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두타행은 어느 때 무너지나, 청정도론으로 본 한국불교의 현실

담마다사 이병욱 2010. 2. 26. 15:58

 

두타행은 어느 때 무너지나, 청정도론으로 본 한국불교의 현실

 

 

 

 

 

 

 

 

종교의 경쟁력은

 

종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신도가 많아야 경쟁력 있는 것일까. 아니면 거대한 성전을 가지고 있어야 힘이 있는 종교일까.

 

종교의 경쟁력은 신도가 많다거나 돈이 많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구 동성으로 종교의 최대 경쟁력은 무소유청정함에 있다고 한다.

 

무소유와 청정함이야 말로 종교의 권위를 한껏 높여 주고 모두 믿고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주 관음사 전 주지의 먹튀

 

최근 교계인터넷신문의 뉴스에 따르면 제주도를 관할 하는 제23교구 본사 관음사가 소송에서 패소해 본사까지 경매에 놓일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기사가 화제이다.

 

현 주지의 설명에 따르면 멸빈된 전 주지가 17년간 재직 하면서 35억이 넘는 빚더미를 관음사에 떠 넘겨서라는 것이다.

 

마치 세속에서 시정잡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무소유를 실천해야할 부처님의 제자들이 먹고 튀는 먹튀전략을 구사하는데 있어서 아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상이 제주도 관음사에만 있는 것일까.

 

교계신문의 뉴스에 따르면 일부 저질 승려들의 비리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세속의 범부만도 못한 수행자들이 왜 생겨 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승려의 자질문제가 가장 크겠고 그 다음으로 교육문제일 것이다.

 

이차적으로 소속사찰의 재가불자들의 수준문제이다. 그런 비리가 생겨 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재가불자들도 깨어나야 한다. 불량품은 구매 하지 않듯이 저질 비리승려들에게 지원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의 가르침 중에

 

깨달음 위주의 한국불교 현실에서 계와 율을 등한시 한 결과 수행자 본분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럴 때 항상 하는 말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초심이 초발심자경문일 경우도 있겠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남방상좌불교에 있어서 부동의 준거틀이라는 청정도론의 가르침 보다 더 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청정도론의 가르침 중에 두타행이 있다.

 

두타 하면 떠오르는 말은 두타산마하깟싸빠(Maha- kassapa)’존자이다.

 

두타산은 강원도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에 있는 해발 1,353m의 산이다. 산이름이 두타인 것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이나 산봉우리가 그렇듯이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일 것이다.

 

또 두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마하깟싸빠(MahA- kassapa)존자이다. 마하깟싸빠존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사람으로서 부처님의 입멸후 제자들의 교단을 이끌어 갔던 사람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마하깟싸빠존자를 제1조로 높이 받들고 있기도 하다.

 

두타의 의미는

 

두타행에 있어서 두타의 의미는 무엇일까. 청정도론에서 두타의 빠알리 원어는 두땅가(dhutanga)이다. 이 원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세가지 경우로 볼 수 있다.

 

첫째, 오염원을 제거한(dhutassa) 비구의 수행들(angani)이다. , 두땃사와 앙가니의 합성어가 두땅가(dhutanga)라 볼 수 있다.

 

둘째, 오염원을 제거했기 때문에 두타(dhuta)라고 이름을 얻은 지혜가 이들의 수행(anga)이기 때문에 두타행(dhutanga)이라 한다.

 

셋째, 이들은 반대 되는 것을 제거했기 때문에 두타이고, 도닦음(patipatti)이 때문에 수행이다.

 

 

두타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여려종류의 계가 깨끗하게 구족하게 되었을 때, 소욕과 지족의 덕들을 성취하기 하기 위하여 계를 받은 수행자가 두타행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계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은 두타행은 의미가 없다라는 말과 같다.

 

두타행의 키워드는 소욕과 지족이다. 그 외 번뇌의 말살, 한거(멀리 여윔), 흩어버림, 부지런히 정진함, 공양하기 쉬움등의 덕으로 성취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지극히 청정해 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허물없는 계와 서원의 덕으로 성자의 계보에 올라가는 것이다. ,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의 경지를 거쳐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계보를 증득 하는 것이라 한다.

