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윤회하며 흘린 피와 눈물을 어떻게 말려야 할까, 눈물경과 뼈의 산 웨뿔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1. 3. 14:34

 

 

윤회하며 흘린 피와 눈물을 어떻게 말려야 할까, 눈물경과 뼈의 산 웨뿔라

 

 

 

팔만대장경 천년기념으로 KBS에서 특집다큐 다르마를 만들었다. 세 번째 이야기 중에 티벳불교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티벳불교 특징중의 하나로서 자비수행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알라는 것이었다. 이는 발보리심을 내기 수행방법중의 하나로서 자신과 남을 똑같이 생각하라라는 것과 함께 티벳불교 수행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알라문구의 경전적인 근거

 

그런데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알라문구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이웃블로그(해피법당)의 글에서 눈물경(S15.3)과 젖경(S15.4)을 읽고 상윳따니까를 찾아 본 결과,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발보리심을 위한 자비수행의 근거가 되는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알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발견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상윳따니까야 SN15-14. 마따경-Mata Sutta: Mother-어머니, 전재성박사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아나마딱가 상윳따_S15_.pdf

 

 

경에서 부처님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중생이 언젠가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생각하여 항상 자비심을 내라는 것이다.

 

이처럼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발보리심 수행은 초기불교의 자애와 연민수행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초기불교가 모든 불교의 뿌리라는 말과 같다.

 

아나마딱가상윳따(Anamatagga-samyutta, 無始. SN15)

 

초기불교에서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구제를 하기 위한 보살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초기불교가 오로지 자신의 해탈과 열반만을 위한 불교는 아니다. 초기불교 경전의 도처에 자애와 연민과 관련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고층경전이라고 여겨지는 상윳따니까야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아나마딱가상윳따(Anamatagga-samyutta — The unimaginable beginnings of samsara , 無始. SN15)가 바로 그것이다.

 

아나마딱가 상윳따에서는 자애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어머니만 있는 것이다. 아버지도 있고, 형제, 자매, 아들, 딸도 있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상대방이 한 번쯤 나의 어머니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나의 아버지, , 동생, 아들, 딸이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적개심이 일어 날 때

 

그래서 이와 같은 경전을 근거로 하여 5세기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에서 자애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관조할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나의 어머니가 되어서 나는 열 달 동안 그녀의 모태에서 지냈으며. 태어난 뒤 오줌, , , 코 등을 마치 전단향처럼 역겨워 않고 치워주고 가슴에 안고 놀아 주었으며 등에 업어서 키워주었을 것이다.

그는 전생에 아버지가 되어 양들이 다니는 길과 갈고리를 사용해야만 하는 험난한 길 등을 다니면서 상업을 하였고, 나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양쪽에서 진을 진 전쟁터에 나갔고, 배를 타고 대양을 항해했고, 또 다른 어려운 일들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야지 하는 생각으로 갖가지 수단으로 돈을 벌면서 나를 키웠을 것이다.

형제, 자매, 아들, 딸이 되어서 이 사람은 이런 저런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하여 마음으로 화를 내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청정도론, 9장 거룩한 마음가짐 36)

 

 

상대방에 대하여 적개심이 일어 날 때, 상대방을 지금의 부모처럼 그리고 형제 자매처럼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누그러 뜨려 질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한량없는 윤회속에서 모든 존재들은 한 번쯤 나의 부모, 형제, 자매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한량없는 윤회를 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불행과 행복을 맛 보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지라도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바라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상윳따니까야 SN15-11. 둑가따경-Duggata Sutta: 불행,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불행에 처한 사람 또는 파멸에 처한 사람, 비참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보면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된다고 하셨다. 한량없는 윤회속에서 우리도 언젠가 한 번 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누구나  오랜 세월동안 충분히 고통을 맛 보았고, 허탈해 하였고, 무덤자리가 계속 만들어 졌다고 말씀 하셨는데, 이어지는 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윤회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벨루와나(죽림정사)에 계실 때 일단의 수행승들이 찾아 왔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라 부처님당시 집을 떠나 수행하는 방랑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숲에서 만 살며, 걸식에 의존하고, 분소의만 입고 있었는데, 아직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런 무리들 30명이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부처님은 그들에게 먼저 윤회의 두려움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 하루 빨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길로 들어서게 해주기 위해서 이었다.

