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이나 ‘그분’이나,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혜민스님의 글을 읽었다. 혜민스님의 블로그에서 읽었다. 한 동안 휴면상태를 유지하던 블로그에 최근 글이 연달아 실리면서 조회수도 많아지고 댓글 또한 수십개가 달려서 스님의 인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 스님의 글에서 ‘깨달음이란?’ 내용의 글을 읽었다.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글을 보면 마치 하나의 시처럼 보인다. 일종의 오도송같기도 한데 이는 자신의 수행기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글의 모두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을 것이라는 안내설명이 실려 있다.
혜민스님이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뒤는 무형상이라서 컴퓨터 모니터보듯 볼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확인할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떨어져 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비여있지만
한 생각이 뽀록하고 올라오면
그 생각이 일어 났다는 것을 그 놈이 바로 알아채요.
그럼 조금전까지만 해도 텅텅비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이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까요?
텅텅비어 고요했는데 그 텅텅비어 고요한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거
그리고 지성知性이 있어서 빛보다 빠르게 안다는 거
텅텅비어 아주 고요한 상태로 살아있는 그것이 내 본성입니다.
그것이 알아챔, 앎 자체입니다.
내면의 빛을 본다던가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던가
천상에 있는 듯한 말할수 없는 지복감이나
부처님, 예수님을 명상이나 기도중에 만난다던가
화두가 깨지고 밑둥이 확 빠진듯한 느낌이나
내 몸이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변한 상태
내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경험이 아니고
오직
오직
오직 앎만이 해탈을 시켜 줍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해탈할것이 없었다는 것을 아는 앏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앎 스스로를 확인할때 그렇다는 것을 앎니다.
즉 이 앎은 희한하게도 앎 스스로를 확인 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앎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아는 그놈,
즉 앎자체가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온세상에 앎만 홀로있다는 것을 압니다.
태초부터 그 앎이 혼자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앎이 묘妙를 부려서
둘로 셋으로 나온후 원래 하나라는 것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왜냐면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앎은
개념적 앎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 나간후에
그 마음 바탕을 확인한 앎입니다.
즉 텅텅 빈 본성이 듣고 말하고 쓰고 다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텅텅 빈채로 있는 그 본성은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한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즉 아주 고요히 텅빈채로 있는 그것이 즉 앎입니다.
다시 말하면 빈 (마음의식) 공간=앎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앎을 통해서
눈을 떠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앎에서 공간적으로 펼쳐진 세상입니다.
즉 앎 자체가 공간화 되어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앎과 공간안의 대상들이 둘이 아닙니다.
이래서 일체유심一切唯心 마음뿐 입니다.
하나다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앎자체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비여있다는 앎이 물질에 스며들어 보입니다.
즉 물질, 사람, 소리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앎이 물체를 투과하면서 자성自性 없이 비여서 있음을 스스로 앎니다.
그 앎안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도 없고 앎 자체입니다.
앎에서 펼쳐 놓으면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이 앎은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습니다.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
또 스스로를 확인하여 알수 있습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사실을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觀 놈 스스로가 自 있는 그 자리 在, 관자재 보살이 이것이라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문 不二門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그 앎이라는 사실을
비어서 고요한데 영묘하게 아는 공적영지 空寂靈知가 바로 이거라는 사실을
눈앞에 홀로 밝은 이놈!
이 앎만 또렸합니다!
이 앎은 도착하려는 피안에서
한발자국도 떠난적이 없었음을
아는 부처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이 글에 대한 댓글은 수 십개가 달렸다. 대부분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너무나 난해하다고 한다.
요한복음 1장을 읽는 기분이라는데
하지만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장문의 댓글을 달았다.
요한복음 1장을 읽는 기분인데요ㅎ
여기 수행법으로 가면 불교와 기독교가 차이가 없는듯해요.
다르다면 그 앎을 인격화시킨 것이 기독교라는...^^
저도 이런 기도법이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긴해요.
짧은 저의 지식을 주워섬겨 비유한다면
앎이라는 신에 공명 내지는 감응하는
거울뉴런을 제한하는 인슐라 영역(몸에서 뇌로 오는 감각정보의 물류센터)의 차단방법...?
그래서 신 혹은 앎과 하나되는 경험, 공감하게 되는거죠...
하지만 우린 실제로 몸을 가진 인간이기도 하고
또한 산 위에서만 살 수 없거든요..
지루한 일상과 어쩌면 악다구니같은 세상의 필요가 기다리고 있으니....^^
위에 어느분 언급하셨듯 일상으로 돌아가는순간,
그 깨달음의 경험들은 언제그랬나싶게 무색하게 느껴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삶의 현실에 튼튼하게 기반한 기도, 평범한 삶을 살아나가는 기도가
속세를 살아나가는 우리에게는 또한 많이 요청된다 생각합니다..^^
혜민스님의 글을 읽고 느낀 소감에 대한 어떤 이의 글이다. 그는 댓글에서 마치 요한복음 1장을 읽는 기분이라 하였다.