 

내용을 보면

 

두타행에는 열세가지가 있다. 열세가지 두타행은 계를 받은 비구가 수행한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는 비구 뿐만 아니라 비구니, 사미, 식차마나와 사미니, 심지어 재가불자들인 청신사와 청신녀에 해당 된다고 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두타행의 내용과 대상

 

수행

분류

관련

비구

비구니

사미

식차마나

사미니

청신사

청신녀

1

분소의를 입는

단독

수행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2

삼의만 수용하는

단독

수행

수용

수용

X

X

X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주수행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주수행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음식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음식

수용

X

수용

X

X

8

숲에 머무는

단독

수행

숙소

수용

X

수용

X

X

9

나무 아래 머무는

 

숙소

수용

X

수용

X

X

10

노천에 머무는

주수행

숙소

수용

X

수용

X

X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단독

수행

숙소

수용

X

수용

X

X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숙소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13

눕지 않는

단독

수행

정진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열세가지 두타행이 있지만 총괄적으로 보면 여덟가지이다. , 단독수행 다섯가지와 주수행 세가지이다.

 

이 중에 주수행을 보면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노천에 머무는 수행이다.

 

의식주와 관련 된 것으로 따져 보면 옷과 관련 된 것이 두 가지, 음식과 관련된 것이 다섯 가지, 숙소와 관련 된 것이 다섯 가지이고, 특히 정진과 관련된 것이 한가지인데 그 것은 눕지 않는 수행이다.

 

거사와 보살 보다 더 좋은 말은

 

수행자에 따라서 분류 해 보면 비구는 전항목이 다 해당 되고, 사미의 경우 삼의만 수용하는 것이 제외 된다.

 

비구니의 경우 숲에 머무는 수행과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은 학습계율에 금지 되어 있다고 한다. 또 노천에 머무는 수행, 나무아래 머무는 수행,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은 비구니로서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허락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사부대중이라 할 때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라 한다. 그런데 우바새 우바이라고 하였을 때 재가신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 되는데 우리나라 불자들은 이를 남자의 경우 거사라 부르고, 여자의 경우 보살이라 부른다.

 

그러나 거사와 보살 보다 더 좋은 말이 청신사(淸信士)’청신녀(淸信女)’가 아닐까 생각 한다. 거사와 보살이 대승불교의 고착된 용어라면 청신사 청신녀는 그런 느낌을 주지 않고 초기불교의 정신을 잘 살릴 뿐만 아니라 청정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준다.

 

그런 청신사와 청신녀가 수용 할 수 있는 항목이 한자리에서 만 먹는 수행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으로 나와 있다.

 

13가지 두타행중 눕지 않는 수행만 빼고 모두 의식주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 하는 넓은 집, 브랜드 있는 옷, 맛있고 달콤한 음식, 보드라운 잠자리를 멀리 하는 소욕과 지족의 삶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열세가지 덕에 대한 찬탄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나타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왕족처럼

 

첫째, 분소의를 입는 수행이다.

 

 

마라의 군대를 항복받기 위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왕족처럼 빛난다.

 

 

분소의는 공동묘지 등에서 버려진 천조각을 이어서 만든 누더기옷을 말한다. 그런 누더기 옷을 갑옷으로 표현 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도 왕족시절의 비단옷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할까 하고 반문하는 문장이라 볼 수 있다.

 

날개를 가진 새가 날아 가듯이

 

둘째, 삼의만 수용하는 수행이다.

 

 

여분의 옷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저장을 피하는

삼의만 수용하는 지혜 있는 수행자는

지족과 행복의 맛을 안다.

 

 

초기불교 수행자들은 상의 하나, 하의 하나, 대가사 하나로 삼의만 수용하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검소한 생활과 여분의 옷에 대한 탐욕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삼의만 수용한 수행자는 마치 날개를 가진 새가 날아 가듯이 삼의만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지자들은 경멸하지 말아야

 

셋째,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이다.

 

 

탁발음식 덩이에 만족하고

타인에 의존 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음식에 탐욕을 버린 수행자는 사방에 자유롭다.

 

 

음식은 항상 걸식 의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올리는 음식, 지정한 비구들에게 올리는 음식, 초대하여 올리는 음식을 수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대중스님들에게 올리는 음식을 드십시요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저희 집에서 대중스님들이 공양을 드십니다. 스님께서도 공양을 드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은 받아도 된다고 한다.

 

이런 탁발수행자에 대하여 지자들은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게으름을 떨치고 생계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눈을 내리 뜨고

 

넷째, 차례대로 탁발 하는 수행이다.

 

 

집의 차례대로 탁발하는 비구는

가족들에게 달과 같고, 항상 낯설고 , 인색하지 않고

모두에게 고루 연민을 느끼고

친한 가족의 부양을 받는 위험이 없다.

