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떼윗자경(D13)
글쓰기가 일상화 되어 있다 보니 늘 소재를 찾는다. 주로 지금 여기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글쓰기의 소재로 활용 된다. 그래서 가급적 경전을 인용한 글쓰기를 하는데, “이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하며 경전을 떠 들어 보는 것이 보통이다.
자극받았을 때
그러나 때로 자극받아 글쓰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위빠사나에서 가장 강한 대상에 집중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자극을 받았을 때 분발하는 요인이 된다. 댓글을 주시는 법우님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셨다.
인도의 브라흐마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도 되나요?
그래놓고 그런 신은 없다고 주장하고 ...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이 인도에서 구박 받고 있단 말입니까?
영국의 넬슨과 일본의 도고를 이순신이라고 번역해도 되나요?
그래서 혼자 번역하다보면 환각에 빠지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Y법우님)
댓글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긍정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다. 대게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이 댓글은 부정적인 글이다.
글에서 법우님은 브라흐마(brahma)의 번역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 하고 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에서 브라흐마를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넬슨과 도고를 이순신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강한 의문을 제기 한다. 그러면서 홀로 번역하는 것에 대하여 망상에 빠진 것으로 표현 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한다.
고유명사의 경우
일리있는 말이다. 특히 고유명사에 대해서 그렇다. 일반적으로 고유명사는 원어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이름과 지명이 그렇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홍길동으로 불러 주어야 한다. 경의 이름도 마찬가지라 본다. 그래서 가급적 경의 이름을 빠알리 원어로 붙인다.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sutta,D16)의 경우 ‘마하빠리닙바나경’으로, 세가지 베다의 경(Tevijjasutta, D13)의 경우 ‘떼윗자경’으로 하는 식이다.
따라서 브라흐마 역시 브라흐마로 표기 하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야훼’를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 표기 하지 않고 그냥 야훼로 표기 하는 것이 맞는 것과 같다.
우리말 하느님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고유명사이다. 우리말 하느님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린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라고 풀이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일신교의 야훼나 알라, 그리고 전 세계의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창조주는 모두 하느님 같은 위치라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재성박사도 브라흐마를 하느님이라고 번역한 것 같다.
왜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였을까?
그렇다면 전재성박사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왜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였을까? 검색창에 ‘전재성, 하느님, 범천’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전 박사는 번역에 있어 초등학생도 받아들일 수 있는 쉬운 말과 우리 문화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박사는 그 예시로 하늘님을 들었다. 전 박사는 “기독교의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인 용어”라며 “불교의 범천을 하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고 말했다.
(“빨리 대장경 번역, 건강 허락할때까지”, 현대불교신문 2012-09-04)
현대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도 받아 들일 수 있는 쉬운 말과 순수한 우리 문화를 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범천이라고 한역된 브라흐마를 순수 우리말인 하느님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초기불전 자체가 누구나 이해 하기 쉬운 언어로 설법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은 당시 지배층인 브라만이 사용하는 브라만 언어가 아닌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일상언어로 쉽게 설법하였다. 따라서 번역 작업 역시 이 시대에 맞는 민중언어와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또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게 새롭게 번역하다 보니 ‘하느님’이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번역한 것이라 보여 진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과연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 실재 할까?
하느님은 창조주이자 초자연적인 초월적 존재로 묘사 되고 있다. 그런 하느님은 실재 하는 것일까? 묘원법사는 BBS불교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을 존재로 보면 야생짐승, 초자연적 존재, 도깨비등을 연상하게 된다고 하였어요. 이게 주석서에 나와 있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을 요소로 보면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예를 들면 몸의 느낌으로 볼 때는 무속인들이 산신령을 본다든가 귀신을 본다든가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요.
여기서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 하는 것도 포함 되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을 보고, 부처님을 보고, 관세음보살을 보고, 산신령을 보았다고 해도 이건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표상이에요.
(묘원법사,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2012-10-29일자)
묘원법사는 ‘표상(nimitta)’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표상은 개념화 된 것을 말한다. 단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 관세음보살, 산신령 등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마음이 만들어 낸 표상
그러나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면 ‘표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삼매 상태에서 마음이 만들어 낸 여러가지 표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매에서 벗어나면 볼 수 없다.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헛것을 본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시’와 ‘환청’이다.
환시와 환청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꾸며서 보는 것을 말한다. 실재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기 때문에 ‘착란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느낌을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느낌을 보면 환시, 환청이 생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딱딱함, 부드러움, 가벼움 등과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느낌을 보라고 한다. 이렇게 느낌을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무속인들은 산신령이라는 표상의 노예로 산다고 한다. 자신들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마치 화가가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에 표상을 취하여 환시, 환청을 경험하면서 끄달려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표상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살아 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세계
그렇다면 하느님으로 번역된 브라흐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인간계와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크게 삼계로 나눈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세계를 범천계 또는 하느님세계라 한다. 선정의 깊이와 단계에 따라 그에 걸맞는 세계에 화생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 사는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번역 하였는데, 무상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미얀마 속담에도 “범천에서 빛나던 존재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 있듯이 빛나는 하느님 역시 무상한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청정범행을 닦으면 하느님 세계(색계, 무색계)에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받아 들여 진다.
