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선(禪)적 깨달음이란? 신성한 알아차림(靈知)과 회광반조(廻光返照)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1. 21. 13:18

 

 

()적 깨달음이란? 신성한 알아차림(靈知)과 회광반조(廻光返照)

 

 

 

세 명의 스타스님

 

불자들이 즐겨듣는 방송이 ‘BBS불교방송일 것이다. 그런 불교방송에 세 명의 유명한 스님이 있다. 일반적으로 스타스님이라고 불리우는 성전스님, 월호스님, 정목스님이다.

 

이들 세 분의 스님은 방송프로를 진행하는 MC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 있는데, 그래서일까 이들 스님들을 따르는 팬 역시 매우 많다. 그래서 이들 스님들이 공개방송이나 특별행사에 출연하는 날 그야말로 불자들로 넘쳐나는데, 이들 스님들의 인기 만큼이나 하는 말에 대한 영향력도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스님중에 정목스님이 있다.

 

치유의 기도문에서

 

정목스님은 요즘 주말에만 방송에 출연한다.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 7시에 방송하는 마음으로 듣는 음악이다. 이 프로에서 스님은 불자들을 위한 치유의 기도문을 낭송해 준다. 그런 기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몸과 마음 정신 어디에 함께 있든 우리의 모든 고통이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 속에 녹아 들게 하소서.

 

(정목스님, BBS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치유의 기도문에서)

 

  치유의_기도.docx  치유의_기도.pdf

 

 

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은 매우 생소한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라는 용어가 대유행인 것은 아마도 유일신교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런 기도는 대게 타력적이고 유신론적이다. 마찬가지로 정목스님의 기도문 역시 타력적이고 유신론적이라 볼 수 있다. 단지 그 대상이 불성일 뿐이다. 그런 불성에 대하여 밝고 투명한 빛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성과 광명

 

밝고 투명한 빛으로서의 불성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정목스님은 방송의 말미에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립니다”라고 말하고 마지막 멘트를 날리고 있다.

 

이는 불성이 인격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성하고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올리자고 한다. 불자라면 당연히 부처님(Buddha)’가르침(Dhamma)’‘성자들의 상가(Sangha)’ , 불법승 삼보에 귀의해야 마땅하나 불성앞에 경배올리자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방송프로의 성격이 선불교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불성의 특징은 광명이다. 너무 밝아 눈이 부시어 쳐다 볼 수 없을 정도이고, 또 모든 것을 투과해 버릴 정도로 강한 빛으로 묘사된다. 이런 광명을 체험하면 깨닫는 것일까.

 

 

 

 

 

 

사진 : http://www.true-enlightenment.com/enlightenment.html

 

  

 

왜 깨달은 자가 나오지 않는가

 

올해도 동안거가 시작 되었다. 그래서 100여개의 선원에서 2,200여명의 납자들이 용맹정진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마다 두 차례씩 열리는 안거기간에 수 많은 스님들이 정진하지만 막상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불교평론에서 도법스님의 글을 빌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도법 스님은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고 탄식하고 있다.

 

(마성스님,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불교평론 2011 9 1)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docx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pdf

 

 

이 글을 읽어보면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수 십만명이 안거기간동안 용맹정진하지만 정작 깨달았다는 소식을 듣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그마나 그것도 깨달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어떤 것이길레 스님들이 10, 20, 30, 평생을 선방에서 공부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한달 열흘이면 타파할 수 있다는데

 

간화선을 주창하였던 대혜종고스님(1089~1163)에 따르면 ()’자 화두로 일상생활에서 잠시라도 놓지 말고 공부를 하다 보면 한달 열흘, 40일정도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 하였다. 또 무비스님은 불교TV사이트의 서장강의 (무비스님의 서장특강 6)에서 화두는 3일이면 타파할 수 있고 길어야 7일간다고 하였고, 아무리 아둔한 자라도 한철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선방을 다녀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불교TV의 버스웰교수의 강의(제18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 하였다.

 

 

한국에서 선()의 시작은

 

9세기 말 경에 선이 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다. 이때 한반도에도 주요 선문들이 전승된다. 바로 구산선문을 말한다. 아홉개의 산악종파라는 뜻이다. 그런데 9개중 7개가 나중에 임제종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중국선종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임제종은 송나라 때 크게 번창한다. ‘홍주산문이 있는데, 구산문중 7개 산문의 선사가 홍주산문 출신인 것이다. 마조같은 유명한 선사를 배출한 곳이다. 이 산문이 한반도에 선을 본격적으로 전승하는데, 법랑은 이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스님이다.

