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불교에도 근본주의자가 있을까. 이제까지 기독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는데, 이제 새로운 용어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그런 불교근본주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화쟁위 실무자의 행보를 보면
최근 교계인터넷신문에서 마성스님이 ‘21세기 아쇼카선언’에 대하여 여러차례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 중에 가장 최근에 반론한 것이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되었다.
반론자는 화쟁위에서 일하는 ‘백승권사무국장’으로 되어 있다. 화쟁위의 실무를 전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백사무국장의 행보에 대하여 인터넷검색을 하여 보았더니 화쟁위의 활동이 있는 곳에 반드시 그의 발언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백국장이 한 가장 최근의 발언은 아쇼카 선언과 관련된 것으로서 “시민사회, 학자 등 다양한 견해를 듣고 선언을 발전시킬 선언의 완성안이 돌출되길 기대한다(BTN뉴스, 2011-09-22)”라고 말함으로서 그가 실무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뿐만아니라 화쟁위가 활동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예로서 작년 봉은사 사태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기 위해 면담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상호 의견을 나누고자 자리가 마련됐다(주간불교)”라고 설명하였고, 금년 초 김진숙 한진중 노조위원의 농성에 관하여 화쟁위원장이 노동부를 방문하였을 때 푸대접 받은 것에 대하여 “전경련, 상공회의소, 민노총, 한국노총 등은 성의있게 조치를 취하는데 노동부만 거절했다”면서 “정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 무성의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그가 실질적으로 화쟁위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런 백국장이 마성스님의 반론에 대하여 재반론 형식을 글을 같은 매체에 남겼는데, 그가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마성스님은 불교계의 선언을 부정할만한 대단한 근거로 기독교계 학자의 콧방귀를 제시하고 있다. 그 학자의 정체도 의심스럽지만, 평소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 그 기독계 학자의 주장에 춤을 추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승권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 불교포커스 2011-10-12)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백승권.docx 정확한 사실에 기초해 토론하자-백승권.pdf
마성스님이 제기한 ‘아쇼카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인가’에 대한 글에서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기 식의 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불교 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에 반론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불교 근본주의자로 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다.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和諍)인.docx 아쇼카 선언’은 누구를 위한 화쟁_和諍_인.pdf
무소불위의 화쟁위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지난 해 총무원장 직속으로 출범된 조직이다. 주로 종단과 사회 현안을 불교의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다루고 그 해법을 찾자는 취지로 발족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단과 사회문제가 발생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갔는데, 작년의 경우 ‘봉은사 사태’와 ‘사대강사업’, 금년의 경우 ‘한진중노조사태’에 관여 하였고, 현재 가장 논란거리인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선언을 발표하면서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 할 수 있도록 전격적으로 발표 한 것에 대하여 일종의 ‘불교쿠데타’이자 사회와 기독교에 대한 ‘언론플레이’임을 여러차례 블로그에 글로서 올린 바 있다. 더구나 충격적인 사실은 선언문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목사’도 참여 하였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에 구성된 화쟁의 내부의 ‘기획위원회’에 기독교신학자 ‘이찬수목사’가 명단으로 올라간 것을 교계 인터넷신문의 기사에서 확인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란 것은 그 목사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글과 이번 선언문의 내용이 너무나 흡사한 내용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쟁위에서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해명은 없고 마성스님이 제기한 글에대하여 사실에 기초한다는 명목으로 글의 내용 중에 일부를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기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화쟁위가 생각하는 불교근본주의자
이처럼 화쟁위의 선언문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는데, 대체 화쟁위가 생각하는 불교근본주의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같은 화쟁위 멤버인 조성택교수가 남긴 글에서 잘 설명된 것으로 본다.
기독교가 그러니 우리 또한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일 것이다. 민족불교를 얘기하고 한반도에서 17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가 먼저 올바른 포교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궁금하다. 이 또한 ‘싸우면서 닮아가는“ 또 다른 모습일까 걱정스럽다.
