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상윳따의 다양한 중도사상
초기경전을 니까야라 부른다. 그런 니까야에는 사부니까야라 해서 순서대로 나열하면 디가니까야(Dīghanikāya), 맛지마니까야(Majjhimanikāya),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 이렇게 사부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중 상윳따니까야에 대하여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윳따니까야에 대하여
요즘은 빠알리 경전이 번역되어서 초기경전이라고 말하면 보통 빠알리니까야를 뜻한다. 그런데 초기경전으로서 아함경이 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 아함경 중에 ‘잡아함경’이 빠알리 니까야의 상윳따니까야에 대응된다.
그런데 왜 ‘잡아함경’이라고 하였을까.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경전인데 그경전의 이름앞에 ‘잡(雜)’자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전재성박사의 글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에 대한 경이름 설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쌍윳따는 쌍쓰끄리뜨어의 sam-√yuj의 빠알리어형 과거분사로 ‘[주제에 따라] 함께 묶인 것, 연합된 것, 상응(相應)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한역 대응경에서는 ‘잡(雜)’이라고 번역했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한역 잡아함경의 분류방식이 각 권의 주제와는 상응하지 않는 잡다한 편집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빠알리 성전을 번역한 일본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에서 ‘상응(相應)’이란 한역술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유가(瑜伽, yoga)와 관계된 많은 전문술어의 번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라서 착오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니까야는 쌍쓰끄리뜨적인 어원 자체가 Nikāya로 ‘모임, 모음, 종류, 신체, 주거, 부집(部集)’의 의미를 지닌다. 이 용어에 해당하는 것이 북전에서는 아함(阿含)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아함은 쌍쓰끄리뜨어로 아가마(āgama)를 음사한 것으로 ‘유래, 기원, 재산, 전통, 전승’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쌍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는 ‘[주제에 따라] 함께 엮은 [가르침 또는 경전들의] 모음’이란 뜻을 지닌다.
(전재성박사, 우리말 상윳따니까야)
전박사의 상윳따니까야의 이름에 대한 어원 분석에서 한역 잡아함경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잡아함경에서 ‘잡’이라는 문자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아함경의 편집방식이 주제별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 문자그대로 중구난방이 된 듯한 모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빠알리니까야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주제별로 서로 상응되어 있고 경의 이름또한 상응과 관련된 용어이기 때문에 이름을 ‘상응부경전’으로 붙였다고 한다.
이처럼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상윳따니까야는 서로 관계가 있는 경을 주제별로 모아 놓은 것인데, 총 56개라 한다. 그래서 56상윳따라고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윳따 니까야는 5왁가(vagga, 卷), 56상윳따(saṁyutta, 編), 203왁가(vagga, 品), 2,889숫따(sutta, 經)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별로 분류된 56개의 상윳따중에 두 번째가 인연상윳따이다. 이 인연상윳따에 대한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 박사의 해제글에서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쌍윳따니까야 인연모음 해제
불교는 결코 신비주의를 요청하지 않는다. 불교적인 세계는 측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초자연적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를 반영하는 그야말로 '와서 보라(ehipassika)' 고 할 만한 존재에 대한 경험적 체험에 의해 산출된다. 특히 그것은 마음과 세계에 대한 정신적 수행의 산물로서 인과적 과정의 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법성(法性 : dhammata)
우주적인 인과적 과정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계(法界 : dhammadhatu)라고 한다.
[무외 왕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차를 모는 자로서 전차의 각 부품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전차의 모든 부속품들은 저에게 완전히 숙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즉시 나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왕자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 왕족의 현자, 바라문의 현자, 재가의 현자, 사문의 현자가 질문을 준비해서 여래에게 찾아와 질문하면 그것들은 즉시 여래에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왕자여,
진실로 법계는 여래에게 숙지되어 있으며 여래는 법계를 숙지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곧바로 여래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법계는 인류역사상 붓다에 의해 최초로,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 철저하게 통찰되었다. 붓다는 인과적 작용을 속성으로 하는 사물의 본성을 법성(法性 : dhammata)이라고 표현했다.