요한 복음1장은
요한 복음1장은 어떤 내용일까.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다.
요한복음 1장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오심
1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4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엣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7 요한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8 요한 자신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9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10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11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3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계획이나 바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15 요한이 그분에 대해서 증언하며 외쳤습니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
16 그분의 충만하신 것에서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17 그것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18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하나뿐인님’을 줄이면 ‘하나님’이
기독교 바이블의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과 혜민스님의 글에서 ‘그놈’과 거의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혜민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그놈에 대하여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라고 말하였는데, 그놈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뿐인님’을 줄이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를 보고 그 기독교인은 댓글에서 요한복음1장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 하였을 것이다.
빛과 회광반조, 그리고 앎
혜민스님의 글의 내용과 요한복음의 내용은 비슷한 점이 많다. 요한복음에서’ 빛’을 말하고 있는데, 그 빛과 같은 내용이 스님의 글에서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 내용은 ‘회광반조’에 관한 것이다. 회광반조에 대한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종밀은 한국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승이다. 그는 알아차림, 지(知)라는 이 한 단어가 모든 ‘경이의 원천’이라 하였다. 외부의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외부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경이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외부적 현실의 근원은 불성 그 자체, 마음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종밀은 수행자가 외부로부터 시작하여 빛의 근원인 내부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반조(返照, trace radiance )’라는 개념이다. 즉, 외부의 차원에서 시작할 수 있다.
보통 유정은 감각을 통해 바깥으로 향하여, 외부를 비추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는데, 이 빛남을 자신에게로 돌려 마음의 중심을 비추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늘의 햇살을 보고 그 햇살을 따라 빛의 근원인 태양을 보면 너무나 밝아 쳐다 볼 수도 없다. 햇살은 볼 수 있지만 태양 그 자체는 너무 밝아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본다. 역시 밝게 빛나는 마음의 중심에서 빛이 바깥을 향해 발산되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준다. 그 빛을 외부 세계에서 시작하여 되돌이켜 따라가, 그 근원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게 되면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승인 ‘유일’이 사용한 비유이다.
이 같이 빛나는 마음의 중심이 바로 영지이다. 늘 바깥으로 빛을 발하여 여기 있는 사물을 볼 수 있게끔 한다. 이 빛을 안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를 다른 말로 ‘회광(廻光)’이라고 한다. 빛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다. 빛의 방향을 돌려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조이다. 그러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한다. 빛이 태양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빛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로버트 버스웰, UCLA 대 교수, 제18회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불교TV)
사진 : http://roughversion.blogspot.com/2011/04/new-psychedelica-opens-april-8.html
혜민스님의 글을 읽어 보면 버스웰 교수의 강연과 일치한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데, 이는 빛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빛남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여 마음을 비추면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 라 한다. 빛을 되돌려 안으로 비추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내부를 비추어 알게 되는 것이 ‘불성’이라 한다. 이 불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영지(靈知, numinous awareness)’라 하는데, 이는 신성한 알아차림이라는 뜻이다. 혜민스님이 자신의 글에서 말하는 앎이란 바로 이 신성한 알아차림 즉, 영지를 말한다.
그런데 이 영지가 기독교의 바이블에 나오는 요한복음1장의 빛과 같은 개념이라면 어떻게 생각될까. 그래서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어떤 이가 댓글에서 혜민스님의 글에 자주 표현되는 ‘앎’에 대하여 “신 혹은 앎과 하나되는 경험, 공감하게 되는거죠...”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불교와 기독교가 결국 같은 것이라는 뉘앙스라 볼 수 있다.
“보는 觀 놈 스스로가 自 있는 그 자리 在”
혜민스님의 글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것이라는 의문이 드는 표현이 또 보인다. 스님은 그놈에 대하여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고 표현하여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연상시켜 주었는데, 그놈에 대한 또 하나의 표현이 ‘관자재보살’이다.
스님은 글에서 관자재보살에 대한 문자풀이로서 “보는 觀 놈 스스로가 自 있는 그 자리 在”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스스로 있는 자, 그리고 지켜 보는 자라는 뜻이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아바로키테스바라(관자재보살)’이다. 아바로키테스바라의 문자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asvara)라는 이름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모여져 만들어졌다. 동사적접두어 아바(ava)는 ‘아래(down)’를 의미한다. 로키타(lokita)는 동사 lok의 과거분사형인데, 여기에서는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보는 것(to notice, observe)’의 뜻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스바라(īśvara)는 주님(lord), 지배자(ruler), 주권자(sovereign) 또는 대가(master)로서의 의미가 있다.