(조성택교수,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 법보신문 2011.09.15)
위 조성택 교수의 글을 보면 화쟁위의 선언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가 잘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불교근본주의자들을 기독교근본주의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문자에 집착하여 바이블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실천함으로서 갈등과 긴장을 야기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서 불교근본주의자들 역시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쟁위 연기관을 보면
부처님의 법대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불교근본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처럼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다. 또 포교를 위하여 남을 귀찮게 한다든가 심지어 총과 칼로서 개종을 강요한 적도 없다.
부처님의 법대로 사는 불자들에게 “싸움하면서 닮아가는가”라며 있지도 않은 표현을 사용하여 비판하였다면, 이는 부처님을 능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능멸스런 표현은 선언문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선언문의 표기된 다음과 같은 연기관이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이것이 화쟁위에서 만든 연기관에 대한 것이다. 이 연기관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용중에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에서 주어를 바꾸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놀라운 내용으로 바뀌고 만다. 바로 이런 연기관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 말미에 “누구를 위한 선언인가”라고 깊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로버트 바스웰(Robert Buswell)교수의 특강에서
선언문에 실려 있는 연기관은 매우 생소하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연기관이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보통불자가 보기에 국적불명의 연기관이라고 글을 쓴 바 있는데, 사실 국적이 있는 연기관임을 알았다. 그것은 불교TV 사이트에서 본 ‘로버트 바스웰(Robert Buswell)교수’의 특강(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8회 )을 듣고 나서부터이다.
바스웰 교수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UCLA교수이다. 현재 동국대 학술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바스웰 교수는 한 때 출가수행자로서 삶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이 방장으로 있을 때 외국인 스님으로 약 5년간 살았는데 외국인 1세대 출가수행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바스웰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면 아쇼카선언문에 실려 있는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 불교가 공격을 받은 이유
중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 된 것은 후한시대 68년에 백마사가 건립되고 나서부터이다. 이후 중국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불교는 몇 백년이 지나지 않아 ‘비판’ 받게 된다. 이유는 “불교가 중국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불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으로서 중국인들의 민족적 가치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불교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써 먹는 보편적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중국의 경우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유교와 도교라는 고도의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된 이국종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문화적 우월감과 자주성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고 본다.
또한 불교의 가치관이 중국인들의 현세적 사고와 맞지 않은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경우 세간의 일 보다 출세간적 가치를 더 크게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점이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현실주의자들과 많은 상충을 일으킨것이다.
중국의 3무 1종 법난
그 결과 여려차례 법난이 일어 났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 3무 1종 법난’이라 한다.
중국의 3무1종의 의한 법난
No |
3무 1종 |
법난 내용 |
1 |
북위 제3대 태무제 (423~452년 )법난 |
440년에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명령을 내려 많은 승려들을 살해하고, 사원, 불상, 경전 등을 불살라 버림 |
2 |
북주의 무제 (560~578년)법난 |
무제는 유교를 신봉하여 불교와 도교를 폐지하고 많은 승려를 환속시킴 |
3 |
당의 무종 (841~845 )법난 |
도교를 신봉한 무제에 의해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한 비호감으로 |
4 |
후주의 세종 ( 954~956)법난 |
국가의 재정난과 승려들의 풍기문란에 대처하기 위해 |
이 중 두 번째인 북주의 ‘무제’에 의한 법난이 561년에 일어났는데, 이 때 유교를 신봉하던 무제에 의하여 수 천명의 승려가 승복을 벗었고 또 환속하기를 강요 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수백개의 사찰을 파괴 하였으며, 수 천개의 불상, 특히 금이나 동등으로 만들어진 불상을 녹여 황실재산으로 귀속시켰다.
불교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
이렇게 불교가 공격당하게 되자 불교계는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대응책을 찾아야 했다. 일종의 ‘살아남기위한’ 전략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에서 천태종, 선종, 화엄종과 같은 토착적인 불교전통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토착불교전통들의 특징은 중국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반영하여 중국인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불교로 발전하였다. 그래야 이국의 종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출세간적 전통에 대하여 무가치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살아 남기 위한 대응법이라고 볼 수 있다.또 성불은 영겁이 걸린다는 인도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지금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들 종파들은 어떻게 진화해 갔을까.
