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자연의 무상설법과 열반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0. 31. 14:33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자연의 무상설법과 열반

 

 

 

부처님당시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서 아라한이 되었다는 초기경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또 어느 가수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한 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노래를 지은 것이 대 히트를 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나뭇잎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잎사귀가 매우 컷을 것으로 여겨진다.

 

유아론적 무상함

 

오동잎과 같은 커다란 잎사귀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갑자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자연의 무상함을 느끼지만, 자신만은 영원히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지금 이 젊음, 이 활력, 이 행복이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의 무상함을 자신의 무상함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불교의 삼법인에서 제행무상은 느끼지만 제법무아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는 무상함을 느낀다고 해서 불교적 깨달음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나와 나의 자아와 나의 영혼은 불변하다고 생각하는 유아(有我)’론적 견해의 상태에서 느끼는 제행무상은 결코 불교적 깨달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많이 먹어 인생의 끝자락에 다가서 있는 노인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무아론적 무상함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제행무상 뿐만 아니라 제법무아임도 느끼게 된다. 특히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일 수록 더욱 더 절실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 보면서 언젠가 나도 저 낙엽처럼 떨어지고 말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빨이 빠져 더 이상 씹는 것도 어렵고, 머리는 빠져 허였게 변해 가고, 몸의 모든 기능이 예전과 같지 않을 때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된다. 그 때 자연의 변화와 더불어 자신도 변화하였을 비로소 알게 되는데, 이는 자연으로부터의 제행무상 뿐만아니라 나 자신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된다.

 

그런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나라는 것을 알게 된디면, 나라는 존재는 제법무아와 함께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나를 바라보면슬픔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삼법인에서 말하는 일체개고일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형성된 모든 것들은 반드시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은 제행무상의 가르침이고, 그 나뭇잎을 바라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떨어질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제법무아의 가르침이고, 그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슬픔을 느낀다면 일체개고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떨어지는 낙엽을 단지 무상하다고 느끼는 것과 이를 통하여 무아와 슬픔까지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는 노인이 유아론적 믿음을 가지고 보는 무상함으로는 결코 불교적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어떤 이는 아라한이 되고, 또 어떤 이는 단지 감상에 젖어 좋은 노래를 만들기도 한다. 이 차이는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를 제행무상의 과정에 있는 나로 보는 것과, 나와 제행무상과는 별개라고 보는 것과의 차이라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서 자연이 무상함을 느끼지만, 대부분 자신과 관련 없는 것이라 여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어떤 이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슬픔을 느껴 인생 또한 덧 없음을 느낀다. 더구나 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도록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면 그 비참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법구경에 늙음(Jaravagga, Aging)이라는 주제로 여러게송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늙음의 비참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Acaritvā brahmacariya     아찌리뜨와 브라흐마짜리양

aladdhā yobbane dhana   알랏다 욥바네 다낭

jiṇṇakoñcāva jhāyanti        진나꼰짜와 자얀띠

khīamaccheva pallale.      킨아맛체와 빨랄레.

 

젊어서 청정하게 살지 않고

재산을 모으지 못했으니

고기 없는 연못의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

(Dhp 155)

 

 

Acaritvā brahmacariya     아짜리뜨와 브라흐마짜리양

aladdhā yobbane dhana   알랏다 욥바네 다낭

senti cāpārikhīnāva           센띠 짜빠띠키나와

purāāni anutthuna         뿌란아니 안욷투낭.

 

젊어서 청정하게 살지 않고

재산을 모으지도 못했으니

쏘아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 옛날을 애도 한다.

(Dhp 156)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나이만 먹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워 오는데, 이를 물기 없는 연못에 서 있는 늙고 병든 백로와 쏘아 버려진 화살에 비유하였다. 젊은 시절 수행을 하여 도를 이루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심히 노력해서 재산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닌 늙은이를 빗대어 말한 게송이라 볼 수 있다. 

 

, 집을 짓는 자여!

 

이처럼 세월과 함께 덧 없이 나이만 먹다 보면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또 나고 태어나는 윤회를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가르침을 펼쳤는데, 그것은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 자라왁가(Jaravagga, 늙음의 장)편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깨달은 바를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nekajātisasāra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 anibbisa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     둑카 자띠 뿌납뿌낭.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지은 이를 찾아 기웃거렸지만

찾지 못한 채 여러 생을 보냈으니

생존은 어느 것이나 고통이었다.

(Dhp 153)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ta visankhata     가하꾸땅 위상카땅

visankhāragata citta     위산카라가땅 찟땅

tahāna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Dhp 154)

 

 

 

 

 

 

 

 

 

이 게송 두 개를 흔히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한다. 이 게송에서 서까래는 번뇌를 말하고, 대들보는 무명을 말한다. 마치 대들보가 서까래를 지탱해 주고 있듯이, 모든 번뇌의 원인을 무명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집짓는 자는 누구일까.

