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나의 불교를 위하여, 원효스님의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爭)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28. 17:48

 

 

 

하나의 불교를 위하여, 원효스님의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爭)

 

 

 

 

 

 

 

 

정견(正見)이란 무엇일까

 

정견(正見)이란 무엇일까.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거나 알고 있는 팔정도의 정견을 떠 올릴 수 있지만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이와 다르다.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은 정견에 대하여 한결같이 본래 부처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이와 같은 정견에 대한 견해는 불교tv사이트에서 선사들의 법문이나 좌담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불교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우스님은 정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지금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아나운서와 저가 지금 쳐다보면서 느낌도 가지고 알기도 하고 하는 이 주인공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불성이다 또는 진여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만 그건 하나의 이름이고 실체하고는 다른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두가 다 조금도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성을 다 가지고 있다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하는 이런 모든 기능적으로나 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내용들이나 부족해서 몰라서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 같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심즉시불이라 즉 내 마음이 본래 부처다 지금 중생심에 허덕이는 이 마음을 부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참으로 우리의 본래 청정한 마음은 부처님이나 우리는 똑 같다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설우스님, 선승에게 길을 묻다. 제19 설우스님(청주 법인정사 선원장), 불교tv)

 

 

이렇게 선사들은 내 마음속의 본래 부처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의 정견은 이와 다르다.

 

정견이 서지 않으면

 

불교tv사이트에서 일묵스님은 정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바른 견해를 이야기 하는데, 이는 지혜에 해당합니다. 정사유는 바른 생각입니다. 수행의 순서로 보면 계정혜가 맞지만, 혜를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수행을 할 때 방향성을 분명히 잡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어떤 방향을 수행을 할 것인가는 정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신다면 수행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먼저 정견에 대한 올바른 이해하고, 그에 맞게 단계 단계를 밟으면서 수행을 하면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데, 정견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이 중구난방이 됩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2 팔정도란 무엇인가?, 불교tv)

 

 

부처님이 정견을 강조한 이유는 수행의 방향성을 잡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팔정도에서 정견을 가장 먼저 세운 이유가 올바른 수행을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런 정견이 서지 않으면 수행이 방향성을 잃고 중구난방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견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견은

 

정견은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라 한다. 정견으로 부터 시작해서 정견으로 마무리 되기 때문에 정견을 세우고 계정혜를 닦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정견은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정견인가?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이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마하사띠빳타나경-Mahasatipattha sutta-대념처경, D22)

 

 

마하사띠빳타나경에서 말하는 정견은 바로 사성제를 말한다. 사성제를 알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정견이라는 것이다. 이는 선사들이 말하는 정견과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선사들의 정견(正見)

 

선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본래 우리의 마음, 본래면목, 진여, 불성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선사들의 정견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도법스님의 글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가 정견(正見)이다.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가 바로 정견이다. 정견이 그대로 부처의 견해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친 다음 더욱 향상 발전해서 부처의 견해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만일 정견 말고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다. 수행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지금 여기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 직면한 존재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고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인 것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docx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pdf

 

 

도법스님이 표현한 정견은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이해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본래부처 외에 따로 있다고 고집한다면 전도몽상의 견해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도 전도몽상일까. 왜 선사들이 이와 같은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버스웰 교수의 강의에서

 

불교TV사이트에서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들어 보았다. 두 회에 걸쳐 강의한 내용(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11, 12)을 여러 날에 걸쳐서 녹취하였는데, 이는 한국불교의 선사들이 주장하는 본래부처, 본래면목, 불성, 진여의 유래에 대하여 알기 위함이다. 

 

초기불교가 소개 되기 이전이라면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 그리고 이를 통합한 원효의 일심사상이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겠지만, 인터넷과 정보통신이 발달한 이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비교하여 불자들이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정보통신시대의 커다란 혜택이라 볼 수 있다.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근간으로 하여 좀 더 이해 하기 쉽도록 도표와 설명을 보충하였다.

 

7세기의 원효는

 

7세기의 원효는 그 때 당시 신라에 들어 와 있던 여러 불교전통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사상과 수행체계를 추구했다. 이 단일 체계를 만들기 위해 원효는 여러 불교전통을 참고 하였다. 대표적으로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들 수 있다. 먼저 여래장 사상이다.