인도불교와 등을 돌리고
북주의 무제에 의한 561년의 훼불사건이 나기 전까지 중국의 종파들은 대부분 인도의 유사한 종파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중국인들이 불교를 인도적 관점을 통하여 보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토착 종파들이 생겨 나면서 이들은 인도적으로 해석된 불교와 ‘등을 돌리고’ 만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하는 스스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더 이상 인도에서 발생한 주석서라는 중간매체에 의존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도의 사상체계에서 등을 돌리고 직접경전을 읽어내어 중국만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만든다.그래서 이들 토착종교들은 주요경전에 대하여 ‘재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화엄경’이다.
이렇게 경전에 대하여 창조적 재해석을 통하여 교리적 권위도 확보하고 동시에 중국의 문화와 현실이 반영된 새로운 해석도 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해석학은 인도학파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중국인들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해석방법에 있어서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단일 촉매제를 찾아서
보살도라 불리우는 인도불교의 여러 수행단계들을 ‘압축’시켜 좀 더 단순한 수행체계를 만들필요가 생긴 것이다. 중국인들은 갑작스런 깨달음, 소위 ‘돈오’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수행은 즉각적, 순간적 경험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지난한 수행과정 대신 깨달음의 통찰을 가져다 줄 ‘단일 촉매제’를 찾아 나섰다. 중국인들은 ‘이것만’ 찾으면 나머지는 쉽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란 무엇일까.
먼저 보살도에 대하여 탈신화화하였다. 이는 52단계에 이르는 수행법을 압축하여 하나의 단계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만 하면 즉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단일 수행법은 없을까?” 하고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이 많은 토착불교종파의 목표이었다. 무수한 생을 거치지 않고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화엄종에서 깨달음이란?
그 방법은 “깨달음은 새로이 성취된다기보다는 원래 타고난 것을 발견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깨달은 존재가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만 제거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토착불교종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목표이었고, 특히 화엄종이 이런 특성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화엄종의 소의 경전인 화엄경은 인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다수의 개별경전을 대승이라는 사상아래 일종의 문집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화엄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로스웰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십지품과 입법계품과 같은 몇몇 산스크리트 원전이 있는 품이 있긴 하지만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편찬된 것으로 본다.
이처럼 화엄경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에서 화엄종이 발생하였는데, 화엄종에서는 이 화엄경에 대하여 ‘급진적인’ 재해석을 하게 된다. 화엄경의 상징과 비유를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중국적 사상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 통일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도 참여하게 된다.
화엄경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
화엄종에서는 인도사상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을 더럽고, 타락하고, 무상하고, 고통에 가득 찼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 존재 자체로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그믈을 형성하며, 그 그믈 안에서 각 부분들은 모두 연결되어 거대하고 완전한 전체, 일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근간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상입, 혹은 완전한 융합, 즉 원융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본개념은 이 상호관계가 개별성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로 보는 것이다.
대체 이런 사상은 어떤 사상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인도의 ‘공’에 대한 통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화엄식 인과
중론학파의 공사상에 따르면 만물에 고정된 타고난 성품은 없다는 것이다. 만물에 고정된 성품이 없으니 맺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수는 무한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맺는 관계의 산물인 것으로 본다. 마치 집에 가면 아버지라 부르고, 회사가면 사장님이라고 부르듯이 어느 하나가 우리를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을 정의하는 것은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이 광대한 상호관계의 그믈로 보는 것이다.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공성의 의미는 만물은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론적으로 보는 관점을 인도에서 강조된 인과와 결합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 이에 대하여 로스웰교수는 “각 개인은 세상의 다른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또 그들에 의해 창조된다”고 말하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와 연결된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인과는 일방이 아니라 무한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에 대한 화엄의 새로운 정의라고 한다. 그래서 인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우주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만물이 서로를 창조한다”는것이다.
