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영혼론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 21. 10:56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영혼론에 대하여

 

 

 

자 이야기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들은 이야기이다. 2011년 봄 혜문스님이 진행하였던 알기 쉬운 불교이야기에서 스님은 자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스님들이  편지를 붙일 때 보통 ‘OO스님이라 하지 않고 ‘OO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스님들끼리만 사용하는 일종의 은어인 셈이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댓글을 많이 받는다. 주로 올리는 법우님들이 자주 보이지만 어느 경우 생소한 필명도 많이 보게 된다. 그런 경우 짧고 소박한 문체가 대부분으로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올린 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감사의 글이다.

 

반면에 노골적인 비난이나 비판의 글도 없지 않다.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예사이고, 심지어 글을 가져가 난도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 마치 난자당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보여 진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왜곡하고 유포하는 행위는 불자들에게 큰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발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주로 블로그에 장문의 글을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 많은 법우님들이 찾아 와 글을 남겨 주시는데, 그 중에 스님도 많은 것 같다. 그런 글은 필명으로도 알 수 있고, 남긴 글로서도 파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출가수행자들의 글은 차분하고 논리가 있고 배려심이 깊기 때문이다. 그런 글 중에 영혼론에 대한 것을 보았다.

 

영혼, 있다 없다

 

스님의 글로 보여지는 댓글에서 영혼은 당연히 있다고 말한다. 또 영혼이 없으면 법을 모욕하고 진리에 어긋난다고 한다. 또 업은 업을 지은 주체가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혼체가 없다고 하는 논리를 펴면 불교가 망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영혼이 업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유전한다는 논리와 같다. 이런 글에 대하여 청화스님은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산스님!
영원불변한 영혼은 당연히 없습니다
.

부처님은 영원불변한 실체로서의 영혼, 자아를 부정하셨지요
.
존재의 불변성, 영원성을 인정하는 한
,
불교의 연기법과 그러한 연기의 법칙에 의해 취산(
聚散)하는 모든 연기적 존재인
제법의 세 가지 특성을 가르치고 있는 무상, 고 무아의 교설 또한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

당연히 부파불교의 번잡한 교설을 비판하면서 흥기한 대승불교 경전에서도

영원한 자아, 영혼이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

예컨대 <금강경>에서도


                     "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過去心不可得)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가 없으며(現在心不可得
)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未來心不可得
)."

라는 표현으로 마음의 영원성, 불변한 실체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영혼, 자아가 없는 무아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 실체의 마음을 찾고 붙잡으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
물론 선가(
禪家)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요....

불교에서 영혼이 없다고 교설한다고 해서 마음이 실상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
, mano), (, citta), (, viññāa)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실상은
지금 이 순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작용합니다
.
단지 그러한 마음은 원인(
)과 조건(),
곧 인연에 따라 찰라에 생겨났다가(刹那生) 찰라에 사라지는(刹那滅
)
무상한 변화작용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수시변역(
隨時變易), 매 순간 변화작용하여 덧없이 흘러가는 무상하고 무아인 우리의 마음,
어제 일으켰던 과거의 마음과 오늘 일으키는 현재의 마음과 내일에 일으키게 될 미래의 마음 중에서

과연 어떤 마음을 나의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자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당연히 불가득(不可得)일 뿐입니다...._()_

 

(청화스님)

 

 

청화스님은 영혼은 당연히 없는 것이라 하였다. 금강경의 유명한 게송인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의 예를 들아가며 연기법적으로 설명한다. , 마음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찰라생, 찰라멸하며 상속하는 것이 마음의 실상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산스님은 찰나생, 찰나멸하는 마음(citta) , 마나스는 영혼체가 아니라 한다. 그런 영혼체는 자기의 주인으로서 죽으면 빠져 나가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힌두교의 상일주재하는 아트만을 부정하셨지 영원체가 없다고 말씀하신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경전적 근거를 요구하자 산스님은 상일주재하는 아트만이 무엇인지 부터 공부하셔요!”라고 하였다.