 

먼저 부처님이 그들 30명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

(상윳따니까야 SN15-13. 띰사경-Tisamattasutta-Timsa Sutta: Thirty:삼십명경, 전재성박사역)

 

 

한량없는 윤회에서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에 있는 물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많은 것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대양은 고대인도의 우주관에 따른 것이다. 현시대에서 말하는 오대양과 같은 것이 아니라 고대인도인이 생각하는 우주관으로서 동서남북의 사대양(mahasammudda)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30명의 무리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윤회가 한량 없이 많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로서 무명과 갈애를 들고 있다. 갈애는 과거의 원인에 대한 것이고, 갈애는 미래의 결과가 되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중생들의 윤회는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

 

부처님은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30명의 무리들에게 설명한다. 그런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염소로 태어나 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상윳따니까야 SN15-13. 띰사경-Tisamattasutta-Timsa Sutta: Thirty:삼십명경, 전재성박사역)

 

 

윤회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사람으로만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축생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닭이나 돼지나 소로 태어 났다면 목을 잘려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인들의 식탁에 매일 오르는 고기는 모두 닭공장 또는 돼지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람들에게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사육되는 닭이나 돼지, 소는 목이 잘려 피를 흘리면서 생을 마감하는데, 우리들도 한량없는 윤회속에서 그런 과정을 다 거쳤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때 흘린 피의 양이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도둑으로 살다가 붙잡혀 목이 잘리고, 심지어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잡혀 목이 잘려서 흘린 피의 양이 사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은

 

이처럼 인간으로 또는 축생으로 살며 흘린 피의 양을 사대양과 비교 하였는데, 흘린 피 못지 않게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이다.

 

눈물의 종류는 많이 있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고, 슬퍼서, 억울해서 등 갖가지 이유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릴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 하며 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량없는 윤회에서 그런 눈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사대양의 물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상윳따니까야 SN15-3. 앗수경- Assusutta- Assu Sutta: Tears-눈물경, 전재성박사역)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어머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량없는 윤회에서 이미 우리들은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 뿐만 아니라,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 친지, 친구등의 죽음을 경험 하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흘린 눈물의 양이 사대양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사대양에 비유한 것 중에 흘린 피나 흘린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마신 젖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젖경(Mātuthaññasutta, Khira Sutta, SN15-4)’에서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과 사대양의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라고 묻는다.

 

윤회하면서 남긴 뼈를 쌓아 둔다면

 

한량없는 윤회에서 흘린 피, 흘린 눈물, 마신 젖 뿐만 아니라 죽어서 남긴 뼈도 있을 것이다. 그런 뼈를 모아 둔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1겁의 세월을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SN15-10. 뿍갈라경-Puggala Sutta-사람경, 전재성박사역)

 

 

1겁동안 윤회하는 과정에서 생긴 뼈무더기를 쌓아 두면 웨뿔라산 만큼이나 클 것이라 한다.

 

1겁에 대한 산과 겨자의 비유

 

여기서 1겁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겁에 대해서도 초기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 겁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겁의 비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의 비유

 

수행승이여, 예를 들어 큰 바위산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1마일이고 넓이가 1마일이고 높이가 1마일이며 간격이 없고 균열이 없고 견고하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백년에 한 번씩 베나레스의 비단 옷으로 스치고 지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큰 바위산이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어 없어져버리는 것보다도 1겁은 긴 시간이다.

(상윳따니까야 SN15-5. 빱바따경-Pabbata Sutta, 전재성박사역)

 

 

겨자의 비유

 

수행승이여, 예를 들어 쇠로 만든 성이 있는데 길이가 1마일이고 넓이가 1마일이고 높이가 1마일이며 겨자씨로 가득 차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백년에 한 알씩 덜어낸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큰 더미의 겨자씨가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어 없어져버리는 것보다도 1겁은 긴 시간이다.

(상윳따니까야 SN15-6. 사사빠경-Sasapa Sutta,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겁에 대하여 산의 비유와 겨자의 비유,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한량 없는 세월을 말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으면

 

이렇게 1겁동안 윤회하여 쌓은 자신의 뼈무더기가 웨뿔라산 만큼이나 클 것이라 하였는데, 이를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1겁의 세월을 윤회하며 한 사람이 남겨놓은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 위대한 선인은 말씀하셨네.

그런데 큰 산은 이처럼 베뿔라 산이라고 불리우니

깃자꾸따의 북서쪽에 놓여 있고 그곳에 마가다의 산성이 있네.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것 거룩한 진리를 살펴보면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거룩한 여덟 가지의 진리를 보면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모든 속박을 부수고 괴로움을 자멸할 것이네

(상윳따니까야 SN15-10. 뿍갈라경-Puggala Sutta-사람경, 전재성박사역)

 

 

게송에서 뼈들의 산이라고 불리우는 웨뿔라산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 뼈들은 1겁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뼈들의 산에 뼈를 쌓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성제를 알고 팔정도를 닦으면 고통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류자가 되면 최대 일곱생이내에 열반에 들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뼈들의 산 웨뿔라산은 경에 따르면 1겁동안 형성된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또 경에서는 웨뿔라산과 관련하여 1겁동안 세 분의 부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 고따마붓다 이전의 까꾸싼다 붓다, 꼬나가마나 붓다, 깟싸빠 붓다 이렇게 세 명의 과거 부처님이다.

