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오온과 와지라경(Vajira-sutta, S5.1.10)
스님의 영혼이야기
매일 아침 불교방송을 듣고 있다. 아침 6시 이전에 경전공부시간에는 D스님의 법화경을 듣고, 6 시 이후의 불교강좌시간에는 S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주로 선사들이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하여 강의나 법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교에 대승의 가르침만 있는 것은 아닐진데 요즘의 불교방송의 경우 모두 대승불교에 대한 가르침일색이다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초기불교에 대한 강좌나 법문을 듣고 싶어도 그런 방송을 하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다. 불교방송은 오로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의 강의는 진아론적 법문일색이다. 또 영혼론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인천 Y선원 S스님은 다음과 같이 법문하였다.
새로 몸을 받아나지 아니한 영가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바로 중음신의 상태인데 그 중음신은 너무 외로운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누가 밥한그릇 물한모금 주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금방 천당으로 가든지 사람으로 태어나든지 빨리 태어 났으면 좋겠는데, 생존시에 애착심, 인간에 대한 애착심, 또 재산이나 명예 권리 그런 것에 대한 집착심, 탐착심, 그런 애착과 탐착심으로 꽉 차가지고 그것을 버리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되면 죽은 뒤에도 10년, 20년, 30년 내지 백년이 되어도 새몸을 받아나지 못하고, 그 애착있는 곳을 맴돌며 배고픔과 외로움과 증개심과 원한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와 모든 친척 영가들은 여러분의 신심으로 만년 위패를 이 법보전에 봉안을 하고, 아침마다 그 영가를 위해서 축원을 하고, 법회때 마다 그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들려 주며, 명절 때 마다 천도를 해 주고, 또 칠월 백중 결재 해제 이러한 특수한 날에 대 천도재를 올려 드립니다.
(인천 Y선원 S스님, BBS불교방송 불교강좌-S스님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1-12일자)
천도재
인천 Y선원 S스님은 법문을 참 잘한다.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스님은 말을 조리 있게 하고 누구나 알아 듣기 쉽게 설명한다. 그런데 스님은 법문 도중에 종종 ‘게송’을 읊기도 한다. 한문으로 된 게송을 마치 노래하듯이 특유의 음성으로 읊는데, 게송의 말미에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을 하며 끝을 맺는다. 이때 신도들도 함께 “나~무~아~미~타~불~”하며 명호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법문에 관한한 ‘달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법문이 막힘이 없고 표준어를 사용하여 매우 매끄럽다. 하지만 선승이다 보니 ‘진아론적’ 법문위주이다. 그리고 종종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위의 법문 내용처럼 ‘영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스님은 법문을 할 때 마다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영혼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몸뚱이’가 죽으면 또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으로 말한다. 이런 류의 ‘몸갈아입기’ 식의 법문은 선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런 식의 법문은 모든 존재에 궁극적실재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아뜨만’이 있다고 보는 ‘개아론’인데, 이는 다름아닌 영혼론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선사들 표현식으로 한다면 ‘몸뚱이’만 죽는 것이지 한 존재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영혼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영혼이 진짜 나를 찾아 가는 여정을 깨달음으로 보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힌두이즘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영혼이 있다고 오해할까 봐
힌두이즘은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의 브라마니즘을 계승한 것이라 한다. 브라만교가 환골탈태한 것을 힌두이즘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모든 존재에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무더기로 분해하여 설명하였다.
이렇게 분해하여 설명한 이유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나, 나의 것, 자아, 영혼이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단지 몸뚱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몸뚱이는 색으로, 정신은 수상행식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구분해 보니 그 어디에도 나, 나의 것, 자아, 영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었다. 이런 가르침은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바지라]
“그대는 왜 뭇삶이라고 집착하는가? 악마여, 그것은 그대의 사견일 뿐.
단순한 행위(業)의 집적인데 여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Kinnu sattoti paccesi māradiṭṭhigatannu te,
Suddhasaṅkhārapuñjoyaṃ nayidha sattūpalabbhati.