 

영혼장사

 

인터넷에서 영혼논쟁과 더불어 윤회논쟁 또한 큰 이슈중의 하나이다. 이런 논쟁은 이미 부처님당시 부처님이 연기법적으로 설명되고 논파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거론 된다는 것은 불교계의 힘을 분산하고 약화시키는 결과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2600년 전에 결론이 난 사항에 대하여 지금 이 시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불교계의 커다란 손실이다.

 

유일신교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정법불교, 근본불교, 수행불교로 민중들을 교화하여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있다고 하여 영혼장사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다.

 

참고로 천도재의 경우 대가성이 있다하여 연말정산시 소득공제도 되지 않는다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영혼장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장사는 매우 비불교적일 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단물을 빨아 먹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불교가 중흥하기 위해서는 불자들의 단물만을 빨아 먹는 듯한 영혼장사는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M38)

 

그렇다면 부처님은 영혼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영혼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을 하여 보았다. 그 결과 맛지마니까야의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M38) 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말로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으로 번역되었는데, 경에서 부처님은 의식과 윤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이야기하였다.

 

 

8.

[세존]

“싸띠여,

어떠한 것이 그 의식인가?

 

 [싸띠]

“세존이시여,

그것을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세존]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나를 잘못 대변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대응경: 한역중아함경201 다제경)

 

  마하딴하상카야경(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docx  마하딴하상카야경(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pdf

 

 

어부의 아들 사띠(sati)가 부처님에게 들은 것이라면서 사람들에게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떠들고 돌아다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사띠를 불러 놓고 이 어리석은 자여~”하며 설법하는 장면이다.

 

부처님은 사띠를 꾸짖으며 의식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의식은 조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하였다. , 연기법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설법은 언제 어디서나 연기법적으로 설명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사띠 비구는 부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의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잘못알고 퍼뜨리고 돌아다닌 것이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경전적 근거 없이 상견(영혼론)과 단견(단멸론, 윤회부정)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퍼뜨리는 것과 너무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의 계율은 어떠할까. 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9.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어부의 아들 수행승 싸띠가 가르침과 계율을 열중하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대응경: 한역중아함경201 다제경)

 

 

부처님의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하여 진리를 훼손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계행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의식은 어떠한 것도 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렇다면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의식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반복문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12.

[세존]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어떠한 것도 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 지어진다.

 

1) 시각을 조건으로 형상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시각의식이라고 한다.

2) 청각을 조건으로 소리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청각의식이라고 한다.

3) 후각을 조건으로 냄새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후각의식이라고 한다.

4) 미각을 조건으로 맛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미각의식이라고 한다.

5) 촉각을 조건으로 감촉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촉각의식이라고 한다.

6) 정신을 조건으로 사물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정신의식이라고 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대응경: 한역중아함경201 다제경)

  

 

이처럼 부처님은 마음(의식)이라는 것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맞 부딪쳤을 때 만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거나 마음 밖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마음에 대하여 설명한다.

 

 

13.

[세존]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 지어지는 것과 같다. 불이 장작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장작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나무 조각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그 때는 섶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쇠똥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쇠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왕겨로 인해서 타게 되면 왕겨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쓰레기로 인해서 타게 되면 쓰레기불이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의식은 어떠한 것도 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 지어진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대응경: 한역중아함경201 다제경)

 

 

부처님은 그 어떤 것도 조건에 따라 생겨나는데, 마음 또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단지 이름을 붙이는 것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리워질  뿐이라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감관의 문을 통하지 않고 의식의 유전은 없다. 모닥불이 나무를 조건으로 타오르고, 연료가 떨어지면, 땔감으로 유전되지 않고 모닥불로 여겨지고 꺼지듯, 이와 같이 의식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능력의 감관에서 일어났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눈으로 유전되지 않고 시각의식으로 여겨지지 않고 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나는 의식이 일어날 때에 감관(dvara)을 통한 유전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어리석은 싸띠가 존재의 흐름(bhavanga)을 통한 유전에 대하여 언급하는가?”

 

라고 싸띠를 비난한 것이다.