공사상(空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
그러나 이러한 붓다의 심오한 진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매우 다양한 해석학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때로는 형이상학적으로 잘못 오해되기가 쉬웠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부파불교적이고 아비달마적인 많은 시도들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찰나멸론(刹那滅論)’이나 ‘원자론’ 쪽으로 기울어지고 우주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서 작용하게 되어, 대승불교적인 공사상(空思想)이 체계화되어 스스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공사상은 연기사상을 더욱 심화시킨 공로는 있으나 지나치게 상대론적 의존관계를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인 생성과 소멸의 인과관계마저 부정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공사상과 상보적(相補的)으로 나타나 유식사상(唯識思想) 또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통해 법계에 대하여 심오한 해석을 부가했으나, 모든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실제와 연관된 사실의 세계를 ‘관념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사상은 인과론적이라기보다는 나타나는 대로 모든 것이 진리라는 ‘현상론자’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기가 쉽다.
연기(緣起)에 관한 오해
오늘날 불교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조차 붓다가 가르친 인과적 과정의 세계, 즉 연기(緣起)에 관해 종종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해왔다.
불교의 인과사상을 연구한 대부분의 서양학자들, 예를 들어 케이스, 케른, 올뜨라마르, 뿌쌩, 토마스, 스체르바스키 등은 불교의 정형화된 인과사상을 단순히 괴로움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불합리성을 갖고 있다.
첫째, 불교에서의 괴로움은 법계의 해탈론적 속성으로 조건이나 조건지어진 ‘연생(緣生)’이라는 사실적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는 불교적 인과관계를 단순히 경과의 인식론적 규칙인 이유에서 찾는다면 형이상학적인 추론에 의한 논리적 관계를 이야기할 뿐이지 존재론적이고 구체적인 생성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불교적 인과관계를 단순히 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 했던 우이 하큐주(宇井伯壽)와 같은 동양의 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
불교적 인과에 대한 오해
한편 불교를 연구한 또 다른 많은 학자들, 예를 들어 케른, 야코비, 피셀, 샤에르 등은 불교적인 인과의 조건연쇄를 쌍키야(sankhya)철학과 비교해서 '우주적인 진화형식' 으로 설명했는데, 이것도 역시 그들이 설정한 최초의 원리가 무명(無明 : avijja)이 아니며 ‘무명조차 조건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빚어진 오해이다.
이러한 붓다의 연기론에 대한 오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면 '인과연쇄는 본질적으로 괴로움의 설명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물리적 원인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한 케이스 같은 학자의 견해일 것이다.
붓다와 불교의 제 문헌은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포함한 과학적 인과론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까. 불교가 우주적인 법성의 원리를 가르친다면 불교적인 인과론이 가장 과학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과학혁명이 시작된 이래
역사적으로 과학의 혁명은 17세기 서구에서 그 이전의 우주에 대한 신 중심의 세계관을 뒤엎으면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새로운 천체물리학적인 우주관으로 바꾸어 놓았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신의 창조라는 세계관을 자연의 다양한 인과적 과정에 의한 진화로 파악하게 되었다.
또한 프로이드에 의한 새로운 심리학의 대두는 불변의 영혼을 찾아내는 대신 인과적으로 조건지어지는 심리적 요소에 의한 역동적인 흐름으로서의 마음을 발견했다.
과학은 인격적인 신을 가정하는 신학적인 설명을 배제한 채 우주적인 인과법칙을 발견했고 그에 따라 진보해왔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도덕 자체도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로써 윤리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가치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진리가 되었다.
이러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신이나 자아와 같은 불변의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 불교적 인과론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자연과학적 인과론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할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과학적 인과론적 진리는 그것이 낳은 1,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환경오염이라는 비극적 결과 때문에 그것이 가져온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밝은 전망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물론 현대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과거의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에 바탕을 둔 거친 유물론은 퇴조하고 있다. 특히 미시세계에서는 강한 인과적 결정이 부정되고 반드시 정신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이 배제되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서 드러나는 자연이다. 삶의 조화에 대한 추구에서 삶이라는 연극 중의 우리는 관객이자 동시에 배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연과학적 인과론은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한 ‘무도덕적인’ 우주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아마도 과학에서 발견되는 인과론 자체를 반성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붓다는 과학적 인과관계를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우주 자체를 전적으로 인간의 입김을 배제하는 무도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현상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작용하는 윤리적 우주의 필연적 귀결이다.
