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브라흐마야짜나경(S6:1)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24. 12:56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브라흐마야짜나경(S6:1)

 

 

 

윤문팀을 만들어

 

지난 11 18일 코엑스 그랜드 볼룸에서 열린 초기불전연원의 4부 니까야 봉헌법회에 참석하였다. 5백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서 각묵스님은 네 가지 향후 계획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중 윤문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초기불전연구원 4부 니까야 봉헌법회(2012-11-18, 코엑스 그랜드 볼룸)

 

 

 

각묵스님에 따르면 초불에서 윤문팀을 운영할 것이라 한다. 4부 니까야 완역이 끝났으나 번역의 통일성과 교정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스님과 신도로 구성된 팀을 만들어 번역의 통일성을 기하고 교정해 나가겠다고 한다. 또 윤문팀이 운영되면 이를 역경팀으로 발전시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석서의 번역에 매진 할 것이라 한다.

 

윤문(潤文)이란 글을 다듬고 고친다는 뜻이다. 초벌번역한 책을 원문과 대조할 뿐만 아니라 교정작업과 문장을 부드럽게 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윤문작업을 번역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도 되는 것일까.

 

윤문과 비슷한 말이 교정이다. 교정이란 틀어지거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고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오자, 탈자, 맞춤법 등을 점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번역자가 아니더라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윤문의 경우는 글을 다듬고 고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번역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2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교정과 윤문은 개정판에서 가능한 것이다. 초판에서 발견된 오류를 반영하여 다듬고 고친 것이 개정판인데 진정한 번역서의 가치는 개정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번역된 빠알리 니까야는 전재성박사의 쌍윳따니까야이다. 쌍윳따니까야 개정판 해제에 따르면, 초판본 완간 4년 만에 2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꼼꼼히 교정하고 편집을 새로 하고 주석을 증보한 개정판을 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맛지마니까야 역시 개정판을 내었는데, 5 152경을 한데 묶어 한 권으로 출간하는 과정에서 보완하고 개정하여 윤문을 가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개정과 윤문은 번역자가 직접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은 어떻게 윤문 되었을까.

 

전재성박사의 번역서 쌍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의 개정판을 보면 오자, 탈자, 탈역의 점검뿐만 아니라 문장의 구조 자체가 변경되고 용어가 바뀌어서 초판과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다. 또 문장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거의 전부 손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리흐마야짜나경(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 S6:1)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초판)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념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개정판)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한다.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하면,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

 

  브리흐마야짜나경(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docx

 

 

 

초판에서 이라 하였으나 개정판에서 진리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초판에서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라는 문구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로 변경되었다. 이와 같이 용어와 문장구조가 바뀌는 윤문작업은 번역자가 아니면 손보기 곤란한 것이라 보여진다.

 

두 종류의 번역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4부 니까야 완역판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의 번역서이고, 또 하나는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의 번역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번역된 빠알리성전협회의 쌍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의 경우 이미 10년전에 초판이 출간 되었고 현재 개정판이 출간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교정과 윤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가 출간 되었다는 것은 불자들에게 있어서 축복이다. 각자 취향에 맞는 번역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번역서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이미 번역되어 세상에 내어 놓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였는지에 대하여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비교작업은 피할 수 없다.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 M26)에서

 

지난 11 18일 초불의 4부 봉헌법회에서 맛지마니까야 1권을 법보시 받았다. 4권 중에 첫번째 책이다. 모두 28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는 1권에서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 M26)이 있다. 성전협회에서는 고귀한 구함의 경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고, 초불에서는 성스런 구함 경이라고 되어 있다.

 

이 경에 대하여 게송을 중심으로 번역 비교를 하여 보았다. 청원에 대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의  브리흐마야짜나경 (S6:1)과 내용이 같은 것이다.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법을 설해 주기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게송

 

 

1

 

             

빠알리 원문

Kiccena me adhigata halandāni pakāsitu,

Rāgadosaparetehi nāya dhammo susambudho.

Paisotagāmi nipua gambhīra duddasa au

Rāgarattā na dakkhinti tamokkhandhena āvaāti.

전재성박사번역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대림스님번역

내가 어렵게 증득한

과연 설할 필요가 있을까?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이

이 법을 잘 깨닫기란 실로 어렵다.

흐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세하여

어둠의 무더기에 덮여 있고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한다.”