 

여래장(如來藏, tathagatagarbha, 따타가따가르바)의 유래

 

여래장은 영어로 tathagatagarbha(따타가따가르바)’라 하는데 이는 영사전에도 나오는 불교용어이다. 원래 산스크리트어이지만 영어단어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자로 如來藏(여래장)’이라 표기 한다. 여기서 ()’은 저장고, 보고라는 뜻이고, 자궁, 자궁 내부의 내용물을 뜻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가르바가 이 모든 뜻을 가진다. 따타가따는 부처님을 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서 진리에 이르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래장은 깨달음의 자궁(Bhddhahood embryo), 태아라는 뜻이 된다.

 

이 여래장 사상은 주류 불교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대승불교, 특히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여래장은 마은은 본래 순수한 광명이나 후천적으로 번뇌에 물들어 본연의 순수함이 가려진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런 여래장은 어디서 유래 되었을까.

 

빠알리 경전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다고 한다. 쿳다까니까야(소부)에 실려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마음에 대해 말씀하시길 마음은 본래 빛나는 것인데 외부의 번뇌에 오염되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승려들이여,

마음은 본래 광명이나 외부로 부터의 번뇌에 오염되었으니,

승려들이여, 마음은 본래 광명이니 외부로 부터의 번뇌를 정화해야 하느니라.”

 

 

부처님은 이 구절을 통해 마음은 본래 흠 없이 깨끗하고 명징하나 이러한 명징함은 마음의 순수함을 가리고 있는 번뇌가 제거되어야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하지만 이 번뇌는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어서 마음의 본성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마음은 항상 광명이고 명징하나 우리가 번뇌 때문에 그것을 못 볼 뿐이라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

 

이러한 접근법은 초기불교에서는 다소 예외적이라 한다. 특정 순간의 마음의 상태는 행동의 결과로 보는 믿음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 마음의 순수함, 혹은 비 순수함은 그 순간의 생각이나 행동에 달린 것이라는 믿음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이 초기불교의 주요경전 즉, 빠알리 삼장에 나오지만 초기불교, 특히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라 한다.

 

심지어 이런 접근법을 담은 구절을 빠알리삼장에서 삭제하려는 의도적 시도가 있었던 증거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주류 불교에 잘 맞지 않는 일종의 변칙이론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대승불교, 특히 여래장 사상을 통해 체계적으로 발전된다.

 

여래장의 수동적해석과  능동적 해석

 

따타가따 즉, 부처는 불성의 완전한 측면으로 볼 수 있고, 가르바는 자궁이나 태아에 관한 뜻이다. 이 가르바는 수동적으로도 능동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가르바를 단지 부처의 자궁으로 본다면 현상의 세계에 내제된 절대적 측면의 즉각성이 강조된다. 이것은 진리, 부처가 모든 중생안에 있지만 번뇌에 가려져 있는것을 말한다. 부처가 있지만 수동적으로 존재하며 어떤 촉매를 통해 구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능동적으로 본다면 가르바는 자궁, 저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인 배아, 태어도 포함된다. 이는 적극적인 해석이다. 불성, 따타가따는 중생의 마음속에서 성숙되고 있다. 태아의 형태로 마음속에 존재하며 깨달음을 촉진하게 된다. , 수동적으로 촉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촉매이고 궁극적으로 깨달은 부처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장을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하지만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이 두 시각 모두 깨달음 즉, 광명이 마음의 타고난 본성이고, 이를 가리고 있는 번뇌는 외부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 바깥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평범한 중생, 깨닫지 못했으며 욕심, 증오, 망상 등 각종 번뇌를 가진 여기 있는 우리 대부분이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이미 깨달은 부처로 보는 것이다.