 

(13절에 대한 전재성박사 주석) 

 

 

전재성박사의 주석은 니까야 주석서에 따라 작성된 것이다. 주석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 것으로서 장로비구들의 해설서라 볼 수 있다.

 

주석을 보면 의식(마음)은 감관(감각기관)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일어난 의식은 이쪽 저쪽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발생하였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이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여 조건이 다하면 멸하는 제행무상의 법칙에따라 마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사띠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한 번 일어난 마음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유전하고 더구나 윤회한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온과 십이연기를 들어 연기법적으로 설명한다.

 

영혼론으로 오해 받기 충분한 구절

 

이처럼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마음에 대하여 줄곧 설명하였는데, 경에서 영혼론으로 오해 받기 충분한 구절이 있다.

 

 

58.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아직 경수가 없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지 않으면, 입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더라도,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지 않으면, 입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아직 경수가 있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여,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대응경: 한역중아함경201 다제경)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말은 태어나야 할 존재이다. 이것은 빠알리 어로 간답바(gandhabba)’로 표시 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개인의 생물학적인 발생에 대한 조건적-수반적인 생성의 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태어나야 할 존재라고 번역한 간답바(gandhabba)의 한역은 건달바인데, 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다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만약에 그것이 주석가들의 의견처럼 결생식을 의미한다면 의식이 윤회의 주체라는 이론이 생기는데, 그것은 무아설과 모순이 되는 이론이 된다. 그래서 역자는 붓다고싸처럼(Pps.2.310), ‘태어나야 할 존재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것을 용인한다면, 생명체가 어떤 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암수의 결합, 적당한 시기, 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건달바는 일반사람들이 이해하듯이 미래의 부모가 성교할 때에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업의 힘에 의하여 태어 날 준비가 된 존재를 말한다.

 

(58절에 대한 전재성박사 주석) 

 

 

태어나야 할 존재로 번역한 간답바가 어떤 것인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이를 결생식으로 본다면 의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되어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에서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는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전박사는 붓다고사의 의견을 따라 태어날 존재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달바는 오온 밖에 있는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업의 힘에 의하여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라고 말하였다.

 

영혼론의 근거가 되는 바라경(Bhāra sutta,짐경,  S3.1.1.3.1)

 

이처럼 경에서 58절은 영혼론의 근거로서 의심받기에 충분한데, 초기경에 영혼론의 근거라 여겨지는 경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바라경(Bhāra sutta, S3.1.1.3.1)이다.

 

 

바라경

(Bhāra sutta- The Load-짐경, 상윳따니까야 S3.1.1.3.1, 전재성박사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짐과 짐꾼과 짐을 짊어지고 내려놓는 것에 관해 설할 것이다. 잘 들어라.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이라고 부르는가? 다섯가지 집착의 다발을 짐이라고 부른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예를 들어 물질이라는 집착의 다발, 감수라는 집착의 다발, 지각이라는 집착의 다발, 형성이라는 집착의 다발, 의식이라는 집착의 다발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짐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꾼이라고 부르는가? 사람을 짐꾼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이름, 이와 같은 성씨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짐꾼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재생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갈애이다.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하는가?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되고 포기되고 방기되어 집착 없이 해탈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짐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며 세상의 짐꾼은 사람이니

짐을 짊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며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안락이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 다른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욕심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

 

 

(바라경-Bhāra sutta- The Load-짐경, 상윳따니까야 S3.1.1.3.1, 전재성박사역)

 

바라경(짐경-S3.1.1.3.1).docx 바라경(짐경-S3.1.1.3.1).pdf

 

 

이 경에서 문제의 짐꾼이야기가 나온다. 이 짐꾼에 대한 전박사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

 

- 짐꾼 : bharaharo.

 

바라하로를 짐꾼이라고 번역할 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붓다고싸는 '짐은 고제이다. 그것을 짊어지면 집제이고, 그것을 내려놓으면 멸제이고 짐을 내려놓는 방법이 도제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케이스는 '이 경전의 편집자는 붓다고싸나 바수반두나 야쏘미뜨라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이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 즉 오온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경전이 개인을 허용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정당화된다' 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우즈워드는 불교적 관점에서 짐꾼은 결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짊어지는 것은 있다고 주장해서 바라하로를 '나르는 자' 라고 다소 추상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문맥으로 보아 '짐꾼' 이라는 번역어를 피하기는 어렵다.