영어번역

I attained it with difficulty, why should I proclaim it,
By those overcome by greed and hate, this is difficult to be understood.
Clever and going against the stream is deep and difficult to see.
The greedily attached, do not see it shrouded with a mass of darkness.

 

1)빠알리 원전: Ariyapariyesanasutta(M26)

2)전재성박사 번역: 고귀한 구함의 경(M26), 맛지마니까야-개정판

3)대림스님 번역: 성스런 구함 경(M26), 맛지마니까야- 중간길이로 설하신 경

4)영어번역: The Noble Search(M26)

 

 

빠띠소따가미(Paisotagāmi)에 대하여

 

사함빠띠의 청원에 있어서 청원경 첫번째 게송에 대한 것이다. 담마(dhamma)에 대하여 진리와 법으로 용어를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게송에서 빠띠소따가미(Paisotagāmi)가 있다. 이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러가 흐름을 거스르고라고 되어 있다. 모두 똑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흐름을 거스른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성전협회의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불의 경우 다음과 같이 주석을 하였다.

 

 

“ ‘흐름을 거스르고(Paisota-gāmi)’란 영원함 등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상--무아-부정(anicca, dukkha, anatta, asubha)의 이런 네 가지 진리의 법(catu-sacca-dhamma)을 두고 말씀 하신 것이다.”(MA.ii.176)

 

(초불 주석)

 

 

맛지마니까야의 주석(MA.ii.176)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일반적으로 빠알리니까야 주석은 붓다고사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주석을 인용하여 본문의 문구를 설명하고 있는데, 때로 이해 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이런 주석도 그에 해당된다.

 

보통불자가 보기에

 

보통불자가 보기에 흐름을 거슬러 간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간다는 것으로 이해 된다. 오욕락을 추구하고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을 말한다. 그런 삶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에 대한 것으로 뭇삶(중생)들을 윤회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흐름을 거슬러간다라는 말은 세속과 반대되는 삶, 즉 탐--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삶을 말한다. 이는 앞 구절에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영원함 등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상--무아-부정의 이런 네 가지 진리의 법이라 하였는데, 흐름이라는 것이 영원주의를 뜻하고,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영원주의를 부정한 무상--무아-부정에 대한 것이라 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탐욕과 성냄등으로 표현된 앞문장과 비교해 보았을 때 약간 동떨어진 설명이라 보여진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붓다고사의 주석으로 추정되는 맛지마니까야 주석을 인용하지 않고 그냥 넘어 간 것으로 보여 진다.

 

 

두 번째 게송

 

 

2

 

             

빠알리 원문

Pāturahosi magadhesu pubbe,
Dhammo asuddho samalehi cintito.
Av
āpureta amatassa dvāra,
Su
antu dhamma vimalenānubuddha.

Sele yathā pabbatamuddhaniṭṭhito,
Yath
āpi passe janata samantato,
Tath
ūpama dhammamaya sumedha,
P
āsādamāruyha samantacakkhu,
Sok
āvatiṇṇa janatamapetasoko,

Avekkhassu jātijarābhibhūta
U
ṭṭhehi vīra vijitasagāma satthavāha anaa vicara loke,
Desassu4 bhagav
ā dhamma aññātāro bhavissantī

전재성박사번역

[싸함빠띠]

일찍이 오염된 자들이 생각해낸

부정한 가르침이 일찍이 마가다 인들에게 퍼져있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젖히소서!

그들이 듣게 하소서! 청정한 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사방으로 사람들을 굽어보는 것처럼,

현자여,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오르소서.

슬픔을 여윈 님께서는

슬픔에 빠지고 생사에 고통받는 뭇삶을 보소서.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캐러밴의 지도자여, 허물없는 님이여,

알아듣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니,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소서.”

 

대림스님번역

때묻은 자들이 궁리해낸 청정치 못한 법이
전에 마가다에 나타났습니다.
불사의 문을 여소서.
때 없는 분이 깨달으신 법을 듣게 하소서.

마치 바위산 꼭대기에 서면
주변의 사람들을 두루 볼 수 있듯이
현자시여,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신 분이시여

그와 같이 법으로 충만한 궁전에 올라
슬픔을 제거한 분께서는

슬픔에 빠져있고 태어남과 늙음에 압도된

저들을 굽어살피오소서.


일어서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시여,
대상의 지도자시여, 빚 없는 분이시여, 세상에 유행하소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법을 이해할만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영어번역

In the past the Teaching arose in Magadha, impure with blemish.
Open the door to deathlessness sir, by making the pure Teaching to be heard. .