 

 

비구가 길을 가다가 탁발할 시간이 되면 그가 도착한 마을을 지나치지 말고 그곳에서 탁발을 해야 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얻지 못하였거나 조금밖에 얻지 못할 경우 마을의 차례대로 탁발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만 시주자가 절에 와서 음식을 올리거나 도로에 나와서 발우를 받아서 음식을 올리면 그것은 허락 되는 것이다.

 

탁발하는 비구는 신도가족 들에게 항상 낯설어야 된다고 한다. 또 그들에게 탐욕을 내지 않고 연민을 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 보지 않고 눈을 내리떠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보는 앞은 멍애의 길이만큼이라고 한다.

 

음식에 대한 갈애를 없애는

 

다섯째, 한자리에서만 먹는 수행이다.

 

 

한 자리에만 먹는 것을 좋아 하는 수행자는

음식으로 인한 병을 만나지 않는다.

맛에 대한 탐욕을 버린 그는

자신의 도닦는 일을 잃지 않는다.

 

 

음식을 먹다 일어나서 여러자리로 옮겨 다니며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을 말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음식먹기는 끝난 것이다.

 

이것은 음식이 많건 적건 간에 손을 댄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어떤 이득이 있을까.

 

음식에 대한 갈애를 없애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병이 없고, 몸이 가벼울 뿐만 아니라 소욕지족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한 개의 그릇에만 의지 하는

 

여섯째, 발우 한 개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이다.

 

 

눈을 아래로 내리뜬 진실한 수행자는

여러 그릇에서 생기는 산란함을 버리나니

참다운 서계를 가진 그는

맛에 대한 갈애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

 

 

이것은 두번째 그릇을 금지 한다는 말이다. 오로지 한 개의 그릇에만 의지 하는 것이다. , 반찬, 생야채등은 발우 속에 넣을 수 있고 적당량을 받아야 한다. 이 수행의 이점은 무엇일까.

 

다양한 맛에 대한 갈애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음식에 대한 소원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쟁반등을 소지 하는 번거러움을 피하고, 여러 그릇 등을 보면서 먹는 산란함도 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장하지 않고 과식을 버리는

 

일곱째, 나중에 얻는 밥을 먹지 않는 수행이다.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지혜로운 수행자는

다시 음식을 찾는 성가심이 없고

저장을 하지 않고 과식을 버린다.

 

 

이 선언은 추가로 얻은 음식을 거절 하고,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이익은 무엇일까.

 

추가 음식으로 인한 허물을 범함이 없고, 과식하지 않으며, 음식을 보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찾을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소욕에 적합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적절한 형상등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아

 

여덟째, 숲에 머무는 수행이다.

 

 

한적한 곳에 머물고, 홀로 머물고

멀리 떨어진 숙소를 기뻐하는 비구는

숲 속에 머물러서

구세주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마을의 숙소를 떠나 동틀 무렵 숲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과 숲의 경계는 어디일까.

 

마을의 대문에서 보통의 힘을 가진 사람이 돌을 던졌을 때 돌이 떨어진 곳이 경계라는 것이다. 또 율장에서는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제외한 모든 곳이 숲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장에서는 궁수가 활을 쏘았을 때 그 떨어지는 거리가 숲과 마을의 경계라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탁발하기 쉽고, 병이 났을 때 간호 할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부적절한 형상등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숲에 머무는 수행자는 분소의로 된 갑옷을 입고 두타행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숲속의 전쟁터에서 마라의 군대와 붙어서 이길 수 있으니 그 것이 숲에 머무는 가장 즐거움이라고 한다.

 

한적한 나무 아래에

 

아홉째,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이다.

 

 

승자인 부처님께서 의지할 것이라고 찬탄하셨네

한거하는 자에게 나무 아래 같은 거처 또 어디 있을까.

거처에 대한 탐욕이 없고 신들이 보호하며

한적한 나무 아래에 항상 머문다.

 

 

이 말은 지붕아래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일 지붕아래에서 새벽을 맞는 다면 이 두타행은 무너지고 만다. 나무아래를 거처로 수행하는 수행자에 어떤 이득이 있을까.

 

어린 나뭇잎이 변해 가는 것을 봄으로써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려서 무상을 느낄 수 있고, 거처에 대한 탐욕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목신들과 함께 거주 하고 소욕에 적합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슴처럼 집착 없이 다니면서

 

열번째, 노천에 머무는 수행이다.