 

단지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짐꾼은 어떤 사람이고 짐은 그의 살아있는 정신물리적인 복합체이고 그것을 취하고 내려놓는 것은 갈애의 작용과 소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이 비유는 리즈 데이비즈 여사가 밝힌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태어날 때에는 짐을 취하는 형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 이상은 불교의 무아론을 대아(大我)-비아(非我)의 진아론(眞我論)으로 오해하는 부류가 경전적 근거로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경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추후 별도의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재성박사, 바라경-Bhāra sutta- The Load-짐경 주석)

 

 

바라하로(bharaharo)라는 단어를 짐꾼으로 번역하였는데, 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사성제방식으로 해석하여 짐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또 전박사의 칸다상윳따(22 Khandha-Sayutta) 해제글에 따르면 붓다고사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토끼뿔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라는 것이 모두 성립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처럼 짐꾼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선사들의 법문에서 들을 수 있는 진아론의 경전적 근거로 활용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

 

진아론자들의 경전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바라경(짐경)을 잘못해석하면 오온 밖에 따로 의식이 있어서, 사띠가 잘못 이해 하고 있는 것처럼 이 의식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유전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처럼 바라경(짐경)에서의 짐꾼 즉,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을 참고 하였다.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자아의 의미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원글에서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자아의 의미 세 가지

 

초기불교가 어떤 측면에서는 모든 의미에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말랄라쎄케라는 초기불교의 자아의 의미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개인

 

분명히 초기불교의 관점은 존재의 다발이 보여주는 세번째 의미의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①과 ②의 관점은 부정된다.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이란 개념은 암암리에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가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동일성, 또는 의식의 통일성이란 문제를 전제로 한다.

      

스트로우슨은 ‘특수한 의식의 통일성, 자기 동일성의 원리의 문제’에 관해 만약에 그러한 원리가 있다면 우리 각자가 자신의 동시대적 체험이 그 자신의 것이냐 다른 사람의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그것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무의미하다라고 일축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기동일성을 정신물리적 복합체인 존재의 다발들(五蘊)을 결합시키는 신비적인 종류의 형이상학적인 고무줄로 판단하는 것도 호프만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기본 구조에 대한 오해에 의존한다.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부정된다

 

그리고 ②의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부정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자명해진다.

 

말라라쎄케라는 브리하타람니야까 우빠니샤드(Bhadā-rayaka Upaiad)’의 자아는 알려질 수 없고 찬도기야 우빠니샤드(Chāndogya Upaisad)’의 자아는 알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각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두 관점이 ②에 적용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초기불교가 무아적 관점을 부정했다는 아주 잘못된 정의를 얻는다. 그것은 알려질 수 있거나 없거나, 또는 지각될 수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자아라고 불리우는 영원한 정신적 실체를 부정한다.

 

초기경전은 정신 또는 육체적 현상의 조건성을 강조

 

불교가 영원한 정신적 실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의 물질적 특성을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올덴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가 영혼의 존재를 부인했다면 그러한 사고방식 속에서 어떤 물질적인 특성을 표현하려는 의미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동일한 의미에서 불교는 육체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와 영혼은 자신 속에 폐쇄되고 스스로를 고수하는 실체가 아니라 오직 다양하게 엮어진 생성과 소멸의 과정의 복합체로서 존재한다.”

 

초기경전은 다만 정신 또는 육체적 현상의 조건성을 강조한다.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에 관해 혼란될 필요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

 

그러나 ③의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개인의 의미로 일상적인 용어로서 경험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이나 개인을 뜻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자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아가 아니다.