Like a man on top of a rocky mountain would see the populace on all sides.
Wise one, the comparison is that, do ascend the rock and teach.
Remove the grief of the populace drenched in grief,
Look at them overcome by birth and decay.

Hero, steady and win the battle, leading charioteer,
Abide in the world without a debt.
May the Blessed one teach, there will be those who understand.

 

 

청원경 두 번째 게송이다. 빠알리어 사말레히(samalehi)에 대하여 오염된 자들때묻은 자들이라고 용어를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당시 육사외도의 가르침을 뜻한다. 부처님의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기 전에 유물론, 숙명론 등의 단멸론적 허무주의를  부정한 가르침 (Dhammo asuddho)이라 하였다.

 

뭇삶과 중생

 

빠알리어 자나따(janatā)’가 있다.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면 populace(대중, 민중)으로 되어 있다.  전재성박사는 이를 뭇삶이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대림스님은 저들이라 하였다. 영역에서는 ‘them’으로 되어 있다.

 

자나따(janatā)와 유사한 말이 이 게송 바로 전에 있다. ‘Santi sattā apparajakkhajātik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이 있는데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눈에 먼지가 적게 낀 중생들이라 하였다. 빠알리어 삿따(satt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뭇삶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였고, 초불에서는 중생이라는 한자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도법스님의 경우 요즘 즐겨 쓰는 용어가 뭇삶이라는 용어이다. “뭇삶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중생이라는 말 대신 뭇삶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전재성박사의 번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게송에서 고통받는 뭇삶을 보소서저들을 굽어살피오소서로 되어 있다. ‘굽어살피오소서라는 말은 사극에 사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말들이 초불번역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어찌하오리까등과 같이 자극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말이다.

 

허물 없는 님빚 없는 분

 

빠알리어 게송에 아나나(anaa)가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허물 없는 님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빚 없는 분이라 하였다. 그런 아나나는 무슨 뜻일까, 전재성 박사의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anaa : 원래 [負債]이 없는 자를 뜻한다. Krs.I.298에서는 빚 없는 자라고 했고 Ggs.I.366에서는 허물없는 자라고 했다. 이 말은 Thag.II.110에도 나온다. AN.II.69에는 재가신도의 빚이 없는 행복에 관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재가신도가 아닌 부처님에 관한 것이므로 허물없는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전재성박사 주석)

 

 

아나나(anaa)뜻이 빚이 없는 자라는 뜻인데, 이를 부처님에게 적용하기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에 대하여 허물 없는 이라고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림스님의 번역서에는 이에 대한 주석이 없다. 왠만한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볼 수 있고 더구나 한페이지에 대부분을 차지 하는 주석을 달아 놓고 있는데, 이 부분 만큼은 보이지 않는다. '아나나(anaa)에 대한 영역은 without a debt’로 되어 있다.

 

세 번째 게송

 

 

3

 

             

빠알리 원문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
Vihi
sasaññī pagua na 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ti.

전재성박사번역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대림스님번역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영어번역

“The door to deathlessness is open.
May those who have ears be released out of faith!
My perception is not hurting and will not speak straightforward words
Brahma, the exalted Teaching is available to humans.”

 

 

청원경 세 번째 게송이다. 부처님이 사함빠띠의 청원을 듣고 마침내 깨달은 진리를 설하기로 결심하는 것에 대한 게송이다.

 

왜 하느님이라 번역하였을까?

 

빠알리 게송에서 브라흐마(brahama)가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하느님이여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범천이여라 하였다. 전재성박사의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따르면 하느님나라는 미세한 물질계(색계)와 비물질계(무색계)는 하느님들이 사는 세계(범천계)’  하였다. 욕계 천상을 제외한 색계와 무색계 전체를 범천계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이라 번역하였을까.

 

맛지마니까야 쭐라고씽가경(Cūagosigasutta, 고씽가 법문의 작은 경, M31)이 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료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하늘나라 신들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이 소리내어 말했다.