 

 

출가생활에 어울리고 쉽게 얻을 수 있고

별들의 보석이 펼쳐 졌고 달과 해가 빛을 주는

노천에 머무는 비구는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해태와 혼침을 털어버려 수행의 기쁨에 의지 한다.

 

 

이 수행은 지붕아래도 거절하고, 심지어 나무아래도 거절 하는 수행이다.

 

엄격하게 하는 자는 나무나 바위나 집근처에 살아서는 안되고, 오직 노천에 옷으로 천막을 만들어 살아야 한다.

 

중간정도로 하는 자는 나무나 바위나 집 근처에서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도 된다.

 

가볍게 하는 자는 비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할 덮개가 있는 천과 일시적인 움막은 허용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해태와 혼침을 제거 하고 마치 사슴처럼 집착 없이 다니면서 소욕의 삶을 살기 위함이다.

 

항상 시체 옆에 있어야

 

열한번째,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이다.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자는 죽음을 수관하기 때문에

잠잘 때 조차도 방일함의 허물이 그에게 닿지 않으리

그가 많은 시체들을 볼 때

마음은 애욕에서 멀어진다.

 

 

시체를 태우는 곳이 공동묘지이다. 또 시체를 태우고 나서 12년동안 방치해 둔곳도 공동묘지로 본다.

 

경행을 할 때도 눈을 반쯤 뜨고 화장한 곳을 쳐다 보면서 해야 한다. 매일 공동묘지에 가야 하고 밤에는 중경때 까지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한다.

 

엄격하게 하는 자는 항상 시체가 옆에 있어야 하고, 또 항상 곡소리가 나는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얻고, 방일함이 없이 머물고, 부정한 표상(부정상, 不淨相)을 얻고, 애욕을 버리고, 몸의 본성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인간이 아닌 자들의 존경을 받기 위함이라고 한다.

 

건초가 깔린 곳에서도

 

열두번째,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이다.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자는 얻은 것에 만족한다

건초가 깔린 곳에서도 분별없이 행복하게 잠잔다.

그는 호화로운 것을 기뻐하지 않고

낡은 것을 얻음에 성내지 않는다.

 

 

이것은 숙소에 대한 탐욕을 버리라는 말이다. 숙소가 배정 되었으면 그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더운 곳인지, 추운 곳인지, 벌레가 많이 나오는 곳인지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익으로서 얻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고, 저열하고 수승한 것 등에 대한 분별을 버리는 소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그의 위의가 믿음을 자아내게 하고

 

열세번째, 눕지 않는 수행이다.

 

 

가부좌를 결하고 윗몸을 곧추 세우고

앉아있는 수행자는 마라의 가슴을 떨리게 한다.

눕는 즐거움과 조는 즐거움을 버리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앉는 것을 기뻐하는 비구는 고행림을 빛낸다.

 

 

눕지 않는 수행자는 밤의 삼경 가운데 한경 동안은 일어서서 경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눕는 것은 허락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이익은 무엇일까.

 

누워서 자는 즐거움과 조는 즐거움에 대한 마음의 얽매임을 끊을 수 있고, 어떤 명상주제라도 그 것에 전념하기 적합하고, 그의 위의가 믿음을 자아내게 하고, 열심히 정진하기에 적합하고, 바른 도닦음을 증장 시키기 때문이다.

 

두타행이 무너질 때

 

이와 같은 열세가지 두타수행은 언제 무너질까.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두타행이 무너질 때

 

 

두타행이 무너질 때

1

분소의를 입는

재가자가 준 것을 받는 순간에

2

삼의만 수용하는

네 번째 옷을 수용 하는 순간에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여분의 음식을 수용 하는 순간에

4

차례대로 탁발하는

탐욕스럽게 탁발 하는 순간에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여러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순간에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두 번째 그릇을 수용 하는 순간에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충분하다고 거절한 다음 음식을 올리도록 하여 먹는 순간에

8

숲에 머무는

마을의 숙소에서 여명을 맞으면

9

나무 아래 머무는

지붕 아래서 새벽을 맞는 순간에

10

노천에 머무는

지붕 아래나 나무 아래에 들어가는 순간에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공동묘지에 가지 않은 날에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숙소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는 순간에

13

눕지 않는

눕는 순간에

 

 

 

두타행은 고행임에 틀림 없다. 또 부처님당시에 만들어졌던 두타행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도 의문이다.

