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지를 얻을 수 있다면, 절벽에서 몸을 날린 설산동자와 무상게(無常偈)
보살의 삶이란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보살로 사셨다. 디빤까라붓다(연등불)로 부터 미래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후에 4아승지겁하고도 10만겁동안 바라밀행을 실천하며 살았는데, 이와 같은 보살로서의 삶은 범부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이었다. 그런 보살로서의 삶에 대한 특징 몇가지를 들면다음과 같다.
첫째, 보살은 삶의 목적이 뚜렸하다.
셋째, 보살은 용기가 있다.
넷째, 보살은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간다.
보살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용기를 가진 자라 한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는데, 그런 용기는 삶의 목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체지를 얻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담은 경전이 자따까(본생담)에 실려 있다.
절벽에서 몸을 날려
자따까중에 부처님이 보살로서 삶을 살았을 때 일체지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투신(投身)설화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설산동자’라는 청년수행자로 살던 때 이야기이다.
어느 날 수행자가 산속에서 좌선중에 있었는데 어떤 노래가 들려 왔다. 그 노래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니 태어나 죽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네”
수행자는 이 노래소리를 듣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런데 뒷 구절이 잘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우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매우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나타나서 “내가 지금 배가 고프다. 노래가 더 듣고 싶으면 고기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수행자는 자기목숨을 주기로 하고 마지막 구절을 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나찰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나고 죽는 그 일마저 사라져버리면 거기에 고요한 즐거움이 있네.”
이 구절을 듣자 수행자는 마음의 지극한 평화를 얻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찰의 먹이가 되기로 하였다. 그래서 절벽에서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이때 나찰은 갑자기 제석천으로 변하여 그의 몸을 받아 살려내었다.
대승열반경에도
이것이 자따까에 실려 있는 투신설화라 한다. 그런데 이런 투신설화에 실려 있는게송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불교경전에 실려있다는 것이다.
불교경전 중에 열반경에도 설산동자의 투신설화가 실려 있다. 내용은 자따까에 실려 있는 내용과 동일하다. 그 게송을 한문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諸行無常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니
是生滅法 태어나 죽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네
生滅滅已 나고 죽는 그 일마저 사라져버리면
寂滅為楽 거기에 고요한 즐거움이 있네
석지명스님은 이 게송을 ‘설산게(雪山偈)’라 하였다. 그런데 이 게송은 절집안에서 매우 유명한 글이라 한다. 그래서 널리 외우고 있는데 이 게송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꽃이 피면 반드시 지고
사람은 나면 반드시 죽는다.
꽃과 낙엽, 삶과 죽음을 한꺼번에 놓아 버린다면
고요한 가운데 열반의 즐거움만 있으리.
그런데 이 게송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과정에서 일본어로 된 것도 찾을 수 있었다.
花は咲いてもたちまち散り、
人は生まれてもやがて死ぬ。
無常は生ある者の免れない運命である。
生死を超越してしまへば、 もう浅はかな夢も迷ひもない。
そこにほんたうの悟りの境地がある。
(『教科書の歴史』 唐沢富太郎 創文社)
출처 : http://www.geocities.jp/yasuko8787/z016.htm
쿠가이대사의 ‘이로하의 노래’
또 이 설산게는 일본에서도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밀교 진언종의 개조인 ‘쿠가이(空海)’대사는 ‘이로하의 노래’로 의역하여 불렀는데, 일본글자인 가나 50개를 하나도 겹치지 않게 하면서도 그 50개를 다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이로하의 노래를 인터넷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いろは歌
いろはにほへと ちりぬるを
わかよたれそ つねならむ
うゐのおくやま けふこえて
あさきゆめみし ゑひもせす
(출처: 일본어판 위키백과, いろは歌)
이 노래는 일본문자 히라가나로 표기 되어 있다. 그런데 문자수는 50개 아니라 47개이다. 같은 문자가 겹치는 경우는 없이 모두 다른 문자로 되어 있다. 이로하가에 대한 석지명스님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색은 풍성해도 지고 마는 것,
이 세상 그 누구가 무궁하리오.
유위의 깊은 산을 오늘 넘어서,
얕은 꿈을 한 꾸리. 취함도 없이.
