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열반이란 무엇인가,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20. 12:33

 

열반이란 무엇인가,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듣고

 

 

 

 

열반은 어떤 것일까. 열반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동사열반되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강의(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3)에서 열반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세계적인 석학 버스웰교수의 설명이 있었다.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교수

 

 

 

버스웰교수는 열반의 용어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였는데,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에서  니르’는 바깥쪽, ‘바나’는 끄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니르바나는 나가다’, 혹은 불어 끄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 열반은 아무것도 없는 절멸의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 또는 비존재로 구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꺼져 다시는 불붙지 않게 되는 상태와 같은 것이라 한다.

 

 

 

 

사진 http://archantia.blogspot.com/2011_07_01_archive.html

 

 

 

여기서 불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불타는 욕망, 정념을 말하고, 불꽃이 꺼지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열반에 들면 그 사람이 열반이라는 장소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며 그저 열반상태가 되는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버스웰교수는 열반이라는 명사대신 열반되다라는 동사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부정문으로 묘사한 열반

 

열반을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굳이 언어를 사용한다면 열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열반은 ~이다와 같은 긍정적표현과 그와 반대로 열반은~가 아니다라는 부정적표현이 다 쓰일 수 있지만 열반을 개념화 하여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라 한다. 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이 언어와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열반을 부정문으로 묘사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부처님은지수화풍도 없고, 공간, 시간이나 개념, 비개념, 해나 달로 한정되지 않고, 이승이나 저승도 아닌 차원, 영역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있다고 하셨으니 이런 상태가 있기는 하나, 이는 우리의 일반적 감각적 경험이나 명상을 통한 경험을 완전히 뛰어넘는 상태라고 한다. 4선이나 4무색선으로 경험되는 것도 마찬가지라 한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열반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머무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없고, 발생하지도 않는다고 말씀 하셨다고 한다. 가지도 오지도, 그렇다고 머물지도 않는 이 상태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고정되지도, 움직이지도, 기반을 두지도 않는다. 열반은 고의 소멸이다라고 하셨다. 열반은 바로 고가 사라지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열반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버스웰교수는 열반은 어디도 아닙니다. 열반은 어디도 아닌 것이 아닌 어디입니다라고 표현하였다.

 

둘째, 부처님은 열반은 태어나지도, 만들어지지도, 조합되지도 않은 것이다.”라 하셨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왜 부정문을 사용하였을까? “열반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열반은 어떤 지식이나 개념도 뛰어넘는 것, 열반이 무엇이다 생각하는 순간 이미 열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열반이 태어나지도, 만들어지지도, 조합되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면,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조합된 이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고 한다. , 열반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이라는 의미이다.

 

긍정문으로 묘사한 열반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긍정문으로도 말씀 하셨다. 그 몇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고, 지선, 지복, 지존의 상태이며 열반을 이룬 자는 마음이 고요하고 더 할 나위가 없다. 바위처럼 바람에도 굳건하여 색성향미촉체 흔들리지 않는다.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니 해탈을 득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이 열반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버스웰교수는 긍정문이 열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대신 부처님은 열반이 아닌 것을 나열함으로서 각자가 열반에 대하여 감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열반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개념을 하나씩 배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열반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신 것이다.

 

구원의 과정으로 본 열반

 

버스웰교수는 열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접근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구원의 과정이라는 측면 즉, 어떻게 하면 열반에 다다를 수 있을지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그런 방법이 팔정도를 삼학으로 보아 계정혜를 닦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에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 통과해야 하는 세가지 문이 있다고 하셨다. 

 

이 세 가지 문은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심리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는 가에 대해 잘 묘사해 주고 있는데, 이것을 해탈에 이르는 세 개의 문 즉, ‘심해탈문이라고 한다. 이 지점은 이미 계정혜 삼학을 다 성취한 상태일 것이라고 버스웰교수는 말한다.