Yathā hi aṅgasambhārā hoti saddo rato iti,
Evaṃ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3.)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Dukkhameva hi sambhoti dukkhaṃ tiṭṭhati veti ca,
Nāññatra dukkhā sambhoti nāññatra dukkhā nirujjhatīti.)
(바지라경-Vajirāsuttaṃ.- Bhikkhuni Vajira, 상윳따니까야 S5.1.10, 전재성박사역)
바지라경(S5.1.10).docx 바지라경(S5.1.10).pdf
와지라(Vajirā) 비구니가 탁발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나무밑에 앉아서 선정에 들려고 하는데, 이 때 마라 빠삐만이 나타나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 뭇삶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뭇삶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뭇삶은 어디에서 사라지는가?”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와지라비구니가 게송으로 응답한 것이 유명한 ‘수레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이 게송은 밀린다왕문경에서도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내용이라 한다. 이는 자아나 영혼이 없음에 대하여 예를 들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온을 설명할 때 종종 활용되기도 한다.
수레가 바퀴와 바퀴살 등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수레라는 명칭만 있을 뿐이지 분해하여 놓고 보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바퀴와 바퀴살 등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놓고 보면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무더기로 이루져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이 다섯가지 무더기에 대하여 나, 나의 것,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한다고 한다. 다섯가지 무더기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상호작용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실재하지만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조건에 따라 법이 일아나고, 살아지고, 상속한다는 연기적으로 설명된다.
한국불교에 영혼이 없다면
이렇게 부처님이 오온으로 분리하여 설명한 것은 한마디로 고정불변한 자아나 영혼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초기경을 보면 오온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나오고 이 오온의 상호작용에 따른 연기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대승불교, 특히 우리나라 선불교에서는 선사들이 법문에서 오온에 대하여, 연기법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이 그토록 부정하였던 영혼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 영가를 모신 위패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천도재를 지내게 될 근거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영혼이 있어야만 사찰경제가 유지되는 것이 한국불교의 실상이다.
하지만 영혼을 인정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하였던 아뜨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힌두교화 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 하나
유일신교가 득세하고 있는 한국에서 유일신교 교리중에서 창조론과 영생론을 들 수 있다. 영생론은 영혼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지금 살아 있을 때의 영혼이 죽어서도 영생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이 영혼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창조론’이다. 비록 한국적 불교현실에서 영혼은 있다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창조론을 인정한다는 것은 불교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호진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문제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 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호진스님,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
불교인이_보는_기독교_호진스님.doc 불교인이_보는_기독교_호진스님.pdf
전동국대교수이자 승가대총장인 호진스님은 불교인이라면 창조론을 인정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 즉, 일체유심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더구나 바이블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와 창조주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심한 반발을 느낄 것이라 하였다. 그런 신은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하지고 않고, 오히려 무지, 무능, 무자비, 독선 같은 것들만 느끼게 될 것이라 한다.
이처럼 불교인이라면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창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유일신교의 교리도 진리로 인정하자고 소위 종교평화선언 초안(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180도 다른 주장인데, 더구나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창조론을 비판한 그 창조론을 인정하자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꾸로 가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영혼론과 창조론은 불자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있어서 참나를 찾자는 것을 주장한다면 이는 힌두교화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영혼이 있다고 하면서 창조론도 진리라고 받아 들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화가 진행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에서
하지만 부처님은 이 모두를 비판하고 부정하였다. 그리고 연기법적으로 논파하였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보기이다. 분해해서 보면 나, 우리라는 말이 단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초기경의 도처에 오온, 십이처, 십팔계등이 수 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대승불교에서 보기 힘든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반야심경)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온(色受想行識)도 없고, 십이처(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와 십팔계(眼界 乃至 意識界), 십이연기(無明 亦無明盡 乃至 無老死), 심지어 불교의 가장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사성제(苦集滅道)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오온 등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은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다.