쌍윳따 니까야 2권의 내용
불교에서 이러한 인과의 원리는 연기(緣起 : paticcasamuppada)라고 하는 붓다의 가르침 속에 표현된다.
이 용어는 대 소승을 막론한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는 물론 인도의 비불교학파에서조차 정통성과 역사성을 갖는 인과성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양철학적인 전통에서 발견되는 인과론과 구별되는 불교고유의 인과성의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인과의 세계는 강한 인과적 결정론과 비결정론, 즉 우연을 주의깊게 배격한다.
붓다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자유의지는 결코 있을 수 없고 도덕적 정신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 모든 것이 비결정적이고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실제의 세계에서 가능한 도덕적 정신적 성장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
불교의 연기론에서는 이러한 중도적 인과작용을 통해서만 물리적 세계에서도 참다운 생성과 소멸의 구체적 세계가 전개된다고 본다.
이러한 원리를 부처님의 직설로써 전개하고 있는 초기의 경전군을 모아 놓은 것이 이 쌍윳따 니까야 2권이다.
붕게의 준인과론(semicausalism)
최초의 불교적 전통과는 동떨어진 서양의 현대 과학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붕게는 강한 인과적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난점을 피하기 위해 비록 인과율이 타당한 영역이라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제한하고 결정론과 우연론도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준인과론(semicausalism)’을 주장했다.
그는 근 현대의 경험과학의 법칙과 이론을 연관지어 [인과성과 현대과학]이라는 저술에서 인과율은 전통적인 인과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그렇다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버려야 할 신화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과관계는 흄 자신이 스스로 주장했듯이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의 범주와 연관된 문제이므로 선험적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과관계를 경험적으로 다루었지만 감각인상만을 인정하여 인과관계를 순전히 논리적 필요성의 문제로 환원시킨 것은 흄 자신의 자가당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들의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논리실증주의 이후 인과관계는 논리적이고 언어분석적으로 다루어져왔지만, 그 결과 하나의 신화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붕게는 인과관계에 관해서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경험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그는 결정론과 우연론의 중도로서 다소 절충주의적이긴 하지만 준인과론적 입장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의 준인과론은 보다 포괄적으로 다루어진다면 붓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조건발생과 조건소멸
그는 흄의 인과율에 관한 공식인 '만일 C이면 언제나 E이다' 에 산출성의 원리인 '만일 C가 생겨나면 그것에 의해 언제나 E가 생겨난다' 를 부가하여 구체적인 존재론적 생성의 세계의 인과관계를 정초시켰다.
이러한 원리는 붓다가 초기경전에 조건적 발생, 즉 연기의 원리를 설명한 '만약에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다. 만약에 이것이 생겨나면 곧 저것이 생겨난다(若有此卽有彼 若生此卽生彼)의 원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뿌생은 이러한 서양의 과학적 인과론과 불교 사이의 유사성에 관해 '고대의 황색 법의를 입은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은 인간에 대한 현대적 이론들, 흄이나 트레인같은 많은 과학자들의 이론과 아주 가깝게 일치한다' 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적 연기론에서는 과학적 인과론에서 단순히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취급되는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저것이 없으며, 만약에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이 소멸된다(若無此卽無彼 若滅此卽滅彼)의 원리가 인과율의 공식 속에 포함되어 있다.
초기불교에서 그것은 인과의 의존성을 강화시키는 원리만이 아니라 사실적인 조건연쇄의 소멸에 적용되는데, 자연과학적 인과론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것은 불교적 인과관계가 물리적 현상을 고립시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을 수반하는 정신물리적 전체의 인과를 해탈론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생겨난다.