산스크리트어 음성 법칙인 산디(sandhi)의 조화법칙에 따르면 a+isvara는 ‘esvara’가 된다. 결합된 의미는 ‘응시하는 주인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을 의미한다. 단어 로카(loka: 세계, world)는 이름에서 빠져 있지만,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영문판 위키, Avalokitesvara,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
아바로키테스바라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세계를 응시하는 주인님’이 된다. 그런데 이분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세상을 지켜보는 존재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재천(自在天)’이다.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한다는데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르면 자재천은 있을 수 없다. 원인없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원인을 가지지 않았다면 모든 곳,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동일한 상태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재천 등의 원인을 가진 것도 아니다. 정신, 물질의 배후에 자재천 등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정신, 물질이 바로 자재천이라고 한다. 자재천 등이라 부르는 그들의 정신, 물질이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틀린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생겼다.
(청정도론, 제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3절)
자재천은 원인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곳, 모든 경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반드시 원인과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듯이 우주의 모든 현상 역시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어서, 원인 없이 스스로 모든 곳에 존재하며 나타난다는 자재천은 ‘틀렸다’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한소급을 하였을 때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분, 창조주 역시 틀린 것이 된다.
여래장사상의 문제는
로버트 버스웰 UCLA대 교수에 따르면 여래장은 ‘무지한 보통의 중생도 매 순간마다 깨달음에 즉시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여러 생, 무한겁,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무한 겁이 세 번 반복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는 망상을 내려놓기만 하면 깨달음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의 문제는 중생이 “왜 애초에 자신들이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라면 우리가 왜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에는 여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절대선’과 ‘악’에 대한 문제와 매우 유사하다.
인간에게 모두 책임을 돌리는
기독교인들은 창조주가 ‘절대선(絶對善)’이라 믿는다. 따라서 모든 ‘악(惡)’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절대선인 신이 만물를 창조했다면 어떻게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도무지 말이 안되는 논리이다. 이런 류의 문제가 여래장사상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한다. 인간이 스스로 실수로 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래장사상에서도 우리가 모두 이미 ‘깨달은 존재’이긴 하지만, 우리가 분별함으로 망상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다. 역시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론과 여래장사상은 이유없이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하며 지고지선한 존재이지만 악이나 망상이 생겨나는 것은 모두 ‘인간때문’이라 한다. 이것이 종교학에서 말하는 ‘신의론(神意論)’이다.
중국식토착불교
한국불교는 선종을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선불교라고도 한다. 그런 선종은 중국불교이다. 중국에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와 사상이 융합되어 중국에서 발생한 ‘중국식토착불교’이다.
그런데 선종의 기저에는 ‘여래장 사상’이 있다. 이 여래장사상이야말로 선종의 진정한 뿌리라 볼 수 있는데, 주류불교 입장에서 보면 ‘지류’에 불과하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단’에 지나지 않는다.
여래장사상은 동아시아에서 주류불교로 성장하였는데, 그 영향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한물건은 창조주?
그런데 여래장사상의 불교를 들여다 보면 볼 수록 기독교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교TV사이트에서 어느 스님은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한물건입니다. 한물건이 없으면 생각을 못 일으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쓸 때 그때 그때 감정이 얹히는 수가 있다.
기쁠때 한물건이 있기 때문에 기뻐지고, 슬플때 한 물건이 있기 때문에 슬퍼지는 것이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한물건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지 한물건이 없으면 슬픈것도 없고, 기쁜것도 없다.
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천지가 나온 것이고, 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일체중생이 세상에 살게 된 것이고, 뿐만 아니라 산에 가면 나무나 식물들도 모두 한 물건에 의해서 다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서양종교식으로 말하면 창조주이에요, 창조주.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깨닫는다라 말합니다. 선에서 말하면 견성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도를 깨친 것이다 이렇게 말한하는 것입니다.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제1회 한 물건 , 불교tv 2011-11-18)
불교TV에서 스님은 한물건이 서양종교식으로 말하면 ‘창조주’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한물건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나오는데, 그 한물건이 없으면 생각을 일으킬 수도 없고 아무것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도 알지 못한 것
그런 한물건에 대하여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실려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일 것이다.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선가귀감)
이 게송을 보면 앞서 언급한 혜민스님의 글에서 마지막 구절인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와 거의 유사하다.
그 한물건은 부처가 나기 전에도 있었는데, 그 한물건을 부처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부처의 제자인 가섭도 알 리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그 한물건을 모르고 있다는 말과 다름 없다.