 

여래장에서 깨달음이란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번뇌가 너무나 강렬하고 만연해 있어 안개를 뚫고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번뇌는 일종의 안개처럼 우리의 진짜 모습, 우리가 깨달은 부처님을 못 보도록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 깨달음은 현 상태를 변화, 변성시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진 본연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 뿐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새로 창조되는 것, 새로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늘 이 자리에 존재하던 것,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라 한다. 따라서 깨달음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는 잘못된 생각만 내려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깨달음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번뇌는 마음 바깥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망상은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마음이 욕심, 증오, 무지에 물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욕심은 무집착으로, 증오는 자비심으로, 무지는 지혜로 변환시켜야만 한다는 것이 초기 주류 불교전통의 수행체계의 기본이다. , 세속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열반으로 향할 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래장은 번뇌가 실존하는 마음의 현실이며 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 착각이고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라고 주장한다. 여래장 사상은 이것이 우리가 범하는 근본적인 오류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보통 이러한 번뇌가 마음에 내재하는 것으로 믿고 여기에 대응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여래장 사상은 이러한 번뇌가 마음 바깥에서 온다고 본다. 따라서 단지 마음의 자연스런 상태가 드러나도록 허용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만 하면 깨달음에 다다른다고 말한다.

 

여래장사상의 문제점

 

여래장은 무지한 보통의 중생도 매 순간마다 깨달음에 즉시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여러 생, 무한겁,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무한 겁이 세 번 반복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는 망상을 내려놓기만 하면 깨달음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의 문제는 중생이 왜 애초에 자신들이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라면 우리가 왜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래장사상에는 여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여래장 사상은 평범하고 망상에 빠진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잘 보여주지만, 어째서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가진 깨달은 존재들이 스스로를 무지한 중생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에 종교학에 신의론()’이라고 부르는 문제가 발생한다.

 

기독교의 신의론(神義論)처럼

 

신의론은 서구의 유대-기독교 용어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은 절대선(絶對善)’이고, 따라서 모든 악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절대선인 신이 만물를 창조했다면 어떻게 세상에 악이 존재할까. 말이 안된다. 불교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중생이 깨달은 존재라면 어떻게 자신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을까. 기독교에서는 신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실수로 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깨달은 존재이지만 우리가 망상을 만들어 냈다고도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망상이 생겼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이 신의론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중의 하나는 대승불교의 경쟁종파이었던 유식학파에서 나온다.

 

유식(唯識, Yogācāra, 요가짜라)이란

 

유식(唯識, Yogācāra, 요가짜라)은 영어로 오직 마음뿐(Consciousness only)’, ‘거울표상등으로 번역된다. 유식은 특별한 종류의 의식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신의론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아뢰야식, 장식(藏識)이라고 한다. 만법연기의 근본이 된다하여 본식이라고도 한다. 음역하여 아라야식이라고도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마음은 다양한 종자를 담고 있는 일종의 저장고이다. 이 종자는 행동, 결과로 자라게 되는데, 선업의 종자뿐만 아니라 악업의 종자도 있다.

 

본생적으로 망상에 빠진 존재

 

중생은 끝없이 윤회하며 수 없이 많은 행위를 한다. 따라서 마음에는 무수히 많은 악업의 종자가 내재한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인간은 본생적으로 깨달았다기 보다 본생적으로 망상에 빠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내적인 촉매가 아니라 외적인 촉매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님의 법문, 경전염송, 불교에 대해 배우는 등의 변성의 과정을 촉발할 외적 촉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래장과 달리 유식사상은 마음의 순수성을 본생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마음의 종자가 타버리면

 

총능변(摠能變) 과정이 완성되면 아뢰야식이 청정한 의식인 무구식, 아말라식으로 바뀐다고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번뇌로 가득 찬 아뢰야식이 청정한 무구식으로 바뀌어 깨달음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유식사상은 우리가 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마음의 변성과정은 본질적으로 불과 같아 마음속의 모든 종자를 모두 태운다고 한다. 곡물저장소에 꽉 찬 곡물을 태워버려 발아하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마음의 종자가 타버리면 미래에 악업으로 자라날 수가 없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 마음이 오염된 의식에서 순수한 의식으로 변성되는 과정이다.

 

상반된 두 이론

 

이 두 가지 이론은 상호모순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이다. 유식은 왜 망상이 생기는지 설명하고 있다. , 무지의 근원을 말하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마음이 원래 순수하고, 깨달은 상태란 마음이 본래적이고 내재적 성품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은 본생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식에서는 깨달음이란 외부의 촉매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음은 스스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외재적이라는 것이다.

