤 |
피조물 |
신 |
기독교 |
이 세계와 저 세계로 세계를 나누다 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필연적으로 이 세계를 부정 할 수 밖에 없다.
그 말은 이세계가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을 허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세계는 허무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기독교 신학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허무주의’ 종교라 하는 것이다.
능동적 허무주의란
현대이전의 서양철학은 이 세계를 부정 하고, 저 세계를 긍정 하는 이분법적인 사조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시작이라 부르는 니체철학에서는 거꾸로 저 세계를 부정해 버렸다. 이것을 능동적 허무주의라 한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크게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이렇게 두 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허무주의 |
이 세계 |
저 세계 |
비 고 |
수동적 허무주의 |
부정 |
긍정 |
기독교 |
능동적 허무주의 |
긍정 |
부정 |
니체 |
기독교가 이 세계를 부정하고 저 세계를 긍정하는 것과 달리, 니체는 정반대로 이 세계를 긍정하고 저 세계를 부정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말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고 또 인간이 신을 죽여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세계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였다고 하여 이를 ‘능동적 허무주의’라 부른다.
시작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니체는 저 세계를 부정한 것과 달리 이 세계를 철저히 긍정 하였다. 그것에 대한 니체의 이론이 ‘영원회귀’이다.
영원회귀란 어떤 의미일까. 독일어 원어를 보면 ‘에비 비더케어(ewie wiederkehr)’이다. 원어를 풀어 보면 에비(ewie)는 ‘영원’이라는 말이고, 비더(wieder)는 ‘다시’ 또는 ‘반복’이라는 뜻이고, 케어(kehr)는 ‘돌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원히 반복해서 계속 돈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원’으로 설명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이 점은 기독교의 직선적인 시간관과 대비된다.
기독교에서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끝점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먼저 직선적 시간관을 보면 시작점이 있고 반드시 끝점이 있다. 기독교의 시간개념으로 말한다면 시작점은 창조가 되고, 끝점은 종말이 된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가 명확하고 시간은 마치 화살처럼 미래를 향하여 날아 가는 개념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 보다 미래를 더 기대하고 바라본다.
그러나 날아가는 시간의 미래를 잡으려 하지만 결코 잡혀 지지 않는다. 또 이미 지나간 과거도 마찬가지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이 이런 때 해당 될 것이다.
찍는 점이 시작점
반면에 순환적 시간관을 보면 시작점이 없다. 끝점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굳이 시작점 말하라고 한다면 자신이 찍는 점이 시작점이 된다. 즉, 자신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끝점은 어디일까.
끝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멈추는 점이 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환적인 시간관의 종말은 찍는 것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찍어 놓고 펼치면 직선이 되니 시간의 중심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어느 곳을 찍어도 중심이 된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모두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 찰나 찰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순간 속에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이론이다.
‘지겨움’과 ‘권태’를 느낄 때
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다. 만일 영원히 계속 된다면 지겨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반복 순환 되는 것 만큼 지겹고 권태로운 것은 없다. 영화를 볼 때 처음보면 재미 있지만, 같은 내용을 두 번, 세번 반복해서 본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똑 같은 영화를 백번 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고문도 그런 고문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소연 할지 모른다.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권태이다. 늘 똑 같은 일상을 반복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롭고 흥미로운 대상을 찾아 항상 두리번 거리게 된다.
그런데 우리 일상은 항상 고정된 채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같아 보이면서도 시간에 따라 달라 지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자연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하는 식으로 매번 봄, 여름을 맞이 하지만 똑 같은 계절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제가 오늘과 다르고 내일 또한 오늘과 다른 일상이 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생노병사를 거듭하면서 태어 나고 죽고 하지만 똑 같은 개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기본패턴이 동일하여 반복 된다면 ‘지겨움’과 ‘권태’를 느끼게 되지만, 패턴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면 지겹거나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저 세계로 도망쳐 보았자
이렇게 영원히 변화해 가는 것이 순환적 시간관이다. 즉 원이 고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이 바퀴처럼 굴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순환적 시간관과 달리 직선적 시간관은 지겨움을 견뎌 내지 못한다. 그래서 저 세계로 ‘도망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를 무가치하고 무의미 하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저 세계로 도망쳐 보아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변화가 없으니 권태와 지겨움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것이 나와야 지겨움을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투라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모든 것은 가고 또 되돌아 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 간다.
바퀴 그 자체이면 동일한 패턴이지만, 굴러가기 때문에 구르면서 영원히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인데 영원불멸과 구분 되는 말이다.
꽃은 다시피고
모든 것은 죽고 또 다시 꽃은 핀다.
존재의 연령은 영원하다.
여기서 존재의 연령은 영원히 변화 하는 존재를 말한다. 즉, 생노병사, 생노병사, …를 거듭 하는 존재를 말한다.
모든 것은 부서지고 또 새로 결합된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재건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은 부서지고’ 라는 말은 능동적 허무주의를 말한다. 또 ‘새로 결합된다’라는 말은 순환을 말한다.
부서지는 것 까지만 말한다면 능동적허무주의가 되지만 새로 결합 되므로 영원회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중심은 도처에
모든 것은 헤어지고 다시 서로 만난다.
존재의 원환은 영원히 자신에 충실하게 회전 한다.
정지한 원이 아니라 ‘굴러가는’ 원과 같다는 것이다. 원형의 수레바퀴가 계속 굴러 감을 의미한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 된다.
여기를 돌아 저기라는 공은 굴러 간다.
중심은 도처에 있다.
공의 비유를 들었다. 공에는 중심이 없다. 다만 찍는 곳이 중심이 될 뿐이다. 따라서 모두가 중심이다. 중심은 도처에 있는 것이다.
허무에 빠질 겨를이 없는
찍는 점이 시작점이다.
매 순간이 시작점이고 모두가 중심이다.
순간 순간 찰나 찰나가 소중하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찰나생 찰나멸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허무에 빠질 겨를이 없다.
이렇게 매순간의 중요성은 불교와 매우 통하는 부분이다. 어디에든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無住)’와도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불교와 통하는
니체의 영원회귀는 불교의 영겁연기와 매우 유사 하다. 또 절대불변하는 영원불멸의 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와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무자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니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불교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 불교TV에서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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