‘벽돌쌓기’식의 수행을 거부하고
이러한 인과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수행에 대해서도 새로운 개념을 낳게 되는데, 그것은 “발심할 때 이미 깨달음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깨닫겠다고 발심을 하는 자체가 완벽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의 시작과 끝은 똑 같다고 말한다. 보살도 52단계 중에 어떤 단계라도 성취되면 나머지 51개의 단계가 모두 성취 된 것과 같다는 말이다. 하나만 제대로 하면 , 그 하나가 깨달음의 발심이라고 할지라도 수행의 전 단계를 완성한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이를 바로 내안에 있는 ‘깨달음의 잠재력을 깨닫는 순간’으로 설명한다.
이런 개념은 매우 혁명적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먼 미래의 수행의 전과정을 미루면서 까지 불과의 증득을 미루고 육바라밀을 닦아 성불을 미루면서 까지 육바라밀과 52단계 수행과정을 거쳐야 되지만 화엄종의 화엄경에 대한 재해석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여러 단계를 거치는 것도 화엄종에서는 관심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보살도는 ‘벽돌쌓기’식의 수행이기 때문에 현실에 바탕을 둔 중국의 토착불교의 목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증득이 아니라 수행한다는 자체가 목표라고 버스웰 교수는 설명한다.
선형적 인과법을 부수고
로스웰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토착불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몇 차례 법난을 겪고 난 중국불교가 중국의 문화에 중국인들의 현세에 대한 갈망을 무시할 수 없어서 인도불교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경전에 대한 재해석으로 인한 영향이 크다. 특히 화엄경을 재해석한 화엄종학파의 경우 수행이나 깨달음에 대한 개념도 인도불교와 전혀 다르게 개념을 정립하였다. 이런 다른 모습은 ‘연기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으로 대표된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등 불교의 핵심교리는 모두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에서 시작되는데,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연기법은 이와 다르다. 그것을 로스웰 교수는 ‘법계연기’로 설명한다.
로스웰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화엄종의 인과에 대한 설명은 매우 독특하다고 한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를 이용하여 현실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과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와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과가 ‘선형적으로’ 설명된다. 근본원인이 있고 부수적인 조건들과 합쳐져서 결과가 나오는 식이다. 주변조건이 갖추어 지면 원인이 과보를 맺는 것이다. 씨앗을 비유로 들 수 있다.
인도인들은 이 인과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만물은 모든 조건이 들어 맞아야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들이 제거되면 모든 만물이 소멸할 것이며 따라서 만물이 무상한다고 믿는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인과에 대한 개념, 성기(性起)
하지만 대승불교의 경우 선형적인 인과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중론학파의 경우 인과가 ‘공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말은 “만물에 타고난 고정된 본성이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를 ‘무자성’이라 한다. 그런데 만물이 무자성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여러가지 형태를 띠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공성이 인과를 정의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 매우 급진적인 개념의 진화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인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말한다. 깨달음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과에 대한 개념을 중국에서는 ‘성기(性起)’라고 불렀다.
여기서 성은 불성을 의미한다. 이 성은 공성, 여여, 불성등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런 불성은 중생의 마음이 깨달은 부처의 마음과 똑같다고 ‘정당화’하는데 사용하였다고 버스웰교수는 말한다.
이는 인과가 구원론적 측면에서 재해석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론이란 불교에서 해탈의 과정에 대한 이론을 말한다. 왜 이렇게 보았을까. 그것은 유정이라는 특질자체가 불성의 ‘현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처가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만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립된 존재로 우리 주변의 만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착각만 내려 놓는다면, 우리의 불성이 회복되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본 모습이 부처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성기의 개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영겁의 세월동안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 마음이 지닌 본연의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정을 지니고 의식이 있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불성이 구현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이 전부이고, 이것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아쇼카선언문과 법계연기
그런데 화엄종에서 다루는 연기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그것을 ‘법계연기’라 하는데, 법계자체가 연기라는 말이다. 사사무애적 관점, 즉 단일현상과 다수현상간의 상호침투의 관점에서 인과를 보는 것을 말한다. 단일현상과 다수현상이 동시에 서로를 창조하고 서로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과는 더 이상 선형이 아니고, 인과는 다층적인 것이 되고 만다.