대승열반경에서
대승열반경에서 설산게는 불성에 대해서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석지명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산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피는 꽃이 반드시 진다고 해서 피는 꽃을 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피어나는 꽃에만 목숨을 걸면 죽음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꽃의 피고 짐에 상관없이 전체를 한꺼번에 목숨으로 살자는 것이다. 그 전체의 목숨이 바로 불성의 ‘나’가 아니겠는가. 그 꽃목숨의 산을 넘는 곳에 생멸을 지운 다음의 고요를 즐기는 경지가 나타날 것이다.
(석지명스님, 불교교리강좌, 설산동자의 무상게)
대승 열반경은 불신상주(佛身常住).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을 특징으로 한다. 부처님은 항상 계시고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에 드는 것에 대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설명하였다. 설산게에의 적멸위락(寂滅為楽)에 대하여 “고요한 가운데 열반의 즐거움만 있으리”라고 표현한 것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에서
설산동자에 나오는 설산게는 부처님이 부처를 이루기 전에 보살로서 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체지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그 게송을 듣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무상정득각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한량없는 세월동안 보살행을 닦은 후에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마침내 무상정등각을 이루게 된다. 이 무상정등각이 과거 모든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이는 나고 죽는 법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삼장에서 보는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설산동자의 설화에 나오는 무상게가 역시 실려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반열반하시자 반열반과 함께 두려움과 공포의 전율을 일으키는 큰 지진이 있었으며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세존께서 반열반하시자 반열반과 함께 사함빠띠 범천은 이런 게송을 읊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필경에는 몸을 내려놓는구나.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스승힘을 갖추셨고 바르게 깨달으신 여래그분도 이처럼 반열반하시는 구나!.”
세존께서 반열반하시자 반열반과 함께 신들의 왕인 삭까는 이런 게송을 읊었다.
“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
일어났다가는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이 행복이로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 D16, 여섯번째 바나와라-여래의 반열반)
마하빠리닙바나경에 있는 게송과 대승열반경에 실려 있는 게송과 내용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대승열반경은 한문으로 된 것을 번역한 것이고, 마하빠리닙바나경에 있는 것은 빠알리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마하빠리닙바나경에 있는 내용은 대승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의 개념과 다르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고 표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적멸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적멸하고 난 다음의 상락아정한다는 것과 다르다.
상윳따니까야 웨뿔라빱바따경에서
위 무상게는 초기경전인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나마딱가 상윳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띠바라 사람에게는 빠찌나방싸
로히땃싸 사람에게는 방까까
쑵삐야 사람에게는 쑤빳싸
마가다에서는 베뿔라라 불렸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
(상윳따니까야 SN15-20. 웨뿔라빱바따경-Vepullapabbata Sutta, 전재성박사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아나마딱가 상윳따_S15_.pdf
이 게송은 부처님이 뼈의 산인 웨뿔라산에대하여 이야기 하시며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에서 신들의 왕 삭까가 읊은 게송과 동일하고, 또 설산동자 설화에서 본 게송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이 게송을 읊은 이유는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염오, 이욕하여 해탈하여 다시는 나고 죽는 윤회를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뼈들의 산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게송에 대한 것을 빠알리어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niccā vata saṅkhārā, 아닛짜 와따 상카라
Uppādavayadhammino. 웁빠다와야담미노
uppajjitvā nirujjhanti,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tesaṃ vūpasamo sukho 떼상 우빠사모 수코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
적멸 그 자체가 행복
부처님의 전생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보살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살이 아직 무상정등각을 성취하기 전까지 자신의 몸을 바쳐 진리를 구하는 장면중 중의 하나가 설산동자 설화이다. 이때 들은 나찰로 부터 들은 게송은 열반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대승열반경에 표현되어 있듯이 ‘상락아정’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런 적멸은 영원하고(常), 행복하고(樂), 자아(我)이고, 깨끗하다(淨)한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무엇이 잘못된 견해일까.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하는 견해
무아에 대해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견해
괴로움을 행복이라 하는 견해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는 견해
부처님은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는 한 결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띠라서 초기경에서 표현된 무상게는 적멸후의 상락아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적멸하는 것 그 자체가 행복으로 본다. 이는 망갈라경에도 잘 표현 되어 있다.
Tapo ca brahmacariyañca ariyasaccānadassanaṃ,
Nibbānasacchikiriyā ca etaṃ maṅgalamuttamaṃ.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망갈라경-Mangala Sutta- The Great Auspices-행복경, 숫타니파타-Sn 2.4와 쿳다카파타-Khp 5)
망갈라경(행복경-빠알리-영어-한글).docx 망갈라경_행복경-빠알리-영어-한글_.pdf
2011-11-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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