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번뇌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오장애의 극복과 생활수행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24. 10:43

 

 

번뇌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오장애의 극복과 생활수행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때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높은 계단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사람들이라면 순식간에 올라갈 계단인데,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계단은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것 보다 더 힘겹게 느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은 앞서가는데 몸이 따라와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달리기를 하다 종종 넘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나고 몸이 후둘후둘 떨린다면 마음만 있을 뿐이지 일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육체적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몸이 노화되거나 병이나면 몸이 마음처럼 따라 와 주지 않는 느낀다. 그런 마음은 항상 내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그 마음은 내 마음일까.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생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각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생각은 나의 통제밖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은  현재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처럼 수시로 불쑥 불쑥 일어나는 생각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의 성질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Dūragama ekacara      두랑가망 에까짜랑

asarīra guhāsaya         아사리랑 구하사양

ye citta sayamissanti    예 찟땅 상야미싼띠

mokkhanti mīrabandhanā     목칸띠 마라반다나.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고 홀로 움직이며

물질이 아니면서도 물질 속에 숨는다.

누구든 마음을 잘 다스리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리.

(법구경 37게송)

 

 

마음은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마음을 잘 다스린다면 죽음의 왕도 찾아 보지 못할것이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법중에 오장애의 극복이 있다.

 

마음에도 장애가 있다

 

마음에도 장애가 있다고 한다. 육체에 장애가 있으면 살아가기가 몹시 불편하듯이 마음에 장애가 있으면 역시 살아가는 고통스러울 것임에 틀림없다. 시각장애자는 길을 걷기가 불편할 것이고, 청각장애자는 들리자 않아 어려움을 겪듯이 마음의 장애를 가진자들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마음의 장애는 선천적으로 형성된 발달장애등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장애는 보통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불선한 마음을 말한다. 이를 초기불교에서는 오장애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해로운 마음들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악의(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

 

 

위와 같은 다섯가지 불선한 마음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방해 요소로 보는 것이다.

 

오장애의 정의

 

이와 같은 오장애에 대한 정의는 주석서에 다음과 같이 명기 되어 있다고 한다.

 

 

오장애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이미 일어난 선법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인 요인이다.

 

 

오장애는 믿음(saddha), 양심(hiri), 연민(karuna)등과 같은  25가지 아름다운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또한 이미 일어난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 어리석음없음(amoha)등과 같은 유익한 마음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마음의 장애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가지 해로운 마음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일묵스님의 강의에서

 

불교TV사이트를 즐겨 보고 있다. 거의 대부분 스님들의 강의나 법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때로 불교학 교수들의 강의도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교수들의 강의는 들을 만 하지만 선사들의 강의나 법문은 대승불교위주이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이 많다. 

 

강의 중에 초기불교의 교학에 대한 강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일묵스님이 진행하는 특별법문 팔정도 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강좌이다. 이 강좌의 특징은 초기불교 교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교학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강의 중에 제5 5장애 요소와 무명을 참고 하였다.

 

탐욕의 특징은

 

다섯가지 장애중애 첫 번째인 감각적 욕망 즉,  탐욕이란 무엇일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받아 들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하여 이를 집착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이를 아상(我相)’이라 하고 영어로 에고(ego)’라 한다. 이렇게 전도된 인식을 가진 아상자체가 탐욕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탐욕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첫번째로 탐욕의 특징은 집착이다. 무언가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속성을 말한다. 마치 양은 냄비에 고기를 구우면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하듯이, 마음이 대상에 한번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게 되는데 이를 집착이라 한다. 이는 단순히 대상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찰싹 들러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데, 이를 탐욕이라 한다. 따라서 탐욕은 집착하는 것이 본질이다.

 

두번째로 탐욕의 특징은 만족할 줄 모른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더 가지고 싶고, 더 채워넣고 싶은 욕망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려도 중생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만족을 모르는 것이 탐욕의 특징이다.

