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격의 변화를 주는 가르침, 짯따리 아리야삿짜니(사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2. 13. 16:27

 

인격의 변화를 주는 가르침, 짯따리 아리야삿짜니(사성제)

 

 

 

교계인터넷 신문에 따르면 오는 내일 12 14일 조계종 종정스님이 선출된다고 한다. 선출조건으로 승납45, 세납65세 이상이고,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중에서 선출된다고 한다. 현재 세 분의 후보가 거론 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모두 선사들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한국불교는 선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종선 계통의 임제종을 말한다. 임제종은 송나라 때 크게 번창하였는데, 마조같은 유명한 선사를 배출한 곳이다. 그런 선종의 가르침은 매우 독특하다.

 

선종에서는 문자와 언어로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표현 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이는 경전적 전승과는 별도로 부처님으로 부터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승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교외별전이다.

 

또 선종에서는 깨닫기 위하여 마음으로 향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속의 불성을 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20분 넘게 양구(良久)하고

 

이렇게 선종에서는 문자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분별한다고 하여 금하고 있는데, 이런 좋은 예를 인터넷신문의 기사에서 보았다. 이제열법사가 법림법회에서 한 이야기중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제 나이 40살 이전이었던 겨울 성도재일 날, 저는 한 명산대찰에서 열린 대법회장을 찾았습니다. 재가불자들이 2천여 명이 법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대 선지식이라는 큰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여법하게 사자좌에 오른 선지식은 주장자로 세 번 법상을 치더니, 입을 열지 않는 채 양구(良久)하고 있었습니다. 무려 20분이 넘게 양구가 이어졌습니다. 법석에도 고요가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스님은 법문을 다 마쳤다는 듯이 법상을 내려가려고 하셨습니다. 이때 한 납자가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문답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대 자비심을 일으키시어 양구를 멈추시고 개구하시어 감로법문을 설해주십시오.

 

“입을 열어도 30방이요 닫아도 30방이니라. 그러나 산승이 분별해서 말하겠습니다. 석가여래께서 6년 고행 끝에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석가여래는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본 그놈을 본 것입니다. 별은 본 바로 그놈을 보고서 도를 깨친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도 도를 깨치고자 한다면 석가가 별을 본 그놈을 보고 깨쳤듯이 그 놈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방금 석가가 별을 본 그놈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셨는데, 그놈은 어떤 놈입니까?

 

“그놈은 일체 언설을 벗어났고, 빨갛지도 노랗지도, 만질 수도, 찾아볼 수도 없는 놈입니다. 이 놈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부터 있었고,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영원한 놈입니다. 그대의 몸은 사대(四大)로 허망하기 그지없으나 바로 이 한 놈은 생기지도 죽지도 않는 물건이니 이 물건을 보기만 하면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고 홀연히 일체 생로병사를 떠날 수 있느니라.

 

(이제열법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참나가 필요한 것입니까?, 미디어붓다 211-12-09)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참나가 왜 필요한 .docx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참나가 왜 필요한 .pdf

 

 

 

이 글을 보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코메디를 보는 것 같기도하다.

 

대선사가 법상에 올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법상에서 법을 설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선에서는 양구(良久)한다고 한다.

 

그 놈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양구하는 이유는 분별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진리라는 것이 문자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문자를 세우고 말로 표현한다면 진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근기가 낮기 때문에 문자나 말로서 표현을 해 주어야 알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재가자가 “대 자비심을 일으키시어 양구를 멈추시고 개구하시어 감로법문을 설해주십시오.”라고 읍소하듯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선사는 말씀 하시기를 그놈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놈은 어떤 놈일까.

 

기사에서 말하는 그놈은 참나이다. 그런 참나는 여러이름으로 불리운다. 본마음, 본래면목, 한물건, 일원상, 진여, 불성등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견성성불이라 한다. 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 성품이 불성이다. 인도의 부처와 중국의 성품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중국식불교의 불성이 그것이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불성은 우리 마음 안에 내제된 힘으로서, 이 힘을 발견하면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고 믿는 다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진짜 나(진아)가 왜 필요합니까?

 

 

그런데 이런 불성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고 한다. 기사에서 이제열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가 이 법이 삿된 법임을 안 것은 훗날 미얀마 스님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부터입니다. 미얀마 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이 수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참나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법사님, 참나가 있습니까?

 

“아 그럼 참나가 없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

 

“오온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속이나 생각 속에 참나가 존재합니까? 그 속에서 참나를 찾을 수 있습니까?

 

“…, , 찾을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없는 것을 발견하라고 했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찾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스님께선 왜 수행을 하십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니다.