 

다섯 분의 부처님이 출현한 행운의 겁

 

이 네 분의 과거 부처님과 웻사부 붓다,  미래에 오실 마이뜨레야 붓다까지 합하면 무려 6명의 부처님이 현겁에 출현하였거나 출현 할 것으로 예상되어, 현겁을 행운의 겁이라고 한다. 참고로 과거 28불과 미래의 부처님을 포함한 29불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29분의 부처님 이름(The 29 named Buddhas)

이름

출현시기

인간수명

 

1

Tahakara

딴한까라

과거28

2

Medhakara

메단까라

3

Saraakara

사라난까라

4

Dīpankara

디빤까라

(연등불)

5

Koṇḍañña

꼰단냐

6

Magala

망갈라

7

Sumana

수마나

8

Revata

레와따

9

Sobhita

소비따

10

Anomadassi

아노마닷시

11

Paduma

빠두마

12

Nārada

나라다

13

Padumuttara

빠두뭇따라

14

Sumedha

수메다

15

Sujāta

수자따

16

Piyadassi

삐야닷시

17

Atthadassi

앗타닷시

18

Dhammadassī

담마닷시

19

Siddhattha

시닷타

20

Tissa

띳사

21

Phussa

풋사

22

Vipassī

위빠시

61겁전

8만세

과거7

23

Sikhī

시키

31겁전

7만세

24

Vessabhū

웻사부

현겁

6만세

25

Kakusandha

까꾸산다

현겁

4만세

26

Koāgamana

꼬나가마나

현겁

3만세

27

Kassapa

깟사빠

현겁

2만세

28

Gautama

고따마

(석가모니)

현겁

100

29

Maitreya

마이트레야(미륵)

현겁

미래불

출처 ;

1)29불이름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the_twenty-eight_Buddhas

 

 

 

초기경에서는 뼈들의 산 웨뿔라산과 관련하여 현겁의 과거 4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지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런데 과거 3불 당시 웨뿔라산의 이름도 달랐고, 또 인간의 수명도 지금과 달랐다. 경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표를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불

쌍수제자

뼈의 산 이름

종족

인간수명

등정

까꾸싼다

비루라, 싸지바

빠찌나방싸

띠바

4만 살

나흘 걸림

꼬나가마나

비이요, 쑷따

방까

로히땃싸

3만 살

사흘 걸림

깟싸빠

띳싸, 바라드와자

쑤빳싸

쑵삐야

2만 살

이틀 걸림

고따마

싸리뿟따, 목갈라나

웨뿔라

마가다까

수명이 짧아 보잘 것 없음

잠깐 사이에 오르고 잠깐 사이에 내려옴

 

 

위의 표를 보면 현겁에서 네 명의 부처님이 출현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 불이 출현할 때 마다 같은 산이지만 불려지는 이름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종족의 이름도 다르고, 더구나 수명도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상윳따니까야 SN15-20. 웨뿔라빱바따경-Vepullapabbata Sutta, 전재성박사역)

 

 

과서에 세 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였을 때, 그 때마다 산의 명칭을 다르게 불렀고, 그 때 태어난자가 죽었을 때 뼈를 웨뿔라산에 묻었는데, 과거로 올라 갈 수록 수명이 길어 등정하는 데 몇일 걸렸으나, 지금의 경우 수명이 보잘 것 없어서 더 자주 웨뿔라산을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잊혀질 때

 

이는 무상함을 말한다. 이런 무상함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잊혀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출현할 때 마다 연기법을 발견하여 나고 죽는 일 없는 불사의 문을 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잊혀지게 되고, 잊혀진채로 한량없는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부처가 출현하여 과거불이 그랬던 것처럼 똑 같은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수제자가 두 명인 인것도 과거불이 발견한 진리가 동일한 것임을 나타낸다.

 

과거불 당시의 예로 들어 부처님은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하였다. 그리고형성되어진 모든 것들은 견고하지 않고 불안정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싫어하고, 초연해서 해탈할 것을 이야기 하신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면 웨뿔라산에 뼈를 쌓을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

 

쌓은 업이 수미산 보다 높아

 

부처님은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흘린 피, 흘린 눈물, 마신 젖의 양이 사대양의 물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1겁에 형성된 자신의 뼈무더기가 웨뿔라산 만큼이나 높이 쌓였다고 하셨다. 이는 모두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생긴 것 때문이라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게송을 남기셨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爾 寂滅爲樂)

 

(상윳따니까야 SN15-20. 웨뿔라빱바따경-Vepullapabbata Sutta, 전재성박사역)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일생동안 수 많은 나날들을 살아간다. 100년을 산다면 36500일을 살아간다. 매일 매일이 마치 윤회하는 것처럼 일상이 반복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쌓은 업은 아마도 수미산 보다 더 클지 모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피를 흘리거나 눈물을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이 피의 양과 눈물의 양은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량없는 윤회가 지속된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대양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지금 흘리고 있는 피 한방울, 눈물 한방울도 결국 윤회의 바다에 한방울 더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많이 흘린 피와 그 눈물을 어떻게 말려야 할까.

 

흘린 피와 눈물을 어떻게 말려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분명히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그대들은 모두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라고 조건이 성숙되었을 말씀 하셨다. 이는 더 이상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업이 형성되지 않으면 더 이상 업유(業有, bhava)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일어나는 법의 조건이 소멸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더 이상 생성되지 않았을 때 이를 적멸에 들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행복이라 하셨다.

 

 

2011-11-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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