 

정신물리적 복합체는 각각의 부품들이 마차를 구성하듯이 전체를 구성하지만 그것들은 개별적인 부품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들은 노끈의 강도가 상이한 크기의 섬유들에 의존하듯이 존재의 다발은 복합체로서 의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 원리는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으로 가장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노끈의 강도는 처음에 끈으로 달리는 단 하나의 가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가닥도 노끈의 전부를 달리지 않으며 때때로 겹쳐지고 엇갈리는 섬유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twisted string

 

 

 

지속적 윤회는 노끈의 연결과 유사

 

초기불교의 존재의 다발(五蘊)에 의한 재생의 수반적 의존관계에의 지속적 윤회는 노끈의 연결과 유사하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한 가닥의 정신적 섬유로서의 자아(atta, sk. ātman)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주이적(住異的)으로 무상하지만 겹쳐지고 꼬이면서 상호의존하며 수반되는 섬유들로서의 다발에 의해 확증되는 지속성은 있다. 이것은 언제나 변화하면서 지속되는불꽃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윤회하는 것은 존재의 다발이다. 이러한 복합체로서의 개인의 분석은 곧 사물의 실체성의 부정으로 이끈다. 이러한 원리는 러셀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전에 당신들은 영혼은 실체이고 모든 실체는 파괴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변화하지만 영원한 본질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라는 관념은 세상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단지 이 짐꾼의 비유에서 주의 할 것은 Mrs. Rhys Davids가 밝힌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태어날 때에는 짐을 취하는 형식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는 유명한 경에서도 자신이라는 것이 윤회의 주체로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제4권 해제에서)

 

  쌍윳따니까야관련자료(종합판)1[1].hwp

 

 

전재성박사는 해제글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실체가 있다는 자아(영혼)를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조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 즉, 자아나 영혼 등에 혼란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영혼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

 

다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을 들고 있다. 오온이 마치 노끈으로 연결된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조건에 따라 오온이 상속하는 것으로 본다.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에 대한 검색결과 전재성박사의 인터뷰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섬유론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지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회는 초기 불교의 개념과 완전히 다릅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윤회는 영혼ㆍ마음에 실체론적으로 접근하는 서양 철학과 같습니다. 사후를 영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데, 실체론적 관점에 따른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재밌게 비유한 것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후세계를 실체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영혼의 고무줄 이론이라고 비판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섬유론을 내세웠습니다. 쉽게 말해 가느다란 실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상호 의존하며 영향을 받는다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과론, 연기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금생에서 내생으로 전달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신ㆍ의식ㆍ영혼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행위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영적인 실체론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대담=김나미 한신대 강사, 금강신문 2009-03-06, 출처: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58)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대담.docx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대담.pdf

 

 

 

 

 

 

전재성박사

전재성 회장은 부처님 가르침이 사회 소통을 이끌 수 있다며 초기 경전 공부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진 : 금강신문,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58

 

 

 

전박사는 영혼을 거론하는 것은 영혼 또는 마음을 실체론적으로 접근하는 과거 서양철학적 사고방식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유일신교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유일신교에서 영혼과 영생을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을 보면 가느다란 실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상호 의존하며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 밖에 있는 영혼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에서의 행위가 연기적으로 윤회한다고 말한다.

 

선사들은 왜 연기와 열반에 대하여 침묵할까

 

전재성박사는 오온이라는 말 대신 존재의 다발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아마도 삼계를 생각해서 일 것이다.

 

불교에서 세상을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크게 세 개의 세상으로 나누는데, 욕계의 경우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무색계의 경우 색은 없고 정신작용만 있다. 또 색계 무상유정천의 경우 인식을 혐오하는 자들이 태어나는 곳이라 인식이 없다. 이렇게 존재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오온으로 하기 보다 존재의 다발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 존재의 다발이 노끈처럼 길게 연결 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다발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선처럼 보이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본다면 점선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건에 따라 일어난 법은 다음 법이 일어 날 조건을 남기고 사라지기 때문에 마치 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긴 끈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 조건이 발생되지 않아 다음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선이 끈어지는 것과 같다. 이를 열반이라 볼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아나서 결국 생노병사우비고뇌가 있게 되는데,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 더 이상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조건이 끊어지게 된다. 이는 사성제에서 갈애가 소멸되어 열반에 드는 것과 같다. 조건이 끊어져 다음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이 없으면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나고 죽는 일 없는 열반에 드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원인없이, 조건 없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영혼은 예외이다.  영혼, 한마음, 참나 등과 같이 존재의 다발 바깥에 있다고 하는 것들이다.  이는 연기와 무관한 것으로서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아 끊어 질 수가 없다. 따라서 영혼이나 참나를 주장한다면 결코 열반은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선사들이 마음바탕을 찾자고만 할 뿐이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연기에 대하여 그리고 열반에 대하여 침묵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2600년 전 결론난 사항인데