 

(쭐라고씽가경-Cūagosigasutta, 고씽가 법문의 작은 경, M31)

 

 

동료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하늘나라 신들은 빠알리어로 빠라님미띠와사왓띠노 데와(Paranimmitavasavattīno devā)라 한다. 한자용어로 타화자재천의 신들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타화자재천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여섯하늘나라(욕계육천)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의 하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아래 두기 위해 피조물을 창조하는 존재들인데 다른 신들이 만든 욕망의 대상들을 지배한다. 그들의 욕망의 대상들은 요리사가 왕의 기호를 받아서 요리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약점을 아는 다른 신들에 의해서 창조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타화자재천의 신은 신중의 신이고, 창조주를 창조 하는 창조신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 된 존재라 하니 오늘날의 유일신교에서 보는 분노의 신, 질투의 신을 특징으로 하는 구약의 창조주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이런 창조주 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브라흐마라 한다. 그런 브라흐마를 전재성박사는 하느님이라 번역하였는데 한자용어로 범천이라 한다. 이런 범천계는 청정범행을 닦아만 태어날 수 있는 곳으로 욕계천상과 다른 곳이다.

 

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권속들의 신들이라고 표현 것으로 보아, 브라흐마는 신중의 신이라 불리우는 타화자재천을 자신의 권속으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라흐마에 대하여 왜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다음으로 빠알리 게송에 빠문짠뚜 삿다(pamuñcantu saddha)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번역하였다. 반면에 대림스님은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정 반대의 번역을 하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에 대하여 글(“불사(不死) 문을 여소서” 아야짜나경(청원경 S6.1.1) 가라와경(존경경 S6.1.2))을 쓴 적이 있다. 후박나무님의 글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을 이용하여 쓴 것이다.

 

후박나무 님은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과 최봉수박사 번역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는데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빠알리어

pamuñcantu saddham

전재성박사

믿음을 버려라

각묵스님

믿음을 내어라

최봉수박사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누구의 번역이 옳을까?

 

전재성박사와 각묵스님의 번역이 정반대가 된 것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의견]

pamuñcantu는 pamuñcati(벗어나다.나가다.버리다)의 3인칭 명령형 복수입니다.

이 두 분의 번역이 전혀 반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석]서 에서는 “믿음을 버리라”는 말은 모든 자신의 믿음을 버리라, 제거하라.

(Pamuñcantu saddhanti sabbe attano saddha pamuñcantu vissajjentu,)는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pamuñcantu saddham (邪)信을 버려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들]에서도 각각 버리라,놓아라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따니빠따 5장

1067. Ta ta namassāmi samantacakkhu

Pamuñca(미래수동분사) ma sakka kathakathāhi

널리보는 눈을 가지신 샤끼야여!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저를 온갖 의혹에서 풀려나게 해주십시오.

 

1151. Evameva tvampi pamuñcasasu(수동명령형 2인칭 단수) saddha

Gamissasi tva pigiya maccudheyyassa pāra.

그대도 믿음을 버리시오. 삥기야여 그대는 죽음의 영역의 저쪽으로 갈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SN.1.51.Candimasutta)

Rāhu canda pamuñcassu buddhā lokānukampakāti. "

그때 세존께서는 하늘아들 짠디마에 관해서 아쑤라의 왕 라후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 하늘아들 짠디마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짠디마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Tathāgata arahanta suriyo saraa gato,

Rāhu suriya pamuñcassu buddhā lokānukampakāti.

[세존] "하늘아들 쑤리야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쑤리야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그러므로 사전과 주석서와 수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등에서 pamuñcantu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아서는 pamuñcantu saddham는 (삿된) 믿음을 버려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설법을 할 테니 기존의 선입견과 믿음을 버리고 열린 마음, 객관적인 마음으로 들을 자세를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내어라]라고 해석한다면 붓다는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믿어라 라는 말이 되어서 “와서 보라”는 붓다의 설법자세와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고 따르지 말라는 깔라마경과도 위배되는 가르침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라고 번역한 것은 그 믿음이란 것이 그 당시 제사 지내는 브라흐만사상이라고 이해 해서 그렇게 의역한 것 같습니다.

 

(후박나무님,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견해에 따르면 전재성박사의 번역이 옳다고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pamuñcantu 3인칭 복수로서 명령형으로서 버려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라 한다.

 

왜 모순된 번역인가

 

또 하나의 이유는 앞문장과의 관계 때문이다.  각묵스님의 번역대로 믿음을 내어라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아직 법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믿음을 내라고 말한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에 대한 초불의 견해는 어떤 것일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볼 수 있다.

