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우리를 버린 청춘,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29. 15:11

 

 

우리를 버린 청춘,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최악의 계절

 

계절 중에 최악은 단풍이 질 때이다. 11월 초와 중순에 절정을 맞이한 단풍은 기온의 급강하와 비바람으로 인하여 11월 말이 되면 대부분 져 버린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찬란한 황금빛을 자랑하였던 가로의 은행나무가 이제 가지만 앙상하다. 구름이 잔뜩 낀 추운 날씨에 비바람이 불자 추풍낙엽이 된 것이다. 그런 11월의 날씨는 항상 최악의 계절로 기억 된다.

 

낙엽이 진 나무를 아무도 쳐다 보지 않는다. 봄에 벚꽃이 필 때 카메라를 들이대고, 가을에 빨갛고 노란 단풍이 들 때면 다시 한 번 쳐다 보지만 낙엽이 지고 난  앙상한 가지를 아무도 쳐다 보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TV를 보면

 

TV를 보면  온통 젊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젊고 탄력있고 윤기 나고 잘생긴 젊은 사람들만 보여 준다. 어쩌다 나이 든 사람을 보여 주면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특히 한 때 잘 나가던 유명배우나 가수 등 유명인이 형편 없이 늙은 모습으로 스크린에 나타났을 때 더욱 더 그렇다.

 

그럴 경우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유명인의 젊고 윤기 있고 탄력 있었던 시절의 이미지와 환상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명인들이  늙어감에 따라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다. 자신의 늙어가는 추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 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늙어 간다. 고귀한 자나 미천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한 번 형성된 것은 무상하게 변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순간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늙어지고 또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가장 공평하고 평등하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초기경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상윳따니까야에 부처님과 하늘사람(천인)의 대화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네 번째 경으로서 매우 짤막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Accenti kālā tarayanti rattiyo

vayoguā anupubba jahanti.
Eta
bhaya marae pekkhamāno

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īti.

 

[하늘사람]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

 

(앗쩬띠경-Accentisutta-스쳐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1-4),전재성님역)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가 하늘사람(Devatā)으로 되어 있으나 이와 똑 같은 게송이 데와뿟따 상윳따 난다경(S2;27)’에도 나온다. 이 때 화자는 하늘아들 난다(Nanda)’로 구체적인 이름이 명기 되어 있다.

 

하늘사람 난다는 부처님에게 청춘이 우리를 버린다 (vayoguā anupubba jahanti)’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주석에 따르면, 젊은이는 중년에 도달한 자를 버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청춘은 젊은이를 말하고, 우리는 중년을 말한다. 우리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젊은이들이 외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춘은 우리를 버리네라고 노래 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년이 노년으로 되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중년이 노년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이를 많이 먹어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노년이 되면 젊은이들은 물론 중년으로 부터도 버려지게 된다. 이 게송에 대하여 또 한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월의 무상함이다.

 

귀한 자와 천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잘난 자와 못난 자를 가리지 않고 세월은 무자비하고 공평하게 흐른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세월에 맞설 수가 없다. 그래서 세월에 등 떠밀려 청년이 중년이 되고, 중년이 노년이 되기 때문에 청춘은 우리를 버리네”라고 노래 하였을 것이다.

 

업대로 사는 인간, 수명대로 사는 천신

 

버려진 노년은 비참한 것이다. 더구나 은행의 잔고도 없고 의지처도 없을 때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게송에 따르면 공덕(puññā)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

 

왜 공덕을 쌓아야 할까. 그것은 행복(sukhā)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늙으면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고, 그런 죽음은 수명이 보장 된 것이 아니라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공덕을 쌓아 놓아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늘사람, 즉 하늘에 사는 존재의 입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다.

 

하늘에 사는 존재들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도 매우 오래 사는 수명이다. 지은 선행공덕의 과보로 하늘나라에 태어나 수명대로 오래 살다 죽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마치 영원히 사는 것처럼 착각 할 수 있다.