 

그런 법랑은 7세기 말의 스님이다. 그의 법맥이나 인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의 뒤를 잇는 인물은 9세기에 가서야 등장하게 된다. 매우 큰 공백이 있는 것이다.

 

만약 법랑이 실존 인물이어서 선을 한반도에 들여오고 금강삼매경을 썼다면, 선종의 세력을 넓히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9세기가 되어서야 선이 한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기 때문이다.

 

구원론적 성격으로서의 선()

 

한편으로 경전적 전승과는 별개로 부처님과 직접 이심전심으로 전승을 받았다는 산문들이 있다. 이는 선종이 당시 주류불교와 스스로를 차별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새로운 불교종파는 시대와 완전 분리된 진공상태에서 동시에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대 동아시아 불교종파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비루한 세속이 어떻게 깨달음의 장이 있을 것인지, 깨달음이 세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 가까이 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런 관심은 선종에도 반용되었다.

 

선종은 가르침과 별외의 전승을 받았다고 하지만, 선 수행의 많은 부분이 불교 가르침을 재구성하여 동아시아인들에게 직접 와 닿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중국, 한국, 일본인들을 위한 것으로 본다. 이런 공동의 유산은 선의 가장 기본적인 구원론적 사상을 통해 표현된다.

 

 

달마대사가 썼다고 알려져 있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직지인심은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라는 뜻이고, 견성성불은 본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게송이다. 달마대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훨씬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달마대사가 한 말은 아니지만 교외별전불립문자와 함께선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견성성불과 여래장사상

 

교외별전과 불립문자가 교학종파와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면,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은  선종의 독특한 구원론을 담고 있다. ,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어떻게 부처님의 마음 그 자체와 다시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본래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는 이것은 무엇일까? 무슨 성(, nature)이 있는가? 부처를 이루기 위해 보아야할 성품은 무엇인가?

 

아마 이 게송을 보자마자 여래장에 대해서 생각이 날 것이다. 여러 면에서 여래장사상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 이미 우리 마음 안에 타고난 불성의 정수가 수동적, 혹은 적극적 형태로 존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불성을 재발견하여 각자가 부처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불성은 우리 마음 안에 내제된 힘으로서, 이 힘을 발견하면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견성성불은 이러한 여래장사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신성한 알아차림, 영지(靈知, numinous awareness)

 

선불교도 화엄종의 기초가 되는 불교전통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비록 선이 교학(특히 화엄종)과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선과 화엄종은 같은 여래장 사상에서 나온 근본적 통찰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본래 성품이란 무엇일까? 보면 부처를 이루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 성품을 이야기할 때 밝고, 빛나고, 맑은, 수행을 통해 얻는 마음의 명징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음의 근본적 맑음은 스님들의 마음은 빛이난다라는 유명한 싯귀로 표현이 되는데, 이는 빠알리어 경전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여래장 사상이 이 빠알리어 경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본래의 성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른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신성한 알아차림, ‘영지(靈知, numinous awareness)’를 말한다. ‘()’은 영적인, 영혼의, 등의 뜻이다. ‘Numinous’는 이 ()’자의 영어번역이다. ()는 보통 지식을 뜻하지만 이 맥락에서는 일반적인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마음에서 이 나온다!

 

영지의 의미는 유정의 근본적 성질로 우리의 마음에서 빛을 발하며 우리의 감각,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비추어 우리가 이런 것들을 알게 해준다고 한다.

이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은유도 아닌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우리 사는 세상을 아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유정(有情) 그 자체, 의식 그 자체는 마음이 발하는 빛으로 외적인 감각영역을 비추어 이 감각영역에 있는 대상의 자각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시각영역을 밝게 비추어 외부의 대상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한다. 유사한 빛이 귀에서도 나와 청각영역에 있는 대상을 비추어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감각기관에서 다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의 감각대상이 감각기관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불교 전통에서는 마음의 유정이 감각을 통해 외부로 투사되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감각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임제의현같은 스님도 수행자들은 지금 바로 모든 사물을 생생히 비추어 세상을 지각하며 삼계의 존재에 이름을 부여한다고 하였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만물을 밝게 비추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모두 유정을 지녔기 때문에 세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만 감각을 가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어느 정도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세상을 지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잠재성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증거로 보는 것이다. 이 깨달음의 자질은 생생한 빛의 근원으로 너무나 밝아 바깥으로 투사되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불성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유정 그 자체가 깨달음의 한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명상이란

