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아의 특징은, 표준한글반야심경과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1. 12. 15:45

 

무아의 특징은, 표준한글반야심경과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

 

 

 

 

반야심경 탁본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반야심경 탁본이다. 10년 전 해인사 경내의 판매점에서 사온 것이다. 그 때 당시 반야심경 탁본 뿐만 아니라 금강경 탁본도 사왔는데, 금강경의 경우 첫 부분에 해당되는 법회인유분에 관한 것이었다.

 

 

 

 

반야심경 탁본

해인사 팔만대장경

 

 

 

반야심경과 금강경 탁본을 여러장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액자를 만들어 벽에 걸어 놓기도 하였다. 그런 반야심경은 단순히 하나의 경이라기 보다 일종의 부적이었고, 행운을 상징하는 것이고, 장식품이었다.

 

대승불교의 정수

 

반야심경을 대승불교의 정수라고 말한다. 그래서 법회가 시작될 때 대승불교의 정수 반야심경을 봉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독송이 시작된다. 이 때의 반야심경은 해인사 탁본에서 보는 것과 같은 한문반야심경이다.

 

260여자로 이루어진 한문반야심경은 불자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모든 불교 행사에서 독송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누구나 반야심경을 외워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반야심경을 외울 줄 아는지 모르는지로 판단하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문반야심경은 매일 독송하지 않으면 설령 외웠다고 할지라도 어쩌다 한번 법회에 참석하다 보면 잊어 버리기 일쑤이다. 또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뜻도 모르고 주문외듯이 독송하기 쉽상이다. 이처럼 어려운 한문투의 반야심경에 대하여 좀 더 친숙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최근 한글반야심경이 공표되었다.

 

조계종의 표준한글반야심경

 

조계종에서 지난 10 13일 표준한글반야심경을 공표 하였는데, 앞으로 모든 불교행사에서 표준한글반야심경을 독송할 것이라 한다. 이어서 칠정례나 천수경등 예불문에 대한 한글화 작업도 추진할 것이라 한다. 그런 표준한글반야심경은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조계종 한글 반야심경 전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3)

 

 

이것이 한글반야심경이다. 한글의 글자 수를 세어 보니 제목과 주문 세 번을 포함하여 모두 484자이다. 한문 반야심경 260여자와 비교하여 거의 두 배가 된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글반야심경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외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뜻도 모르는채 독송하는 한문과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한글로 되어 있으니 일단 뜻을 알고 독송하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다.

 

뜻도 모른채 외는 한문반야심경은 주문과 같은 것이었으나 뜻을 알고 외우니 불교가 조금은 쉬어진 것 같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계종의 한글반야심경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그것은 반야심경의 원래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못했다고 하는 비평이다. 특히 ()’에 관해서 그렇다.

 

공중무색에 대하여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라고 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한문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물질도 없고~”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공이라는 것이 어떤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의 입장 즉, 공성(空性)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공성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라고 자신만의 해석본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 것은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도처에 재해석을 요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대승불교의 정수를 모아 놓은 반야심경을 한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너무 뜻풀이 식으로 번역하다 보면 운율도 맞지 않고 산만해지기 쉽다. 그렇다고 단지 한문자체 풀이식으로 번역하다 보면 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

 

이래 저래 한글화 작업은 말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반야심경이 너무 심오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 반야심경 자체가 어렵게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반야심경의 핵심은 무엇일까.

 

반야심경이 방대한 반야부 경전을 축약하여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반야심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이에 관하여 서림스님은 천장사 카페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경전의 한글화 목적은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한다. 경을 한글화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후대에 만들어진 반야심경 대신에 照見五蘊自性皆空 너무나 잘 표현해 내고 있는무아의 특징 경을 독송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본다.

 

(서림스님, <종단 표준본 한글 반야심경> 유감 )

 

 

글에서 반야심경을 이해하려면 조견오온개공을 아는 것 부터라 하였다. 더 정확하게는 조견오온자성개공(照見五蘊自性皆空)’이다. 오온이 아니라 오온자성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 뜻만 정확하게 알면 반야심경의 뜻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

 

이제까지 불자들은 불교를 너무 어렵게 접하였다. 뜻도 모른채 한문경전을 독송하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불교를 신봉하고 있지만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반야심경은 대승반야사상의 핵심에 대한 경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 뜻이 난해하기 그지 없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자 아니면 ()’자 행렬이다. 그리고 그 뜻을 좀처럼 알 수 없는 ()’자도 여러번 등장한다.

 

이렇게 비(), (), ()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야심경을 불자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어려운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첫번째 단계가 바로 오온이 공한 것을 아는 것이라 한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아의 특성에 대하여 잘 표현한 것이 무아의 특징경(S22.59)’인데, 이 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아의 특징경은 어떤 것일까.

 

무아의 특징경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보여진다. 상윳따니까야서 22번째인 칸다상윳따(Khandha-samyutta) 59번째 경이 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 또는 Pañcavaggi Sutta, The Discourse on the Not-self Characteristic 또는 ive Brethren)이다.