 

12연기에서 윤회하는 원인으로 무명과 갈애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무명은 현재 나를 있게 한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지금 업을 지음으로서 미래 윤회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과거의 무명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나가 있고, 그 나는 갈애와 갈망과 욕망을 일으켜 미래에 윤회할 구실을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 계속 집을 짓게 되는데, 부처님은 집 짓는 자를 보았다고 하였다.

 

집을 짓는 자는 갈애로서 이는 미래의 윤회가 원인이다. 따라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집을 짓게 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번뇌라는 서까래, 무명이라는 대들보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갈애를 일으킬 대상이 없어서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닙바나(열반)’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

 

이런 닙바나상태는 대승불교에서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여래장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불교에서 해탈이라는 말은 있어도 열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마음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이 한마음은 끊어짐 없이 모두 연결된 하나의 마음으로서 본마음, 진여, 참나등으로 불리운다. 그래서 수행을 하여 깨닫는다는 의미는 이 한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청정을 의미하는 해탈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여도 열반이라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할 수 없고,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일어난 마음은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고 조건을 남기고 사라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마음이 일어 날 수 있는 조건을 남겨서 일어나고 사라기를 반복하며서 상속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말하는 무아이다. 그런데 마음이 일어날 조건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일어날 조건으로 갈애를 들고 있다. 무엇인가 바라는 갈망이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행위를 짓게 되고, 그 행위로 인하여 업의 존재가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갈망을 일으키지 않아 업이 생성되지 않았을 때 더 이상 다음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의 오도송에서와 같이 집 짓는 자를 찾았다고 하였다. 그 집 짓는 자는 갈애를 말한다. 그래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닙바나에 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으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이 상속됨에 따라 흐르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 다음 마음이 일어날 조건이 소멸된다면 거기에서 마음이 끝나게 된다. 그것을 열반이라 히는데 이는  초기불교에서 마음을 무아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대승불교의 경우 하나의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유아론적이라 볼 수 있고, 그래서 마음이 끊어 질 수 없어서 열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해탈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열반에 들었을 때 더 이상 나고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마음이 없는데 나고 죽고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상태에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이고, 깨끗하다()는 인식 역시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열반은 마음이 없는 상태이므로 상락아정이 있을 수 없지만, 마음을 하나의 마으로 보는 대승불교에서는 가능한 말이라 본다. 그래서 대승열반경에서는 열반을 상락아정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마음을 하나의 마음으로 보느냐 상속하는 마음으로 보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상속하는 마음에서 상속하기 위한 조건이 소멸되어 열반에 들었을 때 마음이 없으므로 더 이상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상태에 대하여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thā pubbulaka pass     야타 뿝불라깡 빠쎄

yathā pass marīcika       야타 빠세 마리찌깡

eva loka avekkanta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레자 나 빠싸띠.

 

만일 누구든지 간에 세상 보기를 물거품같이 보고

자기 마음을 아지랑이 같이 본다면

그의 발자취, 마라도

그 주인을 찾지 못하리.

(Dhp 170)

 

 

여기서 마라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염라대왕같은 존재이다. 마음이 없으니 죽은자들을 관장하는 마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고디까경(Godhika sutta)경에서

 

이와 같은 예는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고디까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기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너희들은 저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느냐?"

 

[수행승]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고디까경-Godhika sutta, 상윳따니까야 S4-23, 전재성박사역)

 

 

고디까경에서 고디까는 여섯 차례에 걸쳐 일시적 심해탈을 이루었으나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일곱번째로 일시적 심해탈을 이루었을 때 고디까비구는 이미 마음의 해탈을 얻은 상태이었으므로 그 마음의 해탈상태에서 죽기를 원한 것이다. 그래서 칼로 자신의 목의 동맥을 끊어 자결하였는데, 이를 보고 달려온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힌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고디까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말씀 하셨다. 마라 빠삐만이 고디까의 식(마음)을 찾고 있지만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으므로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마음이 하나로 죽 연결된 것이 아닌 상속된 것으로서, 마음이 어디선가 끊어지면 더 이상 마음이 상속되지 않아 열반에 든 것이라는 사실을 초기경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연의 무상설법

 

어디를 가나 단풍이 절정이다. 빨강 노랑으로 물들은 단풍을 바라보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조만간 모두 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예고 하는 것 같다. 잎이 모두 떨어지기 전에 활짝 핀 꽃처럼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단풍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아름답다고 말하며 즐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곧 떨어지고 말 것 같아 아쉬워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극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봄이 오면 온통 벚꽃으로 뒤덥혀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고, 가을이 되면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잎이 떨어짐으로서 다음 해를 기약한다.

 

이는 자연의 말없는 설법과 같다. 그래서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무상설법이라고 말한 이도 있다. 그런 무상설법의 극치가 아마도 떨어지는 커다란 나무 잎사귀를 보고 아라한이 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2011-10-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