 

선불교에서 명상수행을 통해 마음을 개발한다는 것은 이 빛나는 자질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항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자질을 말한다. 지금은 아직 약해 우리가 그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는 정도이지만, 이 빛을 더 밝게 하여 여기 형광등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탐조등 정도가 된다면, 그 빛이 너무 강하여 빛이 사물을 통과할 정도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회중전등을 비추면 사물을 볼 수가 있지만, 만약 아주 강력한 회중전등을 손바닥으로 막으면 빛이 손바닥을 통과할 것이다. 아주 밝은 회중전등이면 가능하다.

 

마음이 수행을 통해 점점 더 빛이 나면 타고난 밝음이 더욱 더 강해진다고 한다. 이 밝음이 강해지면 대상을 투과할 정도로 빛을 발하며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본질을 공성으로 본다. 따라서 마음의 빛이 아주 강해지면 감각을 통해 빛이 뿜어져 나와 지각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우리가 보통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의 거대한 공성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original face)이란

 

선종이 알아차림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부처님으로 부터 조사들을 거쳐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선종이 본래면목(本來面目, original fa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본래면목이 부처님에서 시작하여 조사들에게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부처의 마음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유정이다. 따라서 바로 이 순간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 우리 주변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각자 모두의 마음 안에 내재한 불성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영지, 신성한 알아차림으로 돌아 올 수 있을까? 종밀선사(780-840, 당나라, 화엄종5)의 글이 있다.

 

부처를 이룬다는 것

 

종밀은 한국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승이다. 그는 알아차림, ()라는 이 한 단어가 모든 경이의 원천이라 하였다. 외부의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외부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경이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외부적 현실의 근원은 불성 그 자체, 마음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종밀은 수행자가 외부로부터 시작하여 빛의 근원인 내부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반조(返照, trace radiance )’라는 개념이다. , 외부의 차원에서 시작할 수 있다.

 

보통 유정은 감각을 통해 바깥으로 향하여, 외부를 비추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는데, 이 빛남을 자신에게로 돌려 마음의 중심을 비추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늘의 햇살을 보고 그 햇살을 따라 빛의 근원인 태양을 보면 너무나 밝아 쳐다 볼 수도 없다. 햇살은 볼 수 있지만 태양 그 자체는 너무 밝아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본다. 역시 밝게 빛나는 마음의 중심에서 빛이 바깥을 향해 발산되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준다. 그 빛을 외부 세계에서 시작하여 되돌이켜 따라가, 그 근원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게 되면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승인 유일이 사용한 비유이다.

 

이 같이 빛나는 마음의 중심이 바로 영지이다. 늘 바깥으로 빛을 발하여 여기 있는 사물을 볼 수 있게끔 한다. 이 빛을 안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를 다른 말로 회광(廻光)’이라고 한다. 빛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다. 빛의 방향을 돌려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조이다. 그러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한다. 빛이 태양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빛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선불교는 영지와 영지를 통해 지각되는 외부 대상과의 차이를 이용하여 여러 불교 전통의 가르침을 설명하였다.

 

보석(jewel)과 칠흑(blackness)의 비유

 

종밀은 이 영지와 외부 감각 세계와의 차이를 보석(jewel)과 칠흑(blackness)과의 차이로 비유하였다.

 

밝게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시꺼먼 타르에 집어 넣으면 보석의 빛은 칠흑같은 타르에 완전히 가려지게 될 것이다. 타르는 도로에 까는 아스팔트 같은 물질이다. 여러 불교 전통이 부처님의 사상과 수행을 묘사하는 방식이 이 보석과 암흑의 은유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

 

빛나는 보석은 보석을 둘러싼 타르의 암흑을 반영하여 완전히 시꺼멓게 보인다. 망상으로 가득 찬 평범한 중생의 마음도 마찬가지이어서 영지가 착각과 어둠으로 보일 것이다. 과연 보석을 둘러싼 타르로 인해 보석자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둘 사이에 다른 관계가 존재할까? 종밀이 이 비유를 다르게 사용한 예도 있다.