 

비록 남방불교 국가에서 탁발과 같이 일부 두타행의 전통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열세가지 조건을 다 만족하는 수행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불교와 비교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 하고 두타행을 되 집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그 것도 한국불교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첫째, 수행자들이 마을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사람이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행자들은 주로 숲에서 머물렀는데 마을에서 숲까지의 경계는 보통사람이 돌을 던져서 떨어진 지점이나, 활을 쏘았을 때 화살이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 이유가 탁발하기 편리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수행자들이 재가자들과 항상 함께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서로 복짖는 일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철저하게 무소유를 지향 하였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넓직하고 안락한 집, 보드라운 잠자리, 맛있고 달콤한 음식, 패셔너블한 여러벌의 옷등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옷은 세벌이면 족하였고, 발우는 오직 하나, 차례로 탁발하며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잠자는 곳 역시 숲속이나 나무아래 또는 노천에서 보낸 것이다.

 

그렇게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항상 청정함을 유지 한 것이다.

 

셋째, 고행을 함으로써 출세간의 도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였다. 그런데 그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라 바른길(正道)을 말한다. 그 ‘바른길’이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바른 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팔정도(八正道)일것이다. 팔정도의 정자는 빠알리어 ‘삼마(samma)’이다. 삼마는 ‘바르다’라는 뜻이다.

 

불교식 중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쾌락과 자기학대(고행)에 몰두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행을 예로 든다면 고행을 하긴 하되 ‘거기에 목적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고행이라면 해도 좋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마하깟싸빠 존자의 두타행을 칭찬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교계의 핫이슈 중의 하나

 

부처님과 부처님제자들이 걸어 갔던 두타행은 우리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다. 13가지 두타 행중 남방상좌부 국가에서 일부 시행 되고 있는 항목은 있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아마도 전무할 것이다.

 

무소유와 청정함을 특징으로 하고 소욕 지족의 삶을 살아가는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과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가 교계신문에 연일 발표 되고 있다.

 

최근 교계의 핫이슈 중의 하나가 사후 사재출연령이다. 사후 승려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골자로 한 조계종의 종령이 좋은 취지 임에도 불구 하고 예상 하였던 반발을 맞아 암초를 만났다는 것이다. 평생 일구어 놓은 재산을 종단에 넘기기 싫어서 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우리나라 불교계는 종단이 무척 많다. 수백개가 난립 되어 있는 종단 뿐만 아니라, ‘사단법인또는 재단법인자가 들어가는 불교단체도 부지기 수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한마디로 재산을 빼았기기 싫어서새로운 종단을 만드는 것이다. 당대가 지나면 모두 사라질 운명의 새로운 종단을 만드는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재산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 하고 싶어서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면 양반축에 들어 간다.

 

취재후그 뒷 이야기를 보면

 

문제는 종단의 재산을 팔아 넘기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제주도의 관음사 사태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불교계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돈의 위력 앞에 맥을 못 춘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고발성 글이 있다.

 

김나미 기자의 취재후그 뒷 이야기(세상에 나가지 못한 풀어 놓고 싶은 이야기 보따리 입니다, http://blog.naver.com/kimnami57/120042304055)’라는 글이다.

 

그 중에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호의호식하며 무위도식, 무임승차하는 성직자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같은 성직은 평범한 기본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쉽게 평생 먹고 사는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나 불상을 이용한 사업은 아주 쉬운 장사이거든요.

 

 

성직자라고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십자가나 불상을 앞세워 마치 사업 하듯이 돈을 벌여 들여서 평생 호의호식하고, 무위도식 하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종교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곳은 결코 거룩한 곳은 아니고 정치판처럼 썩을 대로 썩은 곳이라고 말한다.

 

특히 종교현장에서 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돈문제로 인하여 각종 직위, 명예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청신사 청신녀가 깨어 나야

 

무소유와 청정함을 지향하는 수행자가 재산을 모으고, 그 모은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반발 하는 가 하면, 새로운 종단을 만들기도 하는 현실이다.

 

이 보다 더 나쁜 것은 종단의 재산을 팔아 넘기기 까지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자질이 없는 자들이 매불행위를 해서 그런 것이다. 그런 행위를 보면 범부 보다 못한 도덕성을 가진 그들은 시정잡배만도 못한 잡인(雜人)’ , ‘잡놈들인 것이다.

 

왜 이 시점에서 불교를 개혁해야 하는지, 왜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왜 재가불자 즉, 청신사 청신녀가 깨어 나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2010-0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