그런데 선가귀감의 그 한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장에 실려 있는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와 같은 내용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기독교와 불교의 진리는 궁극적으로 한뿌리이고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오강남교수의 경우 불교평론에서 선불교의 참나와 하나님은 같은 것이라고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진아론적 법문을 듣다보면
선사들의 진아론적 법문을 듣다보면 유일신교의 ‘그분’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어느 스님은 불교TV에서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해주스님이 풀어주는 보현행원품, 제5회 서분4, 불교tv 2011-11-16)”이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법문을 하였다. 이 법문에서 ‘부처님’을 빼 버리고 유일신교의 ‘그분’을 집어 넣으면 기독교의 설교나 불교의 법문은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이처럼 선사들의 법문은 도처에서 마치 기독교의 그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여래장사상의 불교이기 때문이다.
그놈을 찾아 평생을 보냈지만
여래장사상의 불교에서 깨달음은 그놈, 한물건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한물건, 그놈을 찾아서 화두를 드는데 그 기간은 한정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만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 마성, 불교평론 2011-09-01)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간화선 수행을 하여 그놈, 한물건, 불성, 그분을 찾기 위하여 평생을 보내지만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믿고 찾아 나선 것은 아닐까. 진짜 그놈, 한물건, 그분, 불성이 있다면 드러내야 되는데, 일이년도 아니고 10년, 20년,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보내도 찾지 못하였다면 없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적 신심때문일 것이다. 이런 신심이 모든 것을 믿음에 기초하는 유일신교라면 모를까 진리를 추구하는 불교에서는 도무지 맞지 않는 것 같다.
이처럼 선사들이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그놈, 한물건, 불성, 참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결국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유일신교의 ‘그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불교의 깨달음이란
선종을 ‘조교(祖敎)’라고도 한다. 조사스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의 조교는 종교로서의 ‘조교’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조교에 있어서 깨달음은 명백하다. 바로 그놈, 한물건, 불성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보기 위하여 한평생을 거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다르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열반이다. 이처럼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의 깨달음
구 분 |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 |
깨달음 |
깨달음의 시작 |
깨달음의 과정 |
깨달음의 완성 |
과위 |
수다원 |
사다함. 아나함 |
아라한 |
번뇌 |
탐진치 남아 있음 |
탐진치가 소멸되는 과정 |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 |
불교의 깨달음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단계는 견도이고, 두번째는 수도단계, 세번째는 무학도 단계이다.
견도단계의 깨달음을 수다원의 깨달음이라 하는데, 이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이단계는 사성제를 이해하는 수준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꼰단냐 비구는 띠끌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상윳따니까야 :56 삿짜상윳따11, 율장 마하왁가 1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라고 인식하였을때 커다란 ‘인격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이는 중생에서 성자의 계보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즉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수다원의 경우 중생으로 묶어두는 열가지 족쇄중 자아가 있다는 견해, 법에 대한 의심, 잘못된 수행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지만 욕망이나 성냄과 같은 번뇌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수다원이 되면 앞으로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수도단계인데, 이 단계를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라 한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수도에 의하여 사라지는 과정에 대한 단계를 말한다. 이런 수도 단계에서는 오도송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면 열반을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이상 윤회를 하지 않게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아라한의 오도송과 함께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다. 이와 같은 불교적 깨달음과 조교적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놈’이나 ‘그분’이나
선사들은 법문을 할 때 종종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그때 깨달음이란 ‘참나’를 아는 것이라 한다. 이를 진아론적 법문이라 하는데, 어느 선사든지 예외가 없다. 혜민스님 역시 마찬가지이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지만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교의 전통에서 출가를 하였기 때문에 진아론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아에 대한 별칭은 매우 많다. 선가귀감에서는 ‘한물건’이라고 하였고, 어떤 선사는 ‘일원상’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불성, 본마음, 본래면목이라 한다. 이외도 수 많은 표현이 있는데, 이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딱히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것’ 또는 지방어로 ‘거시기’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나에 대하여 선사들이 즐겨사용하는 말이 ‘그놈’이다. 이는 혜민스님도 자신의 글에서 ‘이놈’이라 하여 놈자를 붙였다. 이는 선사들이 몸을 몸뚱이, 몸뗑이, 몸뚱아리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좀 더 설명하기 쉽게 잘 알아 듣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유일신교에도 ‘그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놈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분’이라 부른다. 요한복음1장에 표현 되어 있는 그분은 유일신이라 부르는 것이 ‘인격화’ 된 것을 말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조교에서 말하는 ‘그놈’이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그분’이나 사실상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왜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선언의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2011-8-23 조계종 화쟁위)
선사들은 자꾸 그놈과 그분이 같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법문을 들어보면 결국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때가 많다. 그래서 한국불교에 대하여 ‘대한기독교 OO종’, ‘대한힌두교 OO종’이라 하는 지 모르겠다.
2011-12-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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