 

개뼈다귀같은 감각적 욕망

 

이와 같은 탐욕의 성질에 대한 좋은 비유가 있다. 그것은 뼈다귀같다는 것이다. 왜 뼈다귀같다고 할까. 그것은 개가 뼈다귀를 보고 먹을려고 하지만 막상 먹을것이 없다는 것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뜯어 먹을 고기는 없는데 거기에서 나는 뼈다귀의 냄새가 너무 좋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범부들의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진 :

 

 

 

감각적욕망을 추구해 보면 막상 거기서 얻어지는 행복이 그다지 크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하고 나면 허전한 것이 감각적 욕망의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을려고 하는 것이 마치 개가 뼈다귀의 냄새에 이끌려서, 먹을 것도 없는 개뼈다귀에 집착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갈증만 날 뿐이지 그것으로 인하여 만족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편한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복으로 포장된 괴로움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고통인 것을 알면서도 왜 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감각적 욕망의 달콤함 때문이다. 개뼈다귀처럼 무언가 먹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다 보면 갈증만 일으킬 뿐이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 자체가 즐거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를 추구하지만 , 그런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어떠할까. 그 때 고통이 따라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달콤한 맛을 가진 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달콤해서 추구하는데 실질적으로 큰 손해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행복으로 포장된 괴로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고통을 유발할 뿐인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달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을 버리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것은 고통이 아닌 것처럼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이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감각적 욕망은  우리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장애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감각적 욕망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감각적 욕망으로 부터 근심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감각적 욕망이 고통임을 인식해야 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감각적 욕망으로 부터 근심이 일어난다(Dhp215)”고 하였다. 이에 대한 법구경의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Kāmato jāyatī soko           까마또 자야띠 소꼬

kāmato jāyatī bhaya        까마또 자야띠 바양

kāmato vippamuttassa       까마또 윕빠뭇따싸

natthi soko kuto bhaya    낫티 소꼬 꾸또 바양

 

갈망은 슬픔을 태어나게 하고

갈망은 또한 두려움을 낳는다

갈망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은

슬픔도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법구경 215, 거해스님역)

 

 

이처럼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할 수록 행복해지기 보다 근심, 걱정이 더 많아 지는데,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에 따른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내 것이다

는 견해에 사로잡힌 자에게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가 되어가기 때문에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난다.

(상윳따니까야, S.iii.3)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 첫 번째 원인으로 나가 있다라는 그릇된 견해를 들고 있다.그런 견해에 사로 잡혀 있을 때 감각적 욕망을 추구해 보지만, 모든 현상은 변하는 속성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고통을 야기하고 결국 절망에 이르게  할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정체가 뚜렸한 성냄

 

성냄은 감각적 욕망과 정반대의 성격이다. 감각적 욕망은 대상을 거머쥐고 놓지 않으려는 성질이 있는 반면, 성냄은 이와 반대로 대상을 싫어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밀쳐내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오욕락으로 설명하면 이해 하기 쉽다. 이는 식욕, 성욕, 재물욕, 안락욕, 명예욕을 말한다. 이를 거친감각적 욕망이라 하는데, 미세한 것도 있다. 수행측면으로 본다면 선정에 든다든가 부처가 되고 싶은 욕망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런 욕망은 욕망이 아닌 듯이 나타나는 특징을 가진 미세한 욕망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감각적 욕망은 좀처럼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쇠에 녹이 슬듯이 스멀 스멀 나타난다. 하지만 성냄은 다르다.

 

성냄은 겉으로 드러날 때 정체가 뚜렷하다. 따라서 성을 내었는지 안내었는지 즉각알 수 있다. 그래서 탐진치 삼독 가운데 성냄을 가장 천박한 것으로 본다.

 

조폭사회에서 자신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보스를 어리석음에 비유한다면, 성냄은 행동대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냄은 금방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조폭의 행동대원처럼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매우 천박한 사람이다. 성냄의 뒤에 숨어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성냄으로 표출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성냄을 통하여 내면의 천박함이 투사되는 것과 같다.

 

 

 

 

사진 : anger

 

 

성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인품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냄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비교하여 쉽게 드러나고, 쉽게 파악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냄의 특징은 무엇일까.

 

모든 공덕을 파괴하는 성냄

 

성냄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이는 성내는 모습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성냄으로서 모든 공덕이 파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수십년 쌓아 온 인간관계가 단번에 깨질 수 있고, 권력을 잡은 자가 성내면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성내는 것을 과 같다고 하였다.