 

여래장 사상에서는 마음이란 본래 순수하고, 유식에서는 마음은 본래 더럽혀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래장 사상에서 더러움, 번뇌는 외부에서 온것으로 보지만, 유식에서는 내재된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래장과 유식의 상반된 이론

 

여래장사상

유식사상

마음

본래 순수

본래 더럽혀져 있음

번뇌

외부에서 온 것

내재된 것

깨달음

깨달음은 본생적

외부의 촉매제필요, 외재적

 

 

 

원효가 마주한 문제는

 

이 두 사상체계를 분석해 보면, 둘 다 대승불교이지만 불교에 대해 가르치는 바는 완전히 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원효가 마주한 문제이었다. 이 두 종류의 불교가 그의 생전에 함께 신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원효는 이 두 대승불교전통경전 양쪽 모두에 대해 주석서를 썻다. 여기서 원효는 이 두 개의 가르침을 하나로 융화시키고자 하였다. 하나의 신앙체계속에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두 가지의 가르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원효로 보아서는 큰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로 합쳤을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Awakeness of faith)에서 통찰을 얻고

 

그것은 신앙의 일깨움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가진 대승불교에 관한 책의 도움을 받았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Awakeness of faith), 신앙의 일깨움이라는 제목이다.

 

이 책은 아주 중요한 논서로서 여래장사상과 유식의 관점을 둘 다 수용하여 써진 책이다. 원효는 이 글을 통해 여래장사상과 유식을 통합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통찰을 얻었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이란 어떤 책일까.

 

대승기신론은 아마도 중국에서 저술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인도의 유명한 대승불교 승려인 아스바고사 즉 마명보살의 원본이 인도에서 들어와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씩이나 중국어로 번역된 책이라고 주장되어 왔지만 학계에서는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대승기신론이 원래 중국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인도가 기원이고 마명보살의 저서라는 것은 허위라는 것이다.

 

그 이유야 어떻든 대승기신론은 원효를 포함하여 특히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원효는 바로 이 대승기신론을 통해서 대승불교 전통 내의  서로 다른 두 이론에 대한 융화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원효는 넓은 관점에서 불교를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저술에서 이 개념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 개념은 바로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것으로서 마음은 하나이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다.

 

한마음(一心, one mind)이란

 

한마음(一心, one mind)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이란 진여문(眞如門, true suchness) , 참된 그러함과 생멸문(生滅門, production & cessation) , 생겨나고 없어지는 마음의 측면이다.

 

우리가 절대적인 관점에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즉, 절대적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본질적인, 본연의 상태일 때 마음은 단순히 그러하다라고 묘사된다. 바로 한자어 ()’자의 뜻이다. 따라서 진여는 진실로 그러함, 마음의 절대적 상태를 말한다.

 

근원적으로 순수한 본질적인 상태, 마음의 정수를 뜻한다. (, essence), 마음의 정수 그 자체로 진실하고 순수하고 영원불변하며, 마음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절대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보는 마음의 그러함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음은 바로 부처라고 한다.

 

그러나 똑같은 마음을 통상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관점을 절대적(absolute)인 것과 통상적(conditional)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음과 세상만물은 연기법에 따라 창조와 파괴의 대상이 된다. 이는 마음의 본질적인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옳다고 볼 수 있다.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은 단지 그러함일 뿐이다. 절대적 진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통상적, 상대적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은 또한 생겨나고 없어지는 대상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 변화하는 측면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유식의 아뢰야식의 개념과 연결시키고, 절대적인 측면은 여래장 사상과 대응시킨다. 즉 여래장과 아뢰야식, 혹은 여래장과 유식이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단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의 관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일심(一心)’이라고 불렀다.

 

원효가 가졌던 근본적인 통찰

 

이 원칙을 깨달은 원효는 하나의 마음을 여래장과 유식이라는 두 가지 다른 대승사상을 담은 경전을 보고 일심이라는 단일한 현실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의 잠재력 그 자체 즉, 여래장인 동시에 현실의 번뇌 즉, 유식적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둘은 하나의 대상, 일심이라는 단일한 현실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본래적으로 순수하지만 동시에 어리석음을 수반할 수 있다고 원효는 말하였다.

 

마음은 깨달았으면서도 동시에 무지할 수 있다. 원효는 이러한 원칙을 염두에 두면서 경전을 읽었고, 모든 경전은 근본적으로 일심을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관점들은 실제로 다른 것일까?