 

어떤 종파는 보석이 타르 속에 있으면 타르로 완전히 시꺼멓게 가려져 타르를 깨끗이 씻어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보석의 타고난 광채가 회복될 것이다. 따라서 타르안에 다이아몬드가 다시 빛나려면 타르를 제거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르고 씻어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타고난 광채가 회복되는 것이다. 타르가 모두 제거되면 주변의 다양한 색채를 반사하며 밝게 빛을 낼 것이다. 이 모델은 테라와다불교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북종선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들은 보석에 묻은 검정 때가 실제 존재하며 여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본다. , 마음의 번뇌는 그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 번뇌가 깨끗이 제거되어야만 마음의 타고난 광채가 회복되는 것으로 본다. 번뇌는 실체가 있으며 이를 제거해야만 마음의 타고난 광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한 종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보석이 타르로 덮여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종파도 있다. 보석도 타르도 모두 공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중론학파가 여기에 해당된다. 선종의 우두종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모든 것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깨달음과 번뇌도 모두 공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 둘은 모두 공하기 때문이다.

 

종밀은 이러한 접근법이 기능이라는 측면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마음의 정수가 무엇인지에만 집중하여 마음이 주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석은 공한 것이다. 하지만 보석과 타르로 덮인 보석은 큰 차이가 있다. 그 기능이 아주 다른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공하다고 간단히 선언해 버리는 것만 가지고는 마음의 광채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종밀은 선종 홍주산문의 가르침이 보석과 타르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보석이 타르이고 타르가 곳 보석인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문제는 시커멓게 덮이지 않은 보석과 시커멓게 타르가 덮인 보석은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기능의 문제로 돌아온다.

 

회광반조와 선불교의 수행

 

종밀은 따라서 이상적인 은유로서 보석은 원래 광채를 타고 났고 보석에 타르의 검정색이 비추어지는 것은 이 타고난 광채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해되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보석은 광채를 타고 났으며 이 광채는 타르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타르의 검음에 실제적인 차원에서 대응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실존하는 검음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타고난 광채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밀은 그 방법이 바로 반조라고 주장하였다. 내 주변 세계에서 시작해서 빛을 그 근원으로 되돌려 마음의 본성을 비추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이 시사하는 것은 수행을 할 때 이런 것들, 외부의 번뇌를 제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타고난 광채를 회복하기 위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 외부로 향했던 이 빛을 그 근원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의 본성을 보게 되고 부처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선불교가 수행을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는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른 관점이다. 그 차이점중 하나는 선불교가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교학적인 전통, 특히 화엄같은 전통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선은 수행의 경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는데 훨씬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교학종파들의 복잡하고 장황한 철학적 사상 보다는 선은 깨달음의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은유를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키워드는 광명

 

이상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녹취하여 살펴 보았다. 이 강의에서 키워드는 광명이다. 밝고 투명한 빛이 마음에서 나와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으로 인식하였을 때 선불교적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동시에 부처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빛을 느끼는 방법중의 하나가 회광반조기법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선불교의 깨달음은 빛과 매우 관련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와 방송의 마지막 멘트에 보였던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이나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이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와 같이 선불교의 수행은 내안의 신성한 빛, 밝고 투명한 빛을 보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체험을 하지 못하면 깨달음도 얻을 수 없고, 동시에 부처도 이룰 수 없다고 하는데, 과연 이 경계에 다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해마다 두 차례씩 수십년간 수십만의 운수납자들이 안거를 하며 용맹정진하여도 얻기 힘든 경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의 현상일 뿐인데

 

하지만 수행중에 빛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많이 전해져 온다. 그런데 단지 빛을 보았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부처를 이루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전에 나에게 이와 같은 광명이 일어난 적이 없다. 확실히 나는 도에 이르렀고, 과에 이르렀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아님에 대한 청정 107)

 

 

 이는 수행자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빛을 보고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 믿는 것이다.하지만 이는 수행의 과정에 있어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광명뿐만아니라 희열, 경안, 결심, 분발, 행복, 지혜, 확립, 평온, 욕구등 10가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10가지 경계라 한다. 마치 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빛을 보는 것이 도가 아니고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숙련되고 슬기롭고 경륜이 있고 지성을 갖춘 수행자는 광명 등이 일어날 때 나에게 이런 광명이 일났구나.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 따라 일어났고,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고,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고, 빛바래기 마련인 법이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라고 이와 같이 그는 통찰지로 한계를 정한 뒤 면밀히 조사한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아님에 대한 청정 126)