 

성을 내면 독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 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과 의미가 같은 말이다. 성을 냄으로 인하여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아닌 사소한 일에 화 부터 내었을 때 분위기는 일시에 어색해지고 냉냉해진다. 오래 된 단골 거래처와 거래로 인한 문제가 생겼을 때 성을 내었다면 그 거래처와 거래는 그 것으로 끝난다. 친구나 친척, 가족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성을 한 번 냄으로 인하여 이제 까지 쌓아 온 공덕이 모두 파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성냄은 매우 무서운 것이다. 이런 성냄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들

 

성냄이 일어날 때 항상 불만족과 함께 한다. 성냄을 일반적으로 분노나 적개심등으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불교에서 말하는 성냄은 그 범위가 훨씬 넓다.

 

날씨가 더워서 짜증이 나는 것도 성냄이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보고서 불만족이 일어나는 것도 성냄이다. 우울하거나 슬퍼서 우는 것도 일종의 성냄이다. 밤중에 길을 가다 누군가 나타나 놀랐거나 두려움을 느겼을 때도 일종의  성냄이다.

 

성냄은 어떤 상황에서 그 상태가 싫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잘 관찰해 보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성냄의 요소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만 성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만처럼 탐욕으로 파생되는 번뇌가 엄청나게 많듯이, 마찬가지로 성냄에 뿌리박은 번뇌 엄청나게 많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속담이 있듯이 질투(issa)’가 일어나는 것도 성냄에 뿌리박은 해로운 마음이고, 잘 된 것을 남과 나누기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 날 때 이를 인색(macchariya)’이라 하는데, 이 또한 성냄에 뿌리박은 해로운 마음이다.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괴로움

 

성내면 누가 괴로울까. 성을 내면 성을 내는 자신이 괴롭다. 이는 누구나 경험하는 사항이다. 누군가 미워 하였을 때 그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괴로움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성냄에 따른 괴로움에 대하여 다음과 표현하였다. 

 

 

싫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들의 행위로 생긴 괴로움이

그다음에 몸에도 일어난다.

이것은 두 가지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대성자께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였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 54)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면 그것은 어떤 고통에 속할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범부들은 그것에 의해 핍박당하여 적개심을 가진다. 그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는 괴로움이 정신적 고통이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 58)

 

 

불같이 화를 내거나 심한 적개심을 가졌을 때 그것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와 극심한 고통을 야기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냄을 정신적 고통이라 하였다. 

 

화를 내면 자신만 손해인 이유

 

화를 낼 때 상대방이 그 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분풀이가 되지 않는다. 그 때 그 화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향하게 되어 있다. 그로 인한 정신적고통을 당해서 괴로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청정도론에 숯불을 든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한 손에 똥을 들고 또 한 손에 시뻘건 숯불을 들고 있다. 그는 똥과 숯불을 들고서 상대방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주기 위하여 던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성냄의 밥상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밥상은 성내는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성내는 사람의 몸에는 구린내가 진동할 것이고, 동시에 숯불로 타들어 갈 것이다. 그로인하여 극심힌 고통을 겪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성내는 사람의 전형적이 모습이다. 이런 비유에 대한 법구경의 게송이 있다.

 

 

Yo appaduṭṭhassa narassa dussati         요 압빠둣타싸 나라싸 두싸띠

suddhassa posassa anagaassa          숫다싸 뽀사싸 아낭가나싸

tameva bala pacceti pāpa                따메와 발랑 빳쩨띠 빠방

sukhumo rajo pativātava khitto.           수쿠모 자조 빠띠와땅와 킷또.

 

분노하지 않고 청정하고 허물없는

그런 사람에게 화를 내면

그 악은 바로 그 어리석은 자에게 돌아가나니

마치 바람을 향해 던지 가는 먼지처럼.

(법구경 125번 게송)

 

 

화를 내면 자신만 손해이다. 법구경의 표현대로 바람을 향해 재를 날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만 당할 뿐이라는 말이다.

 

오장애 중에 감각적욕망과 성냄이 가장 주된 장애요소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이 두 가지만 일어나지 않아도 사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한다.

 

불법승삼보에 대한 의심

 

오장애중 세 번째 장애요소는 의심이다. 이 의심은 무엇에 대한 의심일까. 불교에서는 불법승삼보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으로서 연기법이나 윤회등을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심이 일어나면 어떤 현상이 발생될까.

 

 

 

사진 : doubt

 

 

의심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생각만 하다 끝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력을 할 수 없게 되고 마음에서 갈등만 일어나다가 끝나버리기 일쑤이다. 이런 의심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해서 마음을 안정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마음의 장애라고 한다.