 

사실 이들은 상호보완적으로 두 관점이 모두 일심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원효는 그 당시에 신라사회에 들어온 다양한 불교전통 속에서 공통된 것을 찾아 이 모든 이론이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심의 다양한 표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모두 일심의 표현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효가 가졌던 근본적인 통찰이었던 것이다.

 

화쟁(和諍, doctrinal Reconciliation)이란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원효는 열반경부터 법화경, 화엄경까지 많은 주석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모든 경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심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 경전은 일심을 진여문이나 생멸문이라는 일심의 한 관점에서만 설명하거나, 아니면 어떤 경전은 일심을 동시에 두 관점에서 모두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이 경전들에서 불교의 현실에 대한 온전한 표현을 읽을 수 있었다. 따라서 원효가 보기에 불교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특정 단일사상, 단일경전이 있다기보다는 여러 다양한 표현들이 존재하고 그 모두가 각각 똑같이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원효는 많은 종류의 불교를 통합한다는 비젼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불교종파의 다양성을 통합시키는 과정을 원효는 화쟁()’이라 불렀다.

 

()’는 조화, 통일을 뜻하고, ‘()’은 싸우고 토론한다는 뜻으로 싸움을 화해시킨다는 의미이다. , 화쟁은 교리의 통합(doctrinal Reconciliation)을 뜻한다.

 

이것이 원효가 본 자신의 궁극적인 임무이었다. , 신라시대까지 들어온 많은 종류의 불교가 결국은 하나로 불교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증명하고, 각 가르침이 동등하게 현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는 참된 가르침임을 밝혀내는 것이다. 따라서 남보다 우월한 종파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종파는 모두 동등한 진리의 표현이라 본 것이다.

 

의상과 원효의 상반된 주장

 

의상은 화엄경이 불교 깨달음의 궁극적 표현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화엄경은 사가라 무드라 사마디’, 해인삼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해인삼매는 부처가 깨달음을 증득하면서 경험한 완벽하고 순수한 상태라 한다. 원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상은 화엄학파를 불교의 위계질서 속에서 최상으로 여겼었다. 각각의 경전과 가르침이 모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의상은 그 중에서 화엄종을 불교의 가장 으뜸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원효는 모든 가르침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가치있고, 똑같이 중요하며, 똑같이 진리라고 본 것이다. 어느 하나의 전통이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결국 일심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심의 두 가지 측면

 

원효의 전략은 가까운 친구인 의상의 입장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원효는 진여문과 생멸문의 구분을 통해 깨달음이 내재된 존재인 우리가 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여래장 사상은 깨달음은 우리의 타고난 상태이니,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유식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 마음은 본질적으로 번뇌에 차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촉매제를 찾아 마음을 변화시켜 미망의 존재에서 깨달은 부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상반된 주장이다.

 

원효는 진여문과 생멸문의 이분법에 의지해, 두 관점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깨달음의 길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제시하며, 이 두 길은 보완적이지만 또한 상이하다고 하였다. 이것 역시 일심의 두 가지 측면과 연결된다. 따라서 한편으로 내재적으로, 본생적으로, 원래 깨쳐 있다는 것이다.

 

본각(本覺,original enlightment)과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

 

절대적인 진여의 관점에서 볼 때,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이다. 이를 본각(本覺,original enlightment)’이라 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현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수행을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무지한 중생들이다.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실현되고 얻어져야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를 성취된 깨달음, 속세의 깨달음, 조건 지어진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이라 한다. 얻어진 깨달음이란 뜻이다.

 

()는 시작하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위한 시작이며, 어쩌면 세속의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깨달음은 수행의 과정을 통해서 성취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종류의 불교수행법이 개발된 배경이었다고 원효는 이해하였다.

 

진여문, 즉 마음의 참된 그러함의 관점에서 보는 깨달음은 본각이다. 진여의 관점에서 깨달음은 언제나 존재하기에 성취될 것이 없다고 본다. 이미 성취된 상태라는 것이다. 해야하는 것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본다. 깨닫지 못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버리고 이미 깨달았음을 즉시 인식하면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가능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깨달음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깨달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본각이라는 개념은 깨달음은 어떤 면에서 부처님들에 의해 우리 안에 심어진, 우리 안에 내재된 것으로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를 재인식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관점 즉, 생멸문의 입장에서는 깨달음은 내재된 것일지라도 바로 접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너와 내가 지금 여기서 부처라고 할지라도 그 깨달음을 증명해보이라고 한다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모두가 오랜 시간, 여러 생 동안 스스로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확신하고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는 깨달음을 발현시키기 보다 흐리게 하는 수 많은 습관들을 익혀 왔다. 따라서 일반적인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입장으로 바로 시각(始覺)을 설명하는 것이다.