31개의 세상이 있는데
그래서 불교에서는 형성에 따른 31개의 세상이 있는데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형성조건에 따른 31개의 세상
형성조건 |
생성방식 |
명 칭 |
수 명 |
분류 |
|||||
(31)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신들의 하느님 세계 |
84,000 대겁 |
무 색 계 |
|||||||
무형상 |
화생 |
(30)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아무것도 없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
60,000 대겁 |
||||||
(無形象) |
(29)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무한의식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
40,000 대겁 |
|||||||
(28)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무한공간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
20,000 대겁 |
||||||||
범 |
선 |
||||||||
(27) 색구경천(色究境天)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하느님 세계 |
16,000 대겁 |
||||||||
정거천 |
(26) 선견천(善見天) 관찰이 잘 이루어지는 하느님 세계 |
8,000 대겁 |
|||||||
(淨居天) |
(25) 선현천(善現天) 선정이 잘 이루어지는 하느님 세계 |
4,000 대겁 |
|||||||
사선 |
천 |
||||||||
(24) 무열천(無熱天) 타는 듯한 고뇌를 여읜 신들의 하느님 세계 |
2,000 대겁 |
||||||||
(四禪) |
|||||||||
(23) 무번천(無煩天) 성공으로 타락하지 않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
1,000 대겁 |
||||||||
천 |
색 |
||||||||
화생 |
(22)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지각을 초월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
500 대겁 |
업 |
||||||
(21) 광과천(廣果天) 탁월한 과보로 얻은 신들의 하느님 세계 |
500 대겁 |
||||||||
삼선 |
(20) 변정천(遍淨天)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
64 대겁 |
|||||||
(三禪) |
화생 |
(19) 무량정천(無量淨天) 한량없는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
32 대겁 |
||||||
상 |
|||||||||
(18) 소정천(小淨天) 작은 영광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 |
16 대겁 |
||||||||
계 |
계 |
||||||||
이선 |
(17) 광음천(光音天)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
8 대겁 |
|||||||
(二禪) |
화생 |
(16) 무량광천(無量光天) 한량없이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
8 대겁 |
||||||
보 |
|||||||||
(15) 소광천(小光天) 작게 빛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
2 대겁 |
||||||||
초선 |
(14) 대범천(大梵天) 위대한 신들의 하느님 세계 |
1 무량겁 |
|||||||
(初禪) |
화생 |
(13) 범보천(梵輔天) 하느님을 보좌하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
1/2 무량겁 |
||||||
계 |
|||||||||
(12) 범중천(梵衆天)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 |
1/3 무량겁 |
||||||||
(11)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
16,000 천상년 |
||||||||
천 상 의
욕 계 |
|||||||||
믿음 |
(10) 화락천(化樂天) |
8,000 천상년 |
|||||||
보시 |
화생 |
(9) 도솔천(兜率天) |
4,000 천상년 |
||||||
욕 |
계 |
||||||||
지계 |
(8) 야마천(耶麻天) |
2,000 천상년 |
|||||||
(7) 삼십삼천(三十三天) |
1,000 천상년 |
||||||||
(6) 사천왕천(四天王天) |
500 천상년 |
||||||||
오계 |
태생 |
(5) 인간(人間) |
정해지지 않음 |
인간 |
|||||
악 |
|||||||||
성냄 |
화생 |
(4) 아수라(阿修羅) |
정해지지 않음 |
아수라 |
|||||
업 |
|||||||||
우치․탐욕 |
태생․난생 |
(3) 축생(畜生) |
정해지지 않음 |
계 |
축생 |
||||
인색․집착 |
화생 |
(2) 아귀(餓鬼) |
정해지지 않음 |
아귀 |
|||||
보 |
|||||||||
잔인․살생 |
화생 |
(1) 지옥(地獄) |
정해지지 않음 |
지옥 |
|||||
계 |
이렇게 31개의 세상이 있는데, 이중 색계와 무색계의 천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하느님 세계’라고 이름 붙였다. 예를 들어 색계 초선천 중에 가장 낮은 천상인 ‘범중천(梵衆天 , Brahmakayika deva)’의 경우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종래의 한문이름과 달리 이 시대에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이와 같은 31개의 세상은 모두 ‘형성된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 D16)에 따르면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는 감동적인 말이 있다. 31개의 세상도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선정수행을 하여 어느 세계 보다 수승한 색계와 무색계로 대표 되는 범천에 화생하여 하느님이 되었을지라도 정거천을 제외하고 삼계를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하느님나라에 났다거나 하느님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인간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 사는 하느님을 우리 인간이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그런데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 가운데 어떠한 한 바라문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바쎗타]
“존자 고따마시여, 없습니다.”