 

흐리멍텅한 상태를 즐기는

 

오장애중 네 번째 장애는 해태와 혼침이다. 이는 한마디로 게으름을 이야기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게으르고 무기력한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정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떳을 때 멍한 기분과 같다. 좌선수행을 할 때 대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몽롱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해태와 혼침은 잠자기 직전의 상태와 같다. 무기력하고 정신이 맑지 못하고흐리멍텅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 상태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수행자들이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졸음이 오는 듯 마는 듯 멍한 상태가 지속되는데, 이런 상태가 되면 편안하고 시간도 잘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상태에 대하여 삼매에 들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소식한 것으로 오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태와 혼침에 관한 것으로서 무기공에 빠진 상태라고 한다.

 

해태와 혼침의 상태에 대하여 삼매나 깨달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적을 친구로 아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위험이고 번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게으름이어서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일요일 집에서 잠이나 자면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낼 때 이런 것에 대하여 불선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의 장애로 보는 것이 부처님의 시각이다. 이는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고 항상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진 ; lethargy

 

 

이렇게 해태와 혼침에 따른 게으름과 흐리멍텅한 상태로 살게 된다면 늙어 치매에 걸리거나,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자꾸 되새김하며 괴로워 하는

 

오장애중 다섯 번째는 들뜸과 후회이다. 들뜸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한 상태를 말한다. 후회는 해야 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될 일을 하였을 때 일어난다. “어제 수행을 했어야 했는데” “어제 그 상황에서 화를 내지 말아야 했었는데와 같이 지나간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등을 말한다마음이 안달복달하면서 자꾸 되새김하며 괴로워 하는 것을 말한다.

 

 

 

 

 

사진 : reget

 

 

이런 후회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때는 오히려 참회를 해서 다음에 그런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장애를 제압하려면

 

이와 같은 다섯가지 요소는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장애요소이다. 특히 이 다섯가지 요소는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장애한다.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게 하지 않고 항상 불안하고 들뜨게만든다. 이는 선정에 드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깊이 있는 지혜가 일어날 수 없게 된다.

 

오장애를 제압하기 위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한다. 먼저 사마타(삼매, 선정)수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매에 들어가게 되면 다섯가지 장애는 완전히 제압된다. 예를 들어 세 시간 동안 삼매에 들었다면 이 다섯가지 장애는 단 한 순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삼매에서 나오면 다시 장애와 맞부딪치게 되는데, 예전과 똑같은 눈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 한다. 화가 난 상태에서 보는 것과 마음이 깨끗해진 상태에서 보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음이 맑은 상태에서 현상계를 바라 보면 깊이 있는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일어나는 번뇌의 밑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된다는 것이다. 전도몽상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음이 사라지게 되는데,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탐욕과 성냄도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오장애를 가리 앉히는데 가장 좋은 수행은 선정수행또는 삼매수행이라 한다. 빠알리어로 사마타라고 한다. 이와함께 오장애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버리는데 촛점이 맞추어진 수행방법을 위빠사나 수행또는 지혜수행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아야 하는데, 이는 오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 한다.

 

3자가 관찰하듯이

 

오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수행 즉, 위빠사나 수행은 초기경전에 잘 표현 되어있다. 오장애에 관한 수행은 법념처로서 사띠빳따나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안으로 밖으로 담마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또는 담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또는 담마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또는 담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또는 오직 담마의 현상만 있다는 사실에 굳건하게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 sutta-염처경 M10,  담마에 대한 관찰,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다섯가지 장애는 법념처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들 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 하는 것인데,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을 보면 예로 보면 다음과 같다.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감각적 욕망이 내 안에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감각적 욕망이 내 안에 없다고 분명히 알아차린다.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분명히 알아차리며,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분명히 알아차리며,

버려진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분명히 알아차린다.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 sutta-염처경 M10,  담마에 대한 관찰,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은 철저하게알아차리는 수행이다. 그것도 분명히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마치 제3자가 관찰하듯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객관명상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생활속에서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장애가 장애인줄 안다는 것

 

살아 가면서 마음을 관찰 할 수 있다. 나에게 탐욕이 일어날 때나에게 탐욕이 일어났다” “이것은 장애이다라고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성냄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냄이 일어 날 때 그것을 알고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가 장애인줄 아는 것이 일종의 지혜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라 한다. 