 

불각(不覺, nonenlightment)과 상사각(,pseudo-enlightment)

 

원효는  우리가 깨달음을 실현하는 과정을 시작하려면 우선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한다. ,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순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과정을 시작하려면 지금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불각(不覺, nonenlightment)’이다.

 

아무리 깨달음, 이 본각이 내재되어 있어도 지금은 깨닫지 못했기에 그 참모습이 드러나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실현하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불각의 상태를 자각해야만 한다.

 

불각이라는 곤경에 처했다는 현실을 인식하면 노력하고자 하는 의욕을 촉발시켜 수행을 시작하게 된다. 수행을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행도을 하는데 이는 허위, 가짜의 깨달음이라 한다. 이를 상사각(,pseudo-enlightment)’이라 한다. 겉으로만 깨달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대게 도덕, 윤리를 수행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 나를 둘러싼 세상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배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일련의 규범이 만들어진다. 이로서 우리의 행동은 순수해지고 제약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반드시 이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행동은 깨달은 것처럼 할 수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원효는 이를 소승불교 전통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비교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로스웰 교수는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원효의 설명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넘어간다.

 

그러나 깨닫지 못했다는 것, 수행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수행을 시작하면 상사각이라는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한다. , 깨달아 보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단계로 보는 것이다.

 

수분각(隨分覺, approximate enlightment)

 

다음단계는 대략 깨달은 단계이다. 이를 수분각(隨分覺, approximate enlightment)’이라 한다. 이 단계는 보살이 드디어 깨달음이 이미 내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단계이다.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화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상에 집착하고 있는 단계이다. “내가 나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있다.” “내가 나의 몸과 마음을 정화했다.” 같은 이분법을 아직도 사용하여, 내 자신과 주체와 수행을 통해 겪는 경험이라는 객체를 나누는 시기이다. 수분각은 깨달음에 거의 다다랐지만 아직 도착은 하지 않은 단계이다.

 

구경각(究竟覺, final enlightment)

 

마지막 단계는 마지막 깨달음, ‘구경각(究竟覺, final enlightment)’단계로서 궁극적 깨달음이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분법적 분리가 사라진 단계이다. ‘가 깨달았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그 경험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단계이다.

 

불각과 구경각에 대한 차별적 생각이 소멸되며, 궁극적으로 본각과 시각의 차이 또한 소멸되는 단계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성취, 또는 실현하기 위한 4단계를 거치면서 결국 이 모든 것이 시작인 본생적 깨달음, 본각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깨달음을 실현하는, 성취하는 과정이 보여주는 것은 깨달음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시각과 본각이 결국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결국 불각과 본각도 동일하다.

 

 

일심사상에서 깨달음의 단계

No

  

   

1

본각

(本覺,original enlightment)

-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

-모든 존재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만 하면 됨

2

시각

(始覺, acquired enlightment)

-속세의 깨달음, 얻어진 깨달음

-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성취되어야함을 의미

3

불각

(不覺, nonenlightment)

-지금 여기 이 순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

- 불각의 상태를 자각해야만 함

4

상사각

(相似覺, pseudo-enlightment)

-허위, 가짜의 깨달음

- 도덕, 윤리를 수행의 출발점으로

-원효는 소승불교의 깨달음이라 함

5

수분각

(隨分覺, approximate enlightment)

-대략 깨달은 단계

-깨달음이 이미 내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단계

-여전히 이분법적 아상에 집착하고 있는 단계

6

구경각

(究竟覺, final enlightment)

-마지막 깨달음, 궁극적 깨달음

-이분법적 분리가 사라진 단계

 

 

 

 

늘 거기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일 뿐

 

자신의 본각을 깨닫는 과정은 오직 자기 스스로 본인이 망상에 사로잡혔다는 사실,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현실, 불각을 받아들일 때만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촉매제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고요하던 파도가 치든지간에 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파도가 있던 없든 바다는 물로 된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구현되는 모습이 달라서 다른 것처럼 보일 뿐이라 한다.