 

불교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을 실현하려면 세 개의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데, 그 첫번째 관문이 공해탈문이라 한다. 이는 만물이 영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서무아의 경지를 득하기 전에는 열반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은 무상해탈문이다. 열반은 상()이 없기 때문이다. 상은 특징을 나타내는 표시인데, 열반은 어떤 표식 또는 상징으로 설명되거나 인식되거나 일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열반은 감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상, 실체, 표식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관문은 무원해탈문이다. 열반은 바람이 없음의 문을 통과해야 다다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원하는 마음, 즉 욕망은 집착을 낳고 고를 낳는다. 열반을 원하는 마음은 고를 가져올 뿐이라 한다.

 

열반은 열반을 포함, 모든 대상에 대한 욕망이 소멸되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반을 욕망하면 열반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집착의 근원인 욕망을 끊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고 버스웰교수는 강조한다.

 

무원해탈과 뗏목의 비유

 

무원해탈과 관련하여 버스웰교수는 불교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 대한 집착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열반을 욕망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정녕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불교에 집착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불교를 포함, 이 세상의 모든 만들어진 것에 대한 집착을 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어서 버스웰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궁극적으로는 스러질 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도록 도와주는 종교적 구원의 틀로 유용한 것 뿐입니다.”

 

(로스웰교수, 불교TV-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4)

 

 

버스웰교수는 욕망을 놓는 것, 즉 무원의 과정은 가르침 자체에도 적용된다고 하는데,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불교자체에 대한 집착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부처님의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현세인 차안과 열반인 피안 사이에 성난 생사의 강물이 흐를 때, 이 강이 한강처럼 강폭이 넓다면 결코 혼자 건너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나무가지등을 역어 뗏목을 만들어 열심히 노를 저의면 건너 갈 수 있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강을 다 건너고 나서도 그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강변에 놓고 갈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라 한다.

 

불교는 이 뗏목처럼 임시로 여러가지 가르침과 종교적 수행법을 얼기설기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부처님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이 성난 생사의 강물을 넘을 수 있도록 만드신 방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처음에 이 가르침을 사람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보시고 사람들이 거센 강물을 건널 수 있도록 일련의 교리와 수행법을 엮어 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진정 그 가르침을 체화하려면 그 가르침 자체에 대한 애착도 놔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은 마지막 해탈문인 무원 해탈문을 지나야만 다다르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해탈과 열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때 열반은 최종목표이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해탈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해탈은 여러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해 놓은 것이 청정도론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일곱가지 청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칠청정 자체가 해탈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리랑카 아상가교수는 불교tv사이트에서 해탈과 청정은 같은 개념이라고 말하였다. 즉 청정과 해탈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칠청정은 계정혜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계청정

(sīla visuddhi)

 

 

2

마음청정

(citta visuddhi)

 

 

3

견청정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

(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

(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

(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

(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

(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

(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

(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

(anuloma ñāna)

6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

(gotrabhu ñāna)13

7

지와 견에 의한 청정

(ñ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

(magga ñāna)

15

과의 지혜

(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

(paccavekkhaa ñāna)

2011-10-20 진흙속의연꽃

 

  칠청정과 16단계_계정혜_111020.doc  칠청정과 16단계_계정혜_111020.pdf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을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일곱가지 청정에 대하여 계정혜별로 분류 하였는데, 혜가 다섯가지로서 가장 많다. 이런 혜청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16가지 지혜가 성숙해야 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16가지 지혜를 닦아나가는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위빠사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와 같은 지혜수행 과정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위빳사나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행자는 수행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 결심이 서고 무상이나 괴로움 또는 무아 중 하나에 확고하게 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무상에 확고하게 되고, 집중이 강한 자는 괴로움에 확고하게 되고, 지혜가 강한 자는 무아에 확고하게 된다.

 

이렇게 위빳사나의 마지막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바로 출세간 도의 해탈을 체험하는 경지로 접근하게 된다. 그것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바로 이 공함, 표상업음, 원한없음이다. 그래서 이 세가지를 해탈의 관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명상주제의 길라잡이, 35 세가지 해탈의 문)

 

 

위빠사나 수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해탈문이라 하였다.