 

그런 천신(하늘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다. 기껏 수십년 사는 것이고 백세를 넘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수명도 보장 되지 않는다. 따라서 천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덧없고 목숨이 짧은 것을 알기 때문에 연민의 감정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업대로 살기 때문에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늘 두려워 한다. 그래서 천신들은 인간들에게 공덕을 쌓으라고 당부 한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생활을 하면 반드시 천상에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사람은 아무도 쳐다 보지 않고 더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며 두려움에 떠는 노년에게 공덕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보험인것처럼 강조하고 있다.

 

공덕(puññā)보다 고요함(santi)

 

이런 게송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였을까. 하늘사람의 공덕예찬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Accenti kālā tarayanti rattiyo

vayoguā anupubba jahanti,
Eta
bhaya marae pekkhamāno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앗쩬띠경-Accentisutta-스쳐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1-4),전재성님역)

 

 

 

 

calmness

 

 

 

부처님은 고요함을 원하라(santipekkhoti)”고 하였다. 이는 적멸, 열반, 불사(不死)를 말한다. 천신이 말하는 공덕쌓기 보다 고요함(santi: peace; calmness)’을 바라는 것이 더 수승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세속의 자양 (lokāmisa)’ 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세속의 자양이란 무엇일까.

 

자양(āmisa)이란 무엇인가

 

주석에 따르면 자양을 뜻하는 빠알리 아미사(āmisa)는 날고기, 음식, 자양, 미끼, 유혹물, 물질, 세속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상윳따니까야 니라마사경(Nirāmisasutta,S36:3, 자양의 여윔에 대한 경)에 자양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세속의 자양은 해탈로 이끄는 것이 아님으로 되어 있다. 즉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이 자양으로 묘사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양을 취한 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의 모든 윤회의 존재, 즉 집착의 대상적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네 가지 필수품인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필수약품도 자양을 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생존을 위한 물질적 기초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오욕락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욕망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자양을 버렸을 때 고요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열반을 말한다. 열반이야말로 그 어떤 공덕 보다도 가장 수승한 것이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은?

 

늙으면 추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형편없이 늙어 버린 노년을 보고 기분이 잡치네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말한 자들 역시 노년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노년은 아무도 쳐다 보지 않는 나목과도 같다. 그래서 게송에서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라고 하였다.

 

지금 비록 빛나는 청춘일지라도 세월의 힘 앞에는 무력하다. 청춘이 영원할 줄 알고 젊음이 끝까지 계속 될 줄 알지만 어느새 청춘 역시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버려지게 된다. 더구나 공덕도 쌓지 않고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해온 삶을 살았다면,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 가는 것과 같고,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하는 존재가 되기 쉽상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은 공덕(puññā, 뿐냐)을 노래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공덕 보다 고요함(santi, 산띠)을 노래 하였다. 이는 열반을 말한다. 이는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이다.

 

이 세상에 나타난 대부분의 종교가 선행공덕을 쌓으면 천국이나 극락에 태어난다고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를 초월한다. 그래서 하늘나라에도 태어 나는 것보다 고요함, 적멸, 불사, 열반을 강조 한 것이다. 이런 점이 가장 불교다운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이상하게 열반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야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이 열반임을 알았다. 그래서일까 수천개의 경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첫 경에서 부처님은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흐름을 건넜던 사람입니다.(오가따라나경, S1:1)”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노후 불자들의 의지처

 

노년은 갈수록 늘어나고 기대수명 또한 90, 100세로 길어진다. 불과 이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까지 노후대책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은퇴후 10년 내지 15년 정도를 바라보고 노후대책을 마련 하였으나 그 보다 배를 넘게 살게 됨에 따라 기존의 노후대책이 무력화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노후대책을 세웠건 세우지 않았건 간에 점차로 늙어 감에 따라  늙은 백로버려진 화살처럼 처량한 신세가 되기 쉽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고기 없는 마른 연못에서 날개 부러진 백로처럼 죽어가야 할까.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에게 가장 큰 위안거리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다. 수천개나 되는 경이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위안거리이자 의지처이다.

 

아무도 처다보지 않고 버림 받은 노년이 되었을지라도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을 읽고 게송을 외고 수행을 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노후대책이 없으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여생을 수행하며 살아 가고,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맞이 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축복은 없다고 본다.  

 

 

 

2012-11-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