하나가 이것을 만들고, 이것이 저것을 만들고, 저것이 또 이것을 만들며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서로를 만들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단일한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연기관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관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계종 화쟁위의 아쇼카선언문을 보면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화엄종의 연기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이 아닌 토착화된 중국식 불교의 연기관에 따른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기독교와 불교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교근본주의자는 나쁜 것일까
이런 논점에 대하여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비판하면 불교근본주의자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화쟁위 사무국장인 백승권 국장의 말대로 “불교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죄악시 하고 있는 화쟁위의 분위기로 보아서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초기불교신봉자들은 모두 불교근본주의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문자에 집착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와 호전적인 ‘이슬람원리주의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불교펑론가 홍사성님은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불교평론에서 기술하였다.
불교는 도리어 교리해석에서 지나치게 관용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켜온 종교다. 불교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비불교적이고 때로는 반불교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은 모두 여기에서 배태된 것이다. 불교가 이런 자기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고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가 지양돼야 한다. 그 대신 본뜻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는 근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홍사성 위원,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 불교평론 2003)
팔정도
The Eightfold path
유일신교의 근본주의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교리에 집착하여 범죄행위를 저질러 왔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기독교와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여 비불교적이고 반불교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 본질과 멀어졌다. 이런 모순과 타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경전에 근거한 근본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멀리하면 할 수록 좋지만, 불교의 근본주의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알고
처음 아쇼카선언의 연기관을 보았을 때 매우 생소하였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와 같은 연기관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연기관의 주어 부분에 불교와 기독교를 대입하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불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는 놀라운 결론이 도출되었는데, 과연 이런 정체불명의 연기관이 어디서 유래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이런 국적불명의 연기관에 대하여 의문을 품던중 마침 불교tv사이트에서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보게 되었다. 그 강의로 인하여 그런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쇼카에서 사용한 연기관은 토착화된 중국불교의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변형된’ 연기관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중국에서 몇 차례에 걸친 법난등으로 인하여 불교가 심하게 탄압을 받아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궁여지책이 아쇼카선언문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조계종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아마도 후세사람들은 한국불교에 슬픈역사가 있었다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부처님을 능멸한 화쟁위
화엄교학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현재 문제되고 있는 아쇼카선언문의 열린진리관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열린진리관에 따르면 유일신교의 교리에 대해서 열린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에게는 ‘닫힌 자세’로 일관하여 불교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조성택교수의 글에서 “싸우면서 닮아간다”든가 “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 가는가”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또 화쟁위의 실무자인 백승권 사무국장은 “근본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논지를 편 마성스님”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서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를 불교근본주의자로 ‘폄훼’ 하면서 부처님을 ‘능멸’하였다. 정말 불교근본주의자는 위험하고 나쁜 사상을 가진 자들일까.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홍사성님의 글에 따르면 “불교 근본주의는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지 말장난이나 하는 희론(戱論)이 목적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 졌을 때 불교가 왜곡되고 변질되었고, 그에 따라 자기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온갖 요란한 수사와 변명으로 호도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 중의 하나가 21세기 아쇼카쇼선언에 사용된 연기관일 것이다.
길을 잃고 헤메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그 방법은 하나 뿐이다. 처음으로 돌아 가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또 목적이 어디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왜곡되어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근본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모두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자.
2011-10-14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뇌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오장애의 극복과 생활수행 (0) | 2011.10.24 |
---|---|
열반이란 무엇인가,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듣고 (0) | 2011.10.20 |
지금 여기에서, 밧데까랏따경(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N131) (0) | 2011.09.30 |
“미리 알았더라면 인생이..” 일아스님의 가려뽑은 법구경 51개 게송 (0) | 2011.09.24 |
금강경 사구게, 니까야에도 있었네! (0) | 2011.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