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선업(善業)을 강물처럼,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소금덩이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1. 23. 16:07

 

 

선업(善業)을 강물처럼,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소금덩이경, A3.99)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 전반부이다.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한점 부끄럼없게 살기를 바랐다. 히지만 삶의 과정에서 부끄러운일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움 없는 무균질의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어서야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다음 생을 생산을 할 업을 짖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가 있다. 그런 과거는 좋았던 것도 있고 나빴던 것도 있다. 선업도 있고 불선업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 좋지 않았던 기억을 떠 올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후회하고 아쉬워 하고 회한에 젖어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마음이 항상 과거에 가 있는데, 좋았던 기억 보다 좋지 않았던 기억이 더 많이 난다고 한다.

 

이렇게 항상 과거 속에 산다면 이는 불선업을 짖는 것으로 본다. 과거를 회상하는 대부문이 후회이기 때문이다. “그때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하였을까하며 후회해 보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때 당시의 조건과 지금의 조건이 맞이 않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후회해 보았자 아무 이득이 없는 것이다.

 

악처로 인도하는 해로운 마음

 

후회함으로 오히려 불선업만 짖게 되는데, 이런 후회는 해로운 마음부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해로운 마음부수는 불선업을 짖게 하여 결국 악처로 인도한다. 그런 해로운 마음부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다음의 14가지가 있다.

 

 

해로운 마음부수(akusala-cetasika) 14가지

해로운 반드시들 4

해로운 때때로들 10

 

탐욕에 관계된 3

성냄에 관계된 4

해태에 관계된 2

 

의심 1

(14) 어리석음

(, 모하, moha)

(18) 탐욕

(, 로바, lobha)

(21) 성냄

(, 도사, dosa)

(25) 해태

(懈怠, 티나, thina)

(27) 의심

(, 위찌깟차, vicikaccha)

(15) 양심 없음

(無慙, 아히리까,

ahirika)

(19) 사견

(邪見, 딧티, ditthi)

(22) 질투

(, 잇사, issa)

(26) 혼침

(昏沈, 밋다, middha)

 

 

(16) 수치심 없음

(無愧, 아놋땁빠,

anottappa)

(20) 자만

(, 마나, mana)

 

(23) 인색

((), 맛차리야, macchariya)

 

 

 

(17) 들뜸

(掉擧, 웃닷짜,

uddhacca)

 

(24) 후회

(惡作, 꾸꿋쨔, kukucca)

 

 

출처; 아비담마 길라잡이, 진흙속의연꽃 편집

 

 

표와 같이 해로운 마음부수는 14가지 이다. 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나타나는 것 4가지, 탐욕에 관계된 것 3가지, 성냄에 관계된 것 4가지, 해태에 관계된 것 2가지, 의심 1가지 이다.

 

이중 후회는 성냄과 관계있는 해로운 마음이다. 후회의 감정이 일어 날때 성내는 마음도 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14가지 해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왜 나쁜 것일까. 그것은 이들 마음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악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악처로 인도하는 해로운 마음은 늘 일어난다. , 귀 등 여섯감각기관이 형상, 소리 등 여섯감각대상에 부딪칠 때마다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때 해로운 마음부수와 관련되었다면 불선업을 짖게 된다. 내 돈 3000만원 떼 먹고 달아난 사람이 마음에 갑자기 떠 올라 그 인간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그때 왜 내가 똑바로 하지 못했을까하는 후회의 마음이 일어난다면 불선업을 짖게 되는 것이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을 괴롭혔다면 그 것으로 행위가 끝난다. 그에 대해서 화를 낸 행위는 있었으나 그 불선업은 지나가 버린다. 그런데 10년 후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 칠 수 있다. 이럴 경우 만나기 이전까지 업이 전혀 작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 조건이 형성되면 내가 저질렀던 악행이 드러날 수 있다. 이를 업력이라 한다. ‘업의 잠재력이라는 뜻이다.

 

업은 의도이기 때문에 제행무상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졌지만, 그 업이 아직 조건을 만나지 않아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에 조건이 성숙할 때까지 업력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업력 즉, 업의 잠재력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업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야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업보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는 것이다.

 

업을 짖는 자, 업을 받는 자

 

업은 의도이고 의도는 52가지 마음부수중의 하나로서 행온에 속한다. 이 의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다. 마음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업을 짖는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업을 짖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선한 마음이 일어났다면 선업을 짖는 것이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났다면 불선업을 짖는 것이다. 업을 짖는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업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업을 지었으면 즉시 과보를 맺는 경우도 있고, 업은 사라졌지만 그 업력이 남아서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과보를 맺는다. 그 과보가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오온이 일어나는 것이다. 업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어떤 과보를 받는 자가 있어서 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업을 짖는 자도 없고 업의 과보를 받는 자도 없다. 이 말은 결국 실체 즉,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것,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업은 업을 짖는 자와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없다고 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제 그에게는 모든 존재와 모태와 태어날 곳과 거주와 거처에서 오직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일어나는 정신 · 물질만이 드러난다. 그는 원인의 배후에 다른 짓는 자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과보가 일어나는 것 이외에 과보를 경험하는 자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원인이 있을 때 '짓는 자'라 하고 과보가 일어날 때 '경험하는 자'라고 (세간에서) 통용되는 명칭으로 현자들이 인습적으로 표현할 뿐이라고 바른 통찰지로 바르게 본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19)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법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지, 그 배후에 업을 짖거나 경험하거나 받는 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

 

,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에서 통용되는 말이고, 통찰지로 바르게 보면 그것은 인습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통찰지에 대한 게송이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 이것이 바르게 봄이다.