 

영혼론에 대한 것은 이미 2600년 전 부처님당시에 결론이 난 것이다. 존재의 다발을 떠나 다른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영혼과 마찬가지로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로서의 신개념도 이미 2600년 전에 결론이 난 것이다.

 

부처님은 이들 영혼(아뜨만)과 창조주(브리만)라는 상견을 삿된 견해로 간주하여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또 그런 영혼과 창조주개념은 이미 서양에서도 사리진지 오래 되었다.

 

불교tv사이트에서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독교의 신은 현대서양철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 언급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철저히 비판 받아서 더 이상 신은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서양철학에서 신은 죽은 것이다. 그 신을 누가 죽였을까.

 

니체를 근대서양철학과 현대서양철학의 다리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의 의미는 근대서양철학이 끝났다는 것을 말하고, 동사에 현대서양철학이 비로소 시작 된 것을 뜻한다.

 

신이 죽었다는 데 신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것은 명백히 기독교의 신 즉,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말한다. , 유일신이 죽은 것이다.

 

(김종욱교수, 제14 니체 철학과 불교 - 불교적 무신론,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불교 tv 2008-01-21, 참고: 신을 누가 죽였을까, 니체가 말하는 셈족의 유일신과 아리안의 다신)

 

 

유일신교에서 신개념은 영혼과 뗄레야 뗼 수 없다. 그런데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은 르네상스 등으로 인하여 그 이전에 죽은 것이다. 따라서 현대서양 철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신의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유럽의 경우 무신론이 점차로 힘을 받고 있고 무신론이 대세로 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에서조차 폐기처분된 영혼론이 마치 송장이 살아나서 유령처럼 떠 돌아 다니는 듯 보이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마우스엔지니어(mouth engineer)

 

마우스엔지니어(mouth engineer)라는 말이 있다. 입으로만 개발하는 사람을 말한다. 엔지니라면 측정된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데, 데이터없이 말로서만 개발을 하는 엔지니어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네티즌들이 말로만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런 경전적 근거 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근거 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을 빠알리어로 딧티(ditthi, 견해)’라 한다.

 

견해는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이야기만 하였을 때  잘못된 견해로 빠지기 쉬운것으로서 이를 다른 말로 사견(邪見)이라 한다.  

 

하지만 경전을 근거로 하여 이야기하면 바른 견해가 된다. 이를 빠알리어로 닷사나(dassana, 正見)’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견해를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경전적 근거를 들어 이야기 하면 정견이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를 하면 사견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2600년 전 부처님이 원인과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난다는 연기법으로 논파된 영혼이니 창조주이니 하는 견해들을 거론 한다면, 이는 사견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사견은 개념도 예외가 아니다.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

 

개념은 토끼뿔과 같은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존재의 다발(오온) 밖에 그 어떤 지켜보는 자 또는 자아, 영혼등이 있다고 말한다면 수행처에서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그럴경우 법사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이야기 하세요!”

 

 

 

 

2012-01-21

진흙속의연꽃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대담.pdf
0.13MB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대담.docx
0.16MB
마하딴하상카야경(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docx
0.03MB
마하딴하상카야경(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pdf
0.21MB
쌍윳따니까야관련자료(종합판)1[1].hwp
1.1MB
바라경(짐경-S3.1.1.3.1).docx
0.03MB
바라경(짐경-S3.1.1.3.1).pdf
0.1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