 

통제권 밖에 있는 내 몸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난 후 두 번째로 설한 경이라고 한다. 첫 번째 경은 사성제와 팔정도가 언급되어 있는 초전법륜경이다. 두 번째 설한 것이 바로 이 경인데, 이는 오온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아일 수 밖에 없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온이 왜 무아일 수 밖에 없을까.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 The Discourse on the Not-self Characteristic, 상윳따니까야 S22.59, 전재성박사역)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docx 아낫따락카나경_무아의 특징경.pdf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 빠알리 챈팅

 

 

 

이 말뜻은 무엇일까. 이는 나의 몸과 마음이 나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지배력이 없다는 말이다.

 

만약 이 몸이 내 것이라면 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몸이 아팟을때 몸이 진정한 내 것이라면 절대 아프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 상관없이 마음 뿐이지 몸은 계속 아프다.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없는 생각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내 몸은 나의 통제력 바깥에 있고, 그 몸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없다. 따라서 나의 몸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이 이렇게 통제불능이라면 마음은 어떨까. 부처님은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 The Discourse on the Not-self Characteristic, 상윳따니까야 S22.59, 전재성박사역)

 

 

이는 오온 중에 의식에 관한 것이다. 의식 또한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의식이 내 것이라면 내가 바라는 되어야 하지만,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생각이다.

 

생각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의지대로 생각을 하는 것은 극히 일부이다. 나머지는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생각이 조건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에 대해서 통제할 수 없어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이런 현상은 물질과 의식 뿐만아니라 감수(수), 지각(상), 형성(행)과 같이 오온이 모두 해당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라 하여 이 아낫따락카나경의 내용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면서 대화를 다음과 같이 이어 나가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 The Discourse on the Not-self Characteristic, 상윳따니까야 S22.59, 전재성박사역)

 

 

오온이 나의 지배력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결국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라고 부처님은 설명하고 있다. 나를 포함하여 형성된 모든 것들이 무상, , 무아임을 문답식으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차근 차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염오, 이욕, 해탈

 

이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부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어느 경에서나 볼 수 있는 상용구로서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 The Discourse on the Not-self Characteristic, 상윳따니까야 S22.59, 전재성박사역)

 

 

이는 염오, 이욕, 해탈을 말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것, 나의 자아라고 인식하였을 때 괴로움이 발생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제자들은 오온에 대하여 염오, 이욕하면 해탈할 것이라 한다.

 

아라한의 오도송

 

이 부분은 반야심경에서 구경열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해탈하게 되었을 때 열반하게 되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되는데, 이 때 사용되는 상용문구는 다음과 같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 게송을 흔히 아라한송이라 한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의 오도송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루어졌을 때 깨달은 순간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게송과 유사한 것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에 있는 주문일 것이다.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스와하

 

어떤 이는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주문을 외울 때 감격한다고 한다. 이는 반야심경의 내용을 완전히 알았을 때 가능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주문에 대하여 한글반야심경에서는 한문투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주문에 대하여 원래의 음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 산스크리트어로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스와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주문의 뜻은 무엇일까.  

 

대승불교에서 주문은 원래 해석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진언의 뜻을 범부의 사량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번역을 하면 진언이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의 주뮨을 번역하면 구도자의 입장과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구도자의 입장

(중생) [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

 

가신 이여! 가신 이여! 피안으로 가신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신 이여! 깨달음을 이루신 이여! 영원하소서.”

[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

 

깨달은 자의 입장

(부처) [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

 

건너갔네, 건너갔네. 저 언덕에 건너갔네. 저 언덕에 모두 다 건너갔네. 깨달음을 성취했네.”

[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

 

참고: 목탁소리(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

[출처]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스크랩 불교 인터넷방송]|작성자 무별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

 

마찬가지로 초기경에서도 아라한송을 보면 반야심경의 주문 못지 않게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이 아라한송에 대한 빠알리어 표현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khīā jāti,                       키나 자띠

vusita brahmacariya,     위시땅 브라흐마짜리양

kata karaīya nāpara   까땅 까라니양 나빠랑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잇탓따야띠 빠자니띠띠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SN III_utf8, 1. 2. 1. 7, Pañcavaggiya sutta)

 

 

이는 깨달음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선언하는 것이다.

 

친절한 부처님

 

무아사상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사상이라 한다. 이제까지 지구상에 나타났던 그 어느 종교도 무아를 주장하지 않았다. 모두 나가 있다거나,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였지 나가 없다고 주장한 종교나 사상은 없었고, 오로지 부처님만이 주장한 것이다. 이런 독특한 무아사상을 불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이라 하여 무아사상과 관련된 용어가 등장하고 이어서 색수상행식에 대해서도 공한 것이라 하여 역시 무아에 대하여 이야기가하고 있지만 무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초기경에서는 너무나 친절하게 무아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 S22.59)에서 보는 것처럼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님을 설명하였는데,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다섯가지 무더기로 분해하여 설명하였다. 그래서 물질()에서 부터 감수(), 지각(), 형성(), 의식()으로 구분하여 이들이 나의 것이 아님을 설명 하였다. 그 예로서 이렇게 되라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하였을 때 그렇게 되지 않으므로 내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오온이 통제되지 않고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아니고, 내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불자들이 한문으로 된 어려운 경전이나 또는 한문을 번역한 한글경전을 읽는 대신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런 부처님은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지켜 보거나 삼매에 든 부처님이 아니라 경전을 들여다 보면 언제든지 만나 볼 수 있는 친절한 부처님이다.

 

 

 

 

2011-11-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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