 

 

853) “믿음을 보여라(pamuñcantu saddham).”는 것은 불사(不死, atama)라고 불리는 열반의 성스러운 도를 설했으니 이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믿음(attano saddha)을 보내라(pamuñcantu), 펴 보아라(vissajjentu)는 말씀이다.”(MA.ii.181)

 

(초불 대림스님 주석)

 

 

주석에 따르면 성스러운 도를 설했으니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후박나무님이 지적한대로 모순이다. 사함빠띠의 청원으로 법을 설하기로 결심한 것에 지나지 않은데 이미 도를 설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보여라또는 믿음을 내라는 번역이 되어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정반대의 번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부분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주석은 어떤 것일까.

 

 

494) pamuñcantu saddham: ‘예전의 잘못된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뜻이다.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주석)

 

 

전재성박사는 전래 되어 온 주석을 인용함 없이 예전의 잘못된 자신의 신앙을 버리라는 뜻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영역을 보면 ‘be released out of faith’로 되어 있다. 영어 release발표하다, 개봉하다, 출시하다, 발매하다, 공개하다’라는 뜻으로 “믿음으로 부터 풀어진다”“믿음으로 부터 해방된다”““자신의 믿음을 내어 놓는다”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신앙을 내 놓는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번역스타일을 보면

 

이상 맛지마니까야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 M26)에 실려 있는 사함빠띠의 청원에 대한 청원경의 게송을 비교해 보았다. 이런 비교작업을 하게 된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가 번역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자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되지만 원전과 비교함으로서 내용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양 번역서의 번역스타일이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에서는 가급적 한글을 이용하려 애쓴 흔적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기존 사용되던 용어를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았기 때문이다. ‘뭇삶중생’, ‘하느님범천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려는 경향도 보았다. ‘오염된 자때묻은 자’, ‘진리’,  캐러밴대상등이 좋은 예이다.

 

그런 한편 옛날부터 전승되어온 주석을 존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도 볼 수 있다. ‘허물 없는 님빚 없는 분이 좋은 예이다. ‘허물 없는 님의 경우 주석을 떠나 역자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고, ‘빚 없는 분의 경우 주석에 충실한 번역이라 생각 된다.

 

흐름을 거슬러 간다빠띠소따가미(Paisota-gāmi)’에 대한 것을 보면, 초불의 경우 종래의 주석에 매몰된 듯한 느낌이다. 앞문장과의 관계를 보면 동떨어진 주석이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주석에 매몰된 듯한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정반대의 번역을 보았을 때이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의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의 대림스님의 번역은 정반대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전래의 주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이라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초기불전연구원의 경우 주석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해제글에서도 알 수 있다. 맛지마 니까야의 해제에 실려 있는 번역에 임한 태도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에 임한 태도

 

초기불전연구원은 경을 옮김에 있어서 항상 몇 가지 원칙을 중시하고 있다. 이들 원칙에 대해서는 이미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역출한 다른 책들의 역자 서문등에서 밝혔기 때문에 본서의 역자 서문에서는 이것에 대해서는 적지 않으려 한다.  디가 니까야역자 서문과 앙굿따라니까야역자 서문과 상윳따니까야역자 서문 등에서 밝힌 번역의 원칙에 대한 것을 제목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석서를 중시하였다.

둘째, 청정도론을 중시하였다.

셋째,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중시하였다.

넷째, 술어를 한글화하려 노력하였다.

 

(대림스님, 맛지마니까야 해제)

 

 

맛지마니까야 해제글에 실려 있는 번역의 원칙을 보면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를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석을 바탕으로 한 번역을 하였다고 하는데, 책에 수많은 주석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어느 페이지의 경우 주석이 대부분을 차지 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주석을 최소화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꼭 필요한 부분만 주석이 되어 있는데, 문장과 맥락이 맞지 않는 주석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코멘트를 단 것을 볼 수 있다.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경전을 열어 보면 마치 부처님이 면전에 있는 듯이, 부처님이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가르침은 가급적 원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무엇이든지 처음 출시된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생각지도 않은 오류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정판이 매우 중요하다. 개정판으로 인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틀어지거나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교정작업과 글을 다듬고 고치는 윤문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용어에 대한 통일과 타니까야와의 통일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번역작업 못지 않게 윤문작업이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상윳따니까야 개정판을 내 보내는 데 있어서 꼬박 2년 걸렸다고 하였다.  그런 윤문작업을 번역자가 아닌 삼자가 한다는 것은 커다란 혼란을 야기 할 것임에 틀림 없다.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번역자가 마땅히 해야 될 일로 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번역이다. 주석에 매몰된 번역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달하는 번역이다.  

 

 

2012-11-24

진흙속의연꽃

브리흐마야짜나경(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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