여기에 바로 인과성의 원리가 수반론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그렇게 해서 바로 사성제(四聖諦)의 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주석서에 의지하지 않아도
이러한 초기불교에서의 인과원리는 부수적으로 과학철학이 당면하고 있는 무도덕적 인과율의 위기를 해소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 독일의 인도학자 그라제납은 붓다가 세계의 자연적 질서는 곧 도덕적 세계와 동일하다는 깊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붓다가 설한 인과론과 붕게의 과학철학적 인과분석의 개념적 도구를 원용하여 불교의 인과개념을 분석한 것이 본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한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이란 책이다.
여기서 필자는 초기불교의 경장에 나타난 인과론을 다루기 위해 주석적인 아비달마 전통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새로운 관점에서 과학철학적인 몇몇 개념을 사용하여 경장을 직접 다루었다.
까루나라뜨네는 초기불교의 인과성에 대한 연구에 관해 '정통적인 초기불교의 인과론적 가르침을 발견하는 일은 주석서에 주어진 아주 발전된 이론을 연구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고 했다. '진정한 역사적 방법은 [빠알리 경장(Nikaya)]에 나타난 가능한 초기불교적 인과론을 연구하면서 주석서의 해석을 될수 있는 대로 최소한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라고 언급한 것은 필자를 매우 고무시키는 일이었다.
호프만이 심지어 초기불교를 합리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주석서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제한이 아니라 방법론적인 불가피성이다' 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가장 오래된 초기의 경전군 가운데 하나이며 불교의 중심사상을 다루고 있는 이 [쌍윳따 니까야] 2권의 위대한 가치를 더욱 드러내는 것이다.
인연상윳따의 다양한 중도사상
이 [쌍윳따 니까야] 2권은 [제12쌍윳따 인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연 쌍윳따]는 12연기의 인과연쇄에 대한 설명과 비유로 구성된 93개 경전의 모음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부처님의 핵심사상인 연기설을 설명하고 있는 경전군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압권이다. 특히 연기의 일반적 원리인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과 12연기, 그리고 그러한 연기의 원리가 중도사상에 입각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초기경전에서 붓다가 제시하는 중도사상은 대승불교에서 용수(龍樹)가 제시하는 팔부중도(八不中度)보다 다양하고 풍요롭다. 이 쌍윳따니까야 2권을 비롯한 초기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의 다양한 중도사상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유무중도(有無中道)
첫째 유무중도(有無中道)가 언급되고 있다.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존재인 유(有)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無)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자타중도(自他中道)
둘째 자타중도(自他中道)가 언급되고 있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이와 같은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lineality)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단상중도(斷常中道)
셋째 단상중도(斷常中道)의 연기가 언급되고 있다.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 생성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일이중도(一異中道)
넷째 일이중도(一異中道)의 연기가 언급된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다른 것입니까?"
"모든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도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바라문이여, 이들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는 현상계의 동일성과 차별성이 모두 부정된다.
거래중도(去來中道)
다섯째 그밖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의 쌍쓰끄리뜨 복원본 가운데 거래를 부정한 거래중도(去來中道)의 연기가 나타나 있다.
"수행승들이여, 눈(眼)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
여기서 분명히 인과관계가 궁극적으로 거래(去來)라고 하는 근접성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요즈음 발달된 과학철학의 이론에서도 드러난다.
생멸중도(生滅中道)
여섯째 다른 초기경전인 [우다나]에서는 생멸중도(生滅中道)가 괴로움의 종식인 열반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것을 온다고도 간다고도 머문다고도 소멸한다고도 생기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의처(依處)가 없고 전기(轉起)가 없고 대상(對象)이 없으므로 이것이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나는 설한다"
고락중도(苦樂中道)
일곱번째 [초전법륜경]에는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원리가 팔정도와 관련해 잘 나타나 있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감각적 쾌락에 의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은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두번째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은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적정, 승지(勝智), 등각(等覺), 열반으로 이끈다."
이처럼 초기경전의 연기법은 대승불교의 용수의 중도설보다 풍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철학박사 전재성 識
201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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