 

 

청정도론에서는 빛등 10가지 경계를 보았을 때, 이를 단지 현상으로 보라고 한다. 그런 현상의 특징은 무상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 빛, 행복, 희열등과 같은 경계에 머물면 결코 도와 과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그런 현상을 무상, , 무아로 보아 빨리 빠져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10가지 경계는 어느 단계일까

 

그렇다면 이런 경계는 초기불교수행에 있어서 어느 단계에 속할까. 칠청정과 16단계 지혜의 도표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계청정

(sīla visuddhi)

 

 

2

마음청정

(citta visuddhi)

 

 

3

견청정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

(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

(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

(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

(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

(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

(anuloma ñāna)

6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

(gotrabhu ñāna)13

7

지와 견에 의한 청정

(ñ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

(magga ñāna)

15

과의 지혜

(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

(paccavekkhaa ñāna)

2011-10-20 진흙속의연꽃

 

 

 

 

위의 표에서 광명등 십경계는 칠청정에서 다섯 번째 단계인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임을 알수 있고, 16단계 지혜에서는 세 번째 단계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단계는 도와 과를 이루는데 있어서 극복해야 될 단계이다. 즐기면서 안주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수행의 과정 중에 빛을 보았다거나 행복, 희열, 평안 등을 느꼈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볼 수 없고, 이는 도가 아닌 것이 도처럼 보이는 것으로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간화선 수행을 통해 깨달은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에 집착하여 이를 깨달음으로 여기고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 믿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처럼 보인다. 이처럼 도에 이르지 못하고 도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최근 종교전문기자가 쓴 글에서 마성스님의 글을 빌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마성 스님은 “간화선 수행을 통해 깨달은 자라고 자처하는 선사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아집과 집착에서 비롯된 행위를 할 때, 후학들은 간화선 수행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며 “선사들은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실현할 수 없는 공허한 언어의 나열이나 삶과 유리된 깨달음에 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조현기자, 수행 따로, 따로 한국불교 선승들, 휴심정)

 

  수행 따로 삶 따로- 한국불교 선승들.docx  수행 따로 삶 따로- 한국불교 선승들.pdf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국불교에서 깨달았다고 하는 선사들의 이해하지 못할 행위가 사실은 깨닫지 못한 것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불교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깨달음은 탐진치의 소멸로 인한 열반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였을 때 부처님의 깨달은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방법에 대하여 잘 요약해 놓은 것이 청정도론에서 볼 수 있는 칠정정과 16단계의 지혜이다.

 

이런 수행은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국불교에서 선수행의 목표는 다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환상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정견(正見)’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정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구동성으로 본래면목을 보는 것이라 한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면목을 사실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본래면목을 알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미 우리는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이 설한 정견은 이와 다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정견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선불교와 초기불교에 대하여 표현하였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라고 정의돼 있어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라고 밝혔다. 그는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깨닫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마성스님,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불교평론 2011 9 1)

 

 

마성스님은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정견을 바로 세우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탐진치등으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여 열반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때 초기불교에서 정견은 사성제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불교에서의 정견은 본래면목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와 초기불교의 정견이 서로 다르다 보니 그 결과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선불교에서는 밝고 투명하고 신성한 불성의 빛을 보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 하고, 또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만 도법스님의 지적대로 아직까지 그런 경계를 맛 본 선사들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바로 그런 경계는 빤냣띠(paññatti, 槪念)’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념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명칭과 이름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글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환상이라고 하였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정견을 바로 세워야 수행이 엉뚱한 길로 접어 들지 않고 헤메이지 않는다고 한다. 선사들이 10, 20, 30, 평생수행을 해도 이루는 것이 없다면 이는 정견이 잘 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세워 교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면 불교집안에 찾아 오는 사람들을 붙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하여 설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인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혜문스님은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스님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가고 있는 수행의 길에 자신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피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스님들이 해야 하는 수행과 공부를 하지 않고 무위도식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혜문스님,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알기쉬운 불교강좌 2011-11-17일자)

 

 

 

 

2011-11-21

진흙속의연꽃

수행 따로 삶 따로- 한국불교 선승들.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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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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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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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_기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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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_기도.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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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따로 삶 따로- 한국불교 선승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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