 

해탈문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해탈문은 칠청정과 16단계 지혜에 있어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와 같이 머물 때 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되어 일곱 분 성자들의 분류를 위한 조건이 된다.

 

(청정도론, 21장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66)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해탈의 관문 16단계 지혜에 있어서 11번째인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다음이라 볼 수 있다. 계와 정과 혜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엮은 뗏목을 타고 드 넓은 생사의 강을 건너서 피안(열반)에 도달하기 일보직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해탈에 관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모든 상카라들이 한정되어있고 둘러쌓여있는 것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표상이 없는(無相) 경지(dhatu,)로 들어가게 한다.

 

② 모든 상카라들에 대해 마노를 분발시키고, 마음이 원함이 없는(無願) 경지()에 들어가게 한다.

 

모든 법들을 타인으로 보게 하고, 마음이 공()한 경지()로 들어가게 한다.

 

(청정도론, 21장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67)

 

 

 

더 이상 표상이 일어나지 않을 때

 

먼저 첫 번째 해탈의 관문인 무상해탈의 경우 마음의 표상이 없는 경지라 하였다. 이는 열반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에 표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음의 법이 일어날 조건이 되기 때문에 결코 열반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윤회가 일어나는 원인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윤회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 죽음의 마음 (cuti-citta)’이 일어날 때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 (jāti-nimitta)이 일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가지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paisandhi-vinñāa)’ 이 일어남으로서 끊임없는 윤회가 반복 되는데, 마음에 표상이 일어나지 않은 무상이라면 다음에 일어날 법의 조건이 상실되었으므로 마음이 표상이 없는(無相) 경지(dhatu,)로 들어가게 한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열반을 말한다.

 

전도(顚倒)된 인식이란

 

두 번째의 무원해탈과 세 번째의 공해탈의 경우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원함없음의 관찰은 바로 괴로움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행복을 원함과 갈망함을 버린다. 공함의 관찰은 바로 무아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자아가 있다라는 고집을버린다.

 

(청정도론, 21장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17)

 

 

이렇게 보았을 때 세 가지 해탈은 결국 무상, , 무아에 대한 통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전도된 인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전도(顚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상하고, 괴로움이고,무아이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고,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라 한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의 세 가지가 있다.

 

(청정도론, 21장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53)

 

 

전도의 사전적 의미는 엎어져서 넘어짐이지만 또 하나의 의미는 위와 아래를 바꾸어서 거꾸로함이다. 이처럼 거꾸로 생각하는 것을 전도된 인식이라 하는데, 어떤 대상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전도몽상이다. 부처님은 오온을 포함하여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라 하였다. 이는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통찰로도 이어진다. 그래서 세 가지 해탈문을 통과하려면 현상이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 깨끗하다()고 여기는 전도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의 빠라야나왁가(Parayanavagga)에서

 

이처럼 세 가지 해탈문을 통과하여야 열반에 이를 수 있는데, 열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초기경전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의 제5품 빠라야나왁가(Parayanavagga)에 실려 있는 내용이라 한다.

 

 

부처님의 제자 우파시바, 세존이시여, 도움없이 혼자 이 거센 물줄기를 건널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며, “세존이시여, 저에게 붙잡고 의지하여 강물을 건널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상을 자각하여 집중하며 존재없음에 의지하면 물줄기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은 열반에 대한 어떠한 상이나, 개념에 대한 애착을 버리면, 버리는 과정이 강을 건너는 그 자체라는 의미와 같다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을 끊고 말을 놓아야 한다.”라고 말씀 하셨는데, 여기서 말을 자제하라는 것은 개념화를 경계하는 것이다. 언어화는 근본적으로 개념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애착의 소멸을 위해 밤낮 없이 정진하라.”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는 집착을 놓기 위한 수행을 하라는 이야기이다. 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에 대한 애착, 심지어 열반에 대한 액착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서술

 