 

아하라경(자양분경, S12.11)에서

 

장애가 장애인줄 모르면 어떻게 될까. 밥을 먹어야 몸이 유지 되듯이 번뇌도 자양분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오장애 역시 장애가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장애가 장애인줄 모르면 마음의 자양분의 섭취에 따라 장애는 더 커져 나갈 것이다.

 

초기경전에 아하라경(자양분경, S12.11)’이 있다.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음식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Kabalikāro āhāro o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a catuttha.)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무엇을 인연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을 원천으로 하는가?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갈애를 인연으로 하고 갈애를 원인 으로 하고 갈애를 근거로 하고 갈애를 원천으로 한다.

 

(아하라경-Ahara Sutta: Nutriment, 자양분경, 전재성님역, S12.11)

 

  아하라경-자양분경.docx  아하라경-자양분경.pdf

 

 

번뇌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 때 그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계속 쳐다 보고 즐기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는 감각적 욕망이 증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 여인의 표상에 대하여 집착하고 반복하면 반복할 수록 여인에 대한 감각적 욕망은 점점 커져 갈 것이다. 이처럼 보고 또 보는 것을 마음의 자양분이라 한다. 마치 눈덩이 커지듯이 커지는 것이다.

 

번뇌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데, 이는 작은 불씨가 커져 어마어마한 불길이 되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이 번뇌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번뇌가 커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점점 커져자라게 된다. 일종의 영양분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그 번뇌에 압도되어 통제불능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런 현상을 중독되었다라고 표현한다.

 

화투놀이나 카드놀이도 처음에 재미삼아 하지만 계속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 끊을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손을 끊어도 놀음을 계속한다는 말이 있듯이, 중독 상태에 까지 이르게 된 것도 재미삼아 시작한 마음의 자양분을 계속 주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표상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을 때 감각적 욕망이 계속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마음의 자양분을 주지 말아야 한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 났을 때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는 아름다운 표상에 어리석은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번뇌가 일어나면 빨리 알아차리고 그 번뇌가 커져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자양분을 공급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아름다운 표상을 취한다는 것은 자양분을 계속 공급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성냄도 마찬가지이다.

 

저 사람을 통하여 내 마음에서 화가 일어 났구나

 

쳐다 보는 것만으로 화가 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저놈은 나쁜 놈이라고 규정을 해 놓았을 때 성은 계속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하여 표상을 취하지 않고 저 사람을 통하여 내 마음에서 화가 일어 났구나라고 보게 되면, 이제는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 일어난 화가 문제가 된다. 그렇게 되면 화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냄을 일으키는 표상을 계속 반복해서 취하는 것이 성냄의 자양분이 된다.

 

윤회는 없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의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윤회는 없다라고 말을 하였을 때 그 말을 듣고 의심은 점점 커져 갈 수 있다. 의심은 의심의 자양분을 먹고 더욱 더 의심이 커져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승을 찾거나, 좀 더 많이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본다거나, 경전이나 주석서를 보아 빨리 그 의심을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주의력에서 현명한 주의력으로

 

습관적인 게으름이 있다. 할 일 없으니 잠이나 잔다고 하였을 때, 그 게으름은 점점 커져 나갈 수 있다. 지나간 일을 되새김하는 후회 역시 마음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번뇌는 내버려 두면 커져서 얼마나 크게 자랄지 모른다.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에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번뇌이다” “이것은 장애이다” “이것은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이다라고 이해하면서 커져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주의력에서 현명한 주의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번뇌가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지혜이다. 그리고 지속되지 않도록 양분을 공급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다섯가지 장애는 해로운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친구로 삼을 필요가 없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통을 주고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요소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생활법문, 생활수행

 

매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활법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부대끼며 살아 가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인 법문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이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 살아 있는 법문이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생활수행이다.

 

이런 생활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거리를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 설겆이를 할 때, 누군가 기다릴 때도 매우 유효하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다섯가지 마음의 장애에 적용하였을 때이다. 그 중에서도 감각적 욕망(탐욕)’성냄에 적용하였을 때이다.

 

감각적 욕망은 개뼈다귀같은 것으로 알아야 한다. 냄새가 좋아 먹으려 하지만 막상 먹을 것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냄은 이제까지 쌓아 온 모든 공덕을 한 순간에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두가지만 알아차려도 삶을 살아 가는데 고통스럽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구나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2011-10-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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