이와 같이 업과 과보가 원인과 함께 나아갈 때

씨앗과 나무 등처럼 그 시작을 알 수 없다.

 

미래의 윤회에서도 [업과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외도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하여

그들의 견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중생이라는 인식을 가져

영원하거나 허무하다고 보아

서로서로 모순되는 62가지 견해를 가진다.

견해의 올가미에 묶인 그들은

갈애의 흐름에 떠밀려가고

갈애의 흐름에 떠밀려간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는 초월지로 이 심심하고

미묘하고 공한 조건을 통찰한다.

과보에 업이 없고, 업에 과보가 없어

그 둘은 각각 공하지만

업이 없이는 과보가 없다.

마치 태양과 보석과 소똥 속에

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밖에 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연료들로부터 생기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업 속에 과보가 없고

업을 떠나서도 없고

업이 과보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업은 과보가 공하고

업에 과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업을 의지하여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길 뿐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 따라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20)

 

 

 

 

업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조건이 되면 언젠가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업을 짖는 자도 업고, 과보를 경험한 자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고, 창조주도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원인과 조건에 따라 순수한 법들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이렇게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너무 많은 불선업을 저질러 왔는데

 

그런데 이제까지 너무 많은 불선업을 저질러 왔을 경우 앞날이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업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예로서 초기경전에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A3.99)’이 있다. 우리 말로 소금덩이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이 조금 밖에 없는 잔에다. 소금덩이를 넣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 잔에 있는 적은 물은 이 소금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그 물잔속의 물이 조금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가 강에다 소금 덩이를 넣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강은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세존이시여, 그 강가강은 많은 물의 적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소금 덩이로는 마실 수 없이 짜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The Salt Crystal:소금덩이경, 앙굿따라니까야 AN 3.99 PTS: A i 249  Thai III.101)

 

  로나팔라경(소금덩이경 A3.99).docx  로나팔라경_소금덩이경 A3.pdf

 

 

 

 

 

 

salt

 

 

 

 

소금 한 주먹을 밥그릇에 집어 넣고 물을 부으면 소금은 매우 짤 것이다. 그런데 이 소금 한주먹을 한강에 집어 던지고 나서 그 강물의 맛을 보았을 때 어떠할까. 한강물이 짤 리가 없다. 비슷한 예로서 소금 한덩이를 악업에 비유할 수 있다.

 

 

악업한덩이가 있을 때 선업을 쌓아 놓지 못한 자에게 악업은 매우 크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선업을 많이 쌓아 놓은 자에게는 악업이 그다지 많이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악업을 지은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변에 선업이 많다면, 악업의 익는 것을 선업이 방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팔이 잘릴 과보가 있었을 경우 가벼운 상처만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똑같은 악업이라고 해서 항상 똑같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의 상황과 조건과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선업을 강물처럼

 

그렇다면 선업보더 악업을 더 많이 쌓아 놓은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선업을 쌓는 것이다. 최소한 악업을 쌓은 것 보다 선업을 더 쌓아야 한다. 더 나아가 선업을 강물처럼 만들어 버리면 악업이 익어 비록 과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약간의 악업을 짓지만 그 업은 그를 지옥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약간의 악업을 짓지만 지금여기에서 다 겪는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털끝만큼도 그 과보가 없을 것인데 어찌 많을 것인가?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 The Salt Crystal:소금덩이경, 앙굿따라니까야 AN 3.99 PTS: A i 249  Thai III.101)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업에 대한 오해를 알려주기 위한 가르침이다. 업에 대한 대표적 오해중의 하나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모두 전생의 업보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잘 되면 불보살의 가피라 말하고, 잘못되면 액땜한 것이라 말한다.

 

이런말을 하는 것은 외도들이 말하는 숙명론과 다름없다.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외도들의 주장에 대하여 부처님은 삿된 견해로 간주하고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다음생에 털끝만치도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여러가지 원인과 조건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같은 업이라도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조건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소금덩이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악업을 지어도 그업이 지옥에 인도할 정도가 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선업을 많이 쌓은 어떤 이에게는 현세에서 다 겪기 때문에 다음생에 털끝만치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1-11-23

진흙속의연꽃

로나팔라경_소금덩이경 A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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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팔라경(소금덩이경 A3.9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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