제자는 열반의 경험이 영속되는지 아니면 다시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가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버리고,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끊고, 존재없음을 의지하고, 상념의 가장 높은 해탈에 도달한 이는 물러남이 없이 거기에 머물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맞다고 하셨다. 조건이 맞으면, 즉 존재없음에 의지하면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우파시바가 열반에 계속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 또 질문한다. 존재없음에 의지하는 마음상태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만약 그가 물러남 없이 여러 해 동안 거기에 해탈하여 청량하게 머무른다면, 그에게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것은 실제의식이 있는 상태인가, 정확히 어떤 마음 상태인가를 질문한다. 여기서 청량하다는 말은 욕망, 집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아마 열반에 관한 가장 유명한 서술일 것이라고 버스웰교수는 말한다.

 

 

 

① 버스웰교수역

 

바람에 불씨가 꺼지면

개념이 사라진 곳으로 없어지듯이,

성인은 몸과 마음에서 해탈하여

개념이 사라진 곳에서 편히 머문다.”

 

(숫따니빠따 5장 피안, 학인 우빠시바의 질문)

 

 

②전재성박사역

 

우빠씨바여, 가령 바람의 힘에 꺼진 불꽃은

소멸되어 헤아려지지 못하듯,

성자는 정신적인 것들에서 해탈하여 소멸되어

아무도 그를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숫따니빠따 제5품 빠라야나왁가(Parayanavagga),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 전재성역)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전재성역.docx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전재성역.pdf

 

 

③타닛사로 비구 영역

 

As a flame overthrown by the force of the wind

           goes to an end

           that cannot be classified,

so the sage free from naming activity

           goes to an end

           that cannot be classified.

 

(Thanissaro Bhikkhu, Upasiva-manava-puccha: Upasiva's Questions)

 

 

 

 

제자의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한다. 이 질문은 불이 꺼지면 불꽃은 어디로 가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한다. 불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곳에 더 이상 없는, 꺼져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어디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열반에서의 마음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꺼진 상태라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세상을

 

이런 류의 질문은 이것이 허무주의인가요? 성인이 되면 그 존재가 사라진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천국같이 영원불멸의 상태인가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우빠시바도 그런류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 편히 가 있는 그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완전히 사라자는 것입니까. 아니면 병고에 시달림 없이 그곳에 영원불멸하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말씀해 주십시요, 이 다르마, 현상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도 유명한 것이라 한다.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①버스웰교수역

 

그곳에 편히 머물고 있는 자를

헤아릴 기준은 없다.

이름 지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다르마, 경험이 끊어지면

모든 개념도 함께 끊어진다.

 

(숫따니빠따 5장 피안, 학인 우빠시바의 질문)

 

 

②전재성박사역

 

우빠씨바여,

소멸해 버린 자는 헤아려질 기준이 없습니다.

그들이 연명할 수 있는 것이 그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들이 깨끗이 끊어지면

언어의 길도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숫따니빠따 제5품 빠라야나왁가(Parayanavagga),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 전재성역)

 

 

 

③타닛사로 비구 영역

 

One who has reached the end

           has no criterion 

by which anyone would say that —

           for him it doesn't exist.

When all phenomena are done away with,

           all means of speaking

           are done away with as well.

 

(Thanissaro Bhikkhu, Upasiva-manava-puccha: Upasiva's Questions)

 

 

 

실제 열반을 경험하지 않고 이를 묘사하려 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에게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 개구리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 , 사람, 건물, 그 엄청난 다양성을 인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이다.

 

개념과 애착을 놓으면

 

사람도 마찬가지로 열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든 개념, 언어가 열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반은 이런 것이다하고 그 경험을 묘사하는 모든 것들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열반에서 편히 머물고 있는 자를 헤아일 수도 정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정의는 열반을 한정시켜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열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버스웰교수는 말한다. 그것이 열반인데, 이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을 제외한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개념과 애착을 놓으면 열반이 무엇인지 직접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2011-10-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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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전재성역.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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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청정과 16단계_계정혜_111020.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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