 

“가짜 나를 버리고 진짜 나를 찾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진짜 나(진아)가 왜 필요합니까?

 

“…”

 

“불교의 위대성은 대상을 설정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열법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참나가 필요한 것입니까?, 미디어붓다 211-12-09)

 

 

 

 

 

사진 :

 

 

 

미얀마의 사야도와 나눈 대화를 보면 불성을 추구하는 것은 삿된 법(邪法)’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오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오온에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참나를 찾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느냐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과연 참나를 추구하는 것이 고통을 해결해 주느냐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참나를 찾기 위하여 수행하기 보다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으로 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인격적 변화를 주지 못하는 법문

 

우리나라 선사들은 거의 대부분 진아론적 법문을 하고 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보는 수 많은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참나, 본마음, 본래면목, 불성등 진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런 법문은 현실을 살아가는 재가자에게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한다. 이는 법문을 통하여 인격적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면 이는 인격적 변화로 연결된다. 이런 예는 초기경전에 수 없이 등장한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수다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처럼 법문 한마디의 위력은 대단하다. 부처님의 한마디의 말씀에 중생에서 성자로계보가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격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명법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고통이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이 바로 괴로움이다.

 

(담마짝까경, Dhammacakka Sutta 또는 Dhammacakkappavattana Sutta, 初轉法輪經, SN 56:11)

 

  담마짝까경(初轉法輪經).docx  담마짝까경_初轉法輪經.pdf

 

 

부처님이 누군가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위의 내용과 같이이것이 고통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 사람이 수긍하였다면 그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준 것이다.

 

지금 여기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 어느 누구도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요”라고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설하신 사성제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다

 

이렇게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아는 사람에게 고통이 어떻게 생겨난것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담마짝까경, Dhammacakka Sutta 또는 Dhammacakkappavattana Sutta, 初轉法輪經, SN 56:11)

 

 

부처님이 이것이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은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 아니에요라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즐김과 탐욕 즉, 갈애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 바로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해소하는 방법만 남았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담마짝까경, Dhammacakka Sutta 또는 Dhammacakkappavattana Sutta, 初轉法輪經, SN 56:11)

 

 

부처님이 이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은 누구나 수긍하는 상식이고 동시에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다.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그것은 방식이 아니에요라고 감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면

 

이와 같이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에 대하여 이해 하였다면 이제부터 소멸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여덟가지 방법을 제시하셨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담마짝까경, Dhammacakka Sutta 또는 Dhammacakkappavattana Sutta, 初轉法輪經, SN 56:11)

 

 

부처님이 이것이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방법이다라고 하였을 때 아무도 거역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몸소 실천하여 얻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면 누구나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삶의 현실이고, 삶의 진실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개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서 겪고 있는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Cattāri Ariyasaccāni(짯따리 아리야삿짜니. 사성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 ariyasacca                   둑캄 아리야삿짬

jātipi dukkhā,                                    -띠삐 둑카-

jarāpi dukkhā,                                   자라-삐 둑카-

byādhipi dukkho,                              -디삐 둑코

maraampi dukkha                        마라남삐 둑캄

appiyehi sampayogo dukkho,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piyehi vippayogo dukkho,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얌삣참 나 라바띠 땀삐 둑캄

sakhittena                                     삼킷테나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빤쭈빠--낙칸다-나 둑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samudaya ariyasacca         둑카사무다얌 아리야삿짬

yāya tahā                                   -얌 딴하-

ponobbhavikā                                  포노바위까-

nandirāgasahagatā                            난디라-가사하가따-

tatratatrābhinandinī,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seyyathida—                                 세이야티담

kāmatahā,                                      -마딴하-

bhavatahā,                                    바와딴하-

vibhavatahā.                                  위바와딴하-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nirodha ariyasacca             둑카니로담 아리야삿짬

yo tassāyeva tahāya                       요 땃사-예와 딴하-

asesavirāganirodho cāgo                   아세사위라-가니로도 짜-

painissaggo                                    빠띠닛삭고

mutti anālayo.                                  뭇띠 아나-라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nirodhagāminī                         둑카니로다가-미니-

paipadā ariyasacca                       빠띠빠다- 아리야삿짬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seyyathida—                                 세이야티담

sammādiṭṭhi                                     삼마- 딧티

sammāsakappa                               삼마-상깝빠

sammāvācā                                     삼마---

sammākammanta                               삼마-깜만따

sammāājīva                                      삼마아--

sammāvāyāma                                  삼마---

sammāsati                                       삼마-사띠

sammāsamādhi                                삼마-사마-

 

 

 

2011-12-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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