(떼윗자경-Tevijjasutta-세 가지 베다의 경, 디가니까야 M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 출신 비구들에게 하느님(브라흐마)를 본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모두 본적이 없다고 한다. 바라문의 스승들도 본적이 없다고 하고, 7세대 이전의 스승도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옛 선인들이 성전을 쓰고 전했을 뿐으로 지금의 성직자들은 그 성전이 외워지고 설해져서 모아져 온 것을 따라서 외우고 설하고 가르쳐서 전승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은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것만이 길이다”라고 말하는 스승의 이론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단지 자신의 스승의 길이 바른 곧바른 길이라고 믿고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 스승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브라흐마)를 한 번도 본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베다만이 올바른 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라문 들의 주장에 대하여 부처님은 경에서 봉사의 비유, 미녀의 비유, 사다리의 비유, 아찌라바띠 강의 비유를 들어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설명한다.
“이것만이 길이다”라고 주장 하는 자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하느님(브라흐마)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바쎗타여, 그들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바라문이 실천하는 원리가 있는데, 그러한 원리를 버리고 바라문이 아닌 자가 실천하는 원리를 획득하여 행하면서 이와 같이 호소한다고 해서 소청한다고 해서 환영한다고 해서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떼윗자경-Tevijjasutta-세 가지 베다의 경, 디가니까야 M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의 원리’에 대하여 말한다. 하늘나라에 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청정범행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길이다”라고 주장하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브라만교가 타락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의 브라만은 그렇치 않았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의 원리에 대하여 소유를 여읜자, 마음에 원한을 여읜 자, 분노를 여읜 자 , 오염을 여읜 자 들이 죽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느님과 교류하는 길’이라 한다.
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계행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오계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계행에 대하여 설한다.
또 부처님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바쎗타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것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바쎗타여,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힘쎈 나팔수가 사방에 어려움 없이 소리를 알리듯,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닦여지면, 한계지어진 행위는 거기에 남지 않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바쎗타여, 이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입니다.”
(떼윗자경-Tevijjasutta-세 가지 베다의 경, 디가니까야 M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자애와 연민, 기쁨, 평정 등 사무량심을 닦을 것을 말한다. 이렇게 사무량심을 닦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의 길 (brahmuno sahavyatāya maggo)’이라 한다. 이렇게 탐진치를 버리고, 계행을 지키고, 사무량심을 닦으면 하늘나라에 날 것이라 한다.
가장 수승한 하늘나라는?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하늘나라 즉 범천(색계와 무색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그런 존재를 인간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청정범행과 선정수행의 깊이에 따라 어느 하늘 나라에 날지가 결정되는데, 그런 하늘나라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곳이 아마도 ‘정거천’일 것이다.
정거천은 불환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제자 중에 정거천에서 한번만 더 태어나 수명대로 살다가 열반에 들기 때문에 천상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천상으로 보고 있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다
회의론적 댓글을 주신 법우님의 글을 읽고 자극 받았다. 그 결과 글을 쓰게 되었는데 덕분에 ‘떼윗자경(D13)’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볼 기회를 가졌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들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어 다시 태어남이 없는 한, 모든 존재들은 지은 업으로 인하여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악업을 지었으면 지옥 등 그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고, 선업공덕을 쌓았으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업공덕은 물론 선정수행과 청정범행을 닦았을 때 욕계천상 보다 더 수승한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 화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를 ‘하늘나라(천상계)’ 또는 ‘하느님 세계(범천계)’라 한다.
이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전재성박사는 범천 즉, 브라흐마(brahma)에 대하여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일부 불자들은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반기독교적 정서가 팽배한 한국불교에 있어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자의 의견에 따르면 이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이는 빠알리니까야의 번역이 불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글을 아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하느님’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름과 지명 등 고유명사는 원어를 써 주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상비비상처천(Nevasaññānāsaññāyatanupagā devā)에 대하여 원어 그대로 ‘네와산냐나산냐야따나빠가데와’로 쓴다면 너무 길어 무슨말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알아 듣기 쉬운 한글로 풀이하였을 때 ‘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하느님 세계’라고 번역하였을 때 이해 하기 쉬울 것이다.
무상한 하느님
천상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런 세계에 사는 존재를 하느님이라 하는데, 이런 하느님들 역시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불환자들이 간다는 정거천을 제외하고 윤회할 수 밖에 없는 하느님인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야만 윤회계를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하느님이라는 번역어는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간 이외의 세상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보았느니,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느니 하는 말들은 실재하지 않은 표상을 취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단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에 대하여 표상을 취했을 때, 즉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였을 때 모습이 보이고,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이는 이 몸과 마음을 존재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라 한다.
빠알리니까야를 읽어야 하는 이유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거나 나를 찾는 수행은 필연적으로 일원론적 근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의 원인에서 시작 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창조주를 상정하고, 하나의 마음에서 비롯 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진짜 나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화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부정하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존재로 보지 않고 인식의 대상으로 보았을 때 결코 개념화 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딱딱함, 부드러움, 가벼움 등 느낌으로 보았을 때 개념화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표상은 실재 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자신이 만든 표상에 사로 잡혀 철저하게 종속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느낌은 변하기 마련이므로 모든 형성된 된 것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수행이고,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 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것이 빠알리니까야이다. 빠알리니까야를 읽었을 때 회의적 의심이 사라질 것으로 본다.
201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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