 

원효는 물, 바람, 파도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불각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구경각까지 이루었다 할지라도 결국 깨달음은 우리가 새롭게 창조해낸것이 아니라 늘 거기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 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깨달음의 실현은 우리가 본생적으로 깨달은 존재라는 진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고요한 마음의 표면에 물결을 일으키는 생각들을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인가? 원효는 그 근원이 초기불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수행법을 제시한다.

 

(. samatha)와 관(, vipassana)

 

원효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행하는 두 가지 형태의 수행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 수행법들도 깨달음의 두 측면이란 개념과 일관된다.

 

절대적 관점인 진여문의 입장에서의 수행은 일종의 고요함을 가져다 주는 수행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명상수행이다. ‘(. samatha)’자를 쓰는데, 지는 말 그대로 일어나는 생각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진여문의 입장에서의 수행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진여문의 입장에서의 수행이다. 영향을 끼치거나, 변화시키거나 하지 않고 우리가 멈춤으로서 있는 그대로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한다.

 

이 수행법은 나머지 하나인 또 다른 수행법에 의해 보완이 되는데, 그것은 (, vipassana)’수행법이다.

 

관이라는 것은 응시 혹은 관찰하는 것이다. 생멸문의 입장에서 우리가 속해있는 세상의 진정한 특성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관찰함으로서 현실의 고통과 무상함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을 배운다.

 

원효가 주창한 수행의 원칙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수행과 관수행은 별개의 수행법이 아니다. 이들은 불교명상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다. 원효는 이 두가지 수행을 동시에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요함의 수행만 하다보면, 지나치게 고요해질 수 있고, 그러다 피곤하면 게을러지고 잠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만 하다보면 지치고 피곤하게 될 수 있다.

 

반대로 위빠사나 수행, 통찰수행은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사가 돌아가는 과정을 이해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옳고 그름, 가치 있고 없음을 구별하는데 유용하지만, 위빠사나 수행만 하면 세상만사를 계속 관찰하느라 바쁘고 산만하여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원효는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에 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를 완성하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똑같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상호 보완적 수행

 

이 두 수행법이 상호 보완적으로 일심을 이해하고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워효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고요함과 통찰을 새의 양 날개, 수레의 바퀴에 비유하였다.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해야 새도 날고 수레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효가 주창한 수행의 원칙이다.

 

원효는 상당히 정교한 체계를 제시하여 대승불교 내에서 중요하지만 엇갈린 주장을 하는 두 교리, 즉 우리 마음이 원래 깨달아 있다는 여래장사상과 또 하나는 우리의 마음이 원래 더럽다는 유식사상을 대승기신론을 바탕으로 하나로 화합시키면서 하나의 마음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라는 주장을 통해 이 두 가지 측면이 똑같이 불교를 표현하고 대표한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러한 체계를 명상수행법에도 적용하여, 불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하지만 현실에서는 우리가 수행을 통해 실현시켜야만 하며, 다른 교리나 경전마다 다른 수행법을 주장하더라도 이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상호 보완적이라 하였다.

 

불교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체계를 구축

 

정리해 보면 원효는 당시 불교의 발전을 저해했던 각기 다른 가르침에 대한 논란과 충돌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불교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 체계는 각각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하나로 흡수시키고 통합시켜 교리 뿐만 아니라 수행법까지 아울렀으며, 이를 통해 원효는 불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포괄적인 비젼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바로, 불교내에서의 모든 차이는 하나의 현실, 하나의 마음의 각각의 다른 표현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상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효의 일심 사상

 

 

한마음(一心, one mind)

  

이문

 

진여문

(眞如門, true suchness)

생멸문

(生滅門, production & cessation)

-대승기신론에서 통찰

- 마음은 하나이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봄

-화쟁은 교리의 통합

사상

구분

여래장

(如來藏, tathagatagarbha, 따타가따가르바)

유식

(唯識, Yogācāra, 요가짜라)