비록 공의 입장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모조리 부정된 것이다. 만일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계승하였다면 무(無)자로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별도의 대승경전을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경전을 만들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길로 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불교의 발전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완전한 것이고, 덜 완성된 것이라는 뉘앙스이다. 이는 ‘초기불교(Early Buddhism)’에 대하여 ‘원시불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무언가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아서
이와 같은 시각은 현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현응스님은 자신의 글 기본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실재론적 대승불교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므로, 그 어떠한 실재(實在)도 세우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존재나 가치도 절대적이지 못하며, 덧없으며 허망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에는 브라만교가 있어 ‘브라만’이라는 보편적 실재를 중심에 놓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브라만교는 모든 가치가 브라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당시에는 객관적 실재론, 주관적 실재론, 일원적 실재론, 다원적 실재론 등 다양한 실재론을 표방하는 가르침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교가 출현함으로써 인도사회는 다양한 실재론을 내세우는 여러 종교와 어떠한 실재도 인정하지 않는 불교로 크게 이분되었다. 불교 이외의 종교나 가르침은 모두 실재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당연히 비실재론의 불교와 실재론의 여러 종교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
가정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불교도들에게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다. 도대체 실재를 전제하지 않은 세계가 가능한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神)이나 존재의 본성 같은 실재가 없다면 우리 삶의 가치는 어디서 유래되며, 행동의 동기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비단 다른 종교인들의 질문뿐만 아니라, 불교도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딜레마는 불교 내부에서 교리적으로 모색하여 해결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인도사회에서 불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들과 많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현응스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0-09-06)
기본불교와 대승불교-현응.pdf 기본불교와 대승불교.docx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특징이 무아인데, 무아를 주장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이 실재를 전재로 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일어난 요인중의 하나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 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삶을 열심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보다 진전된 불교 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불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교리적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을 포함하는 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현응스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0-09-06)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무아이므로 대중들이 무언가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에 무리가 있어서 실재론적으로 접근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한다.
자꾸 바꾸고 또 바꾸다 보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결국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불완전한 것, 덜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 보완한 것이 대승불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불교의 퇴보’이고 넌센스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선사들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어느 스님은 초기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2000년전에 이미 결론난 사항이라고 일축하기도 하고, 어느 불자는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진 경전에 얽매이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초기불교를 신봉하하는 사람들은 초기불교 자체가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고칠것이 없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현대적 지식과 무관한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우주 자연의 ‘근본법칙’이자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대에 따라 교리가 바뀐다면 앞으로 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알 수 없다. 인도대륙에서 대승불교가 밀교화 되면서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졌듯이, 한국불교도 현재 득세하고 있는 유일신교로 사라질지 모른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훼손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바꾸고 또 바꾸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는 정반대의 현상까지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형하는 것은 불교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를 망가뜨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하였던 ‘영혼론’이 대표적이다.
도로 브라만교
현재 한국의 불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유일신교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마치 종교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듯이 유일신교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공격으로 공존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때 유일신교의 교리에서 보여지는 영혼론을 이야기하거나 창조론을 용인한다는 것은 한국불교가 마치 풍전등화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말할 필요없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불교의 퇴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근본가르침을 접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이는 현응스님의 글에서 무아만 이야기하면서 허망한 것으로 몰고 가지만 연기에 대한 것을 안다면 결코 대승불교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응스님의 글에는 연기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보이지 않는다. 또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단지 호흡수행정도로 치부 할 뿐 해탈과 열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렇게 승가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스님의 인식이 이러하다면 앞으로 한국불교가 정체성혼란을 더 겪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초기경을 공부하다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몰라서 공부를 못한 것일 뿐이다. 이를 법화경의 ‘의주유(衣珠喩)’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귀한 보물을 옷에 넣었으나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의주유’이다.
이처럼 이미 갖추어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이제까지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보물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후기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공사상, 유식사상, 여래장사상, 불성 등 끊임없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보는 한국불교는 제관의 종교라고 불리우는 ‘도로 브라만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2-01-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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