-상호모순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

-두 종류의 불교가 동시에 신라에 들어옴

내용

-주류 불교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함

-대승불교, 특히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

-광명이 마음의 타고난 본성

-번뇌는 외부의 것

-깨달음은 늘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

-왜 애초에 자신들이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함

-특별한 종류의 의식인 아뢰야식이 있다고 주장

-신의론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로 나옴

-인간은 본생적으로 망상에 빠진 존재

-변성의 과정을 촉발할 외적 촉매가 필요

-아뢰야식이 청정한 무구식(아말라식)으로 바뀌어 깨달음에 이름

 

 

진리

절대적(absolute)

통상적(conditional)

 

번뇌

깨달음의 잠재력

현실의 번뇌

 

마음

마음은 본래적으로 순수

마음은 어리석음

 

수행

(. samatha)

(, vipassana)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이제까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대승불교의교리가 명쾌하게 정리되는 것 같다. 특히 여래장사상이나 유식사상의 경우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일심사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교리는 부처님당시에는 없던 것들이다. 후대에 공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생겨난 대승불교의 교리로서 초기불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교리들이다. 그러나 1700년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원효스님이래 면면히 전승되어 왔고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서 주류사상이다.

 

화쟁위의 초기불교 통합시도

 

원효스님 당시 신라에서는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상이한 불교가 전래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들 수 있다. 이들 두 사상은 서로 상반되고 서로 모순 되는 사상이었지만, 반면에 서로 보완적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상에 대하여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을 기반으로 교리통합(화쟁)을 시도 하였다. 그 결과로서 나온 것이 일심사상이다. 모든 현상이 하나의 마음으로 부터 출현하였다는 사상이다. 그런 한마음 사상은 철저하게 여래장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최근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는 새로운 교리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에 원효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여래장사상에 기반을 둔 통합이다. 그래서 초기불교도 통합대상이 되는데, 조계종 화쟁위원장인 도법스님은 팔정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팔정도 비교표

 

구 분

부처님의 팔정도

도법스님의 팔정도

1

바른 견해

(正見 sammā-diṭṭhi)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에 대한 지혜

지금 직면한 존재의 실상, 법의 실상인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보고 이해하는 견해

2

바른 사유

(正思惟 sammā-sakappa)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

 

본래부처를 사실대로 거듭 사유 음미하는 것

3

바른 말

(正語 sammā-vācā)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

 

본래부처답게 말하는 것, 즉 여어(如語) 실어(實語) 불이어(不異語) 불광어자(不誑語者)로 사는 것이 바로 정어요, 그대로 부처의 정어

4

바른 행동

(正業 sammā-sammānta)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

 

본래부처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업이요, 그대로 부처의 행위

5

바른 생계

(正命 sammā-ajiva)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

 

본래부처답게 의식주 생활을 하는 것

6

바른 정진

(正精進 sammā-vãyama)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善法)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선법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

본래부처답게 살려고 줄기차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

7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며 머무는 것

본래부처임을 항상 잊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림

8

바른 삼매

(正定 sammā-samãdhi)

 

초선(初禪)과 이선(二禪)과 삼선(三禪)과 사선(四禪)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三昧) 혹은 선()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 혼침, 들뜸. 후회,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반드시 제거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언제나 흔들림 없이 확고부동함

출처 : 도법스님,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불교평론 열린논다 2010-06-25

  

 

 

비교표에서 우측의 도법스님의 팔정도는 도법스님이 하나의 불교 수행으로 통일시키는 차원에서 본래부처와 팔정도를 접목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이는 7세기의 원효스님이 일심사상으로 서로 다른 불교교리를 통합하고자 하였던 것처럼, 21세기에 도법스님이 여래장사상으로 초기불교를 통합하고자 만든 본래부처를 기반으로 한 팔정도이다.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견은 서로 다르다. 부처님은 정견이 사성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초기불교를 대승불교로 통합하고자 하는 도법스님의 정견은 본래부처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 한다. 본래부처님이란 여래장사상에서 본마음으로서 대승불교에서는 참나, 진여, 불성등으로 불리운다.

 

정견이 바로 서야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정견이 바로 서야 된다고 한다.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 가게 되고 수행이 중구난방으로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이럴 때 불자들은 어떤 정견을 세워야 할까.

 

 

 

2011-10-28

진흙속의연꽃

 

 

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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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운동과 대승불교의 수행 -도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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