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님은 뭇삶들의 해방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6. 15:21

 

부처님은 뭇삶들의 해방자

 

 

 

상윳따니까야 56개의 주제 가운데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상윳따가 브라흐마와 브라흐마나에 대한 것이다.

 

창조주이자 최고신의 위치에서 끌어 내려진 하느님(브라흐마)

 

6상윳따를 브라흐마상윳따(Brahma Sayutta)라 한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하느님의 모음이라고 번역하였다. 부처님 당시 지배적인 종교가 브라만교이었는데 브라흐마는 창조주이자 최고의 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제6 상윳따에서는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창조주도 아니고 영원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이 신통으로 보여 준 것이다. 자신을 영원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망상적 유형의 바까 브라흐마(S6:4)에게는 전생을 보여 줌으로서 전도된 인식을 깨우쳐 주었고, 또 아라한 보다 낫다고 자만으로 가득찬 브라흐마(S6:5)에게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방문하여 신통을 보여 줌으로서 견해를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제6상윳따에서는 신통을 이용하여 최고신을 굴복시키다. 그런데 연기를 설한 상윳따에서는 연기법으로서 영원주의를 논파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깟짜나곳따경에서 부처님은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의 존재는 사라진다고 하였다. 조건에 따라 일어난 법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한 번 일어난 법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연기법으로 영원주의가 논파 된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브라만교가 위선과 모순과 거짓을 밝혀 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브라흐마를 창조주이자 최고신의 위치에서 끌어 내리고, 그 대신 불교적 세계관에 편입시킨다.

 

청정범행을 닦은 자가 가는 곳 하느님 세계(범천)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브라흐마의 개념은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는 존재를 말한다. 그런 브라흐마나는 창조주도 아니고 최고신도 아니라 청정범행을 닦아 하늘나라에 태어난 존재로 본다. 그런 하늘나라는 조건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무상하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태어난 브라흐마(하느님) 역시 윤회하는 무상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진정한 브라흐마(하느님)는 청정범행을 닦아 하늘나라(범천계)에 태어난 자이다. 이 청정범행을 빠알리어로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하고, 전재성박사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으로 번역하였다. 

 

브라흐마짜리야는 청정한 삶, 고결한 삶을 의미한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사무량심을 닦아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 하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브라흐마라고 재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세계관에서 브라흐마는 더 이상 창조주도 아니고 최고의 신도 아니다. 청정범행으로 마음을 해탈을 이루어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난 거룩한 존재로 본다.

 

이렇게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최고신 브라만을 부정한 것은 태생과 가문에 입각한 그 당시 지배계층인 바라문들의 교만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바라문들과 신흥종교인 불교와의 관계를 보면

 

7상윳따는 바라문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로 브라흐마나상윳따(Brahmaa Sayutta)’로 되어 있고, ‘바라문의 모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 지배적인 종교이었던 브라만교의 사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경을 말한다.

 

경에서는 바라문들과 신흥종교인 불교와의 실제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기득권층이라고 볼 수 있는 바라문들이 부처님에게 화를 낸다거나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고, 오만 방자하게 구는 등의 행위가 경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바라문]

“이 가엾은 여인은 언제 어느 때나 머리를 빡빡 깎은 수행자들을 칭찬한다. 가엾은 여인이여, 지금 내가 그대의 스승의 입을 닥치게 만들겠다”

 

(다난자니의 경- Dhanañjānīsutta, 상윳따니까야 S7:1(1-1),전재성님역)

 

 

바라문 가문에서 바라문녀 다난자니가 부처님과 상가를 신뢰하여 잔칫날 삼귀의를 하자 어느 바라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뗀 것이다. 그래서 “빡빡 깎은 수행자들을 칭찬한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다.

 

번역에서 빡빡깍은 수행자로 표현 된 것으로 보아 그 때 당시 부처님과 제자들은 삭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어 문다깟사(muṇḍakassa)’삭발한 머리(shaven-headed)’를 뜻한다. 바라문이 신흥종교의 수행자들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빡빡 깎은 수행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지 말라

 

이렇게 사제계급 바라문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이는 바라문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바라문들의 교만성을 엿 볼 수 있다.  이런 바라문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대했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세존]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것이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악꼬사까의 경-Akkosakasutta, 상윳따니까야 S7:2(1-2),전재성님역)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화내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한다.

 

화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화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이야기 한다.

 

 

[세존]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비난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하고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화내고 욕지거리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지거리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 바라문이여,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고 화내는 사람에게 다시 화내고 욕지거리하는 자에게 다시 욕지거리를 한다면 바라문이여,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악꼬사까의 경-Akkosakasutta, 상윳따니까야 S7:2(1-2),전재성님역)

 

 

 

상대방이 화내고 욕지거리 할지라도 거기에 동요 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화내는 사람만 손해일 것이다. 화를 받아 주지 않으니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한 손에 똥을 들고, 또 한 손에 시뻘건 숯불을 든 자가 던지려는 자세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던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의 손은 똥냄새가 진동할 것이고 숯불에 타들어 갈 것이다. 

 

지은 공덕을 파괴하는 분노

 

화를 내면 어떤 상태일까. 일반적으로 화를 내면 고통스럽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정신적 괴로움을 야기 하기 때문이다. 화를 내었다는 그 자체가 악업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또 악업을 지었다라고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가장 큰 손실은 이제까지 지은 공덕이 화를 냄으로 인하여 모두 파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벌컥 화를 내었다면 관계가 끊어 질 수 있고, 수십년 거래처가 있는데 사소한 말다툼으로 화를 내었다면 다시는 주문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아야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신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를 낸다는 것은 패배를 뜻한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지은 공덕이 무너졌다면 패배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는 어떨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kkodhassa kuto kodho

dantassa samajīvino,
Sammadaññā vimuttassa

upasantassa tādino.

 

[세존]

분노하지 않는 님, 길들여진 님에게

올바로 사는 님, 바른 지혜로 해탈한 님,

고요한 그와 같은 님에게

어떻게 분노가 생겨나겠는가?

 

(악꼬사까의 경-Akkosakasutta, 상윳따니까야 S7:2(1-2),전재성님역)

 

 

왜 이와 같은 게송이 나오게 되었을까. 앞서 문장에서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라고 두 번 말하면서 화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바라문은 오해 하였다. 번뇌 다한 부처님이 저주한다는 것이다. 화내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지만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저주의 말이기 때문에 화를 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저주의 말이 아님을 위 게송을 말한 것이다. 번뇌 다한 자는 성냄이라는 번뇌가 소멸하였기 때문에 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화를 안낼까

 

그렇다면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화를 돋구는 말과 행위를 보여 주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범부들은 참지 못하고 화내는 사람을 향하여 화를 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Ubhinnamattha carati

attano ca parassa ca,
Para
sakupita

ñatvā yo sato upasammati.

 

[세존]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악꼬사까의 경-Akkosakasutta, 상윳따니까야 S7:2(1-2),전재성님역)

 

 

화를 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화를 낼 만한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누군가 화를 돋구고 있다면 어지간한 인내력이 아니면 폭발하고 만다.

 

하지만 화를 내고 남으로 인하여 화를 냈다는 그 사실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더 큰 화를 내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과보를 피 할 수 없다. 당장 정신적 괴로움에 싸이고, 화를 내고 말았다는 자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이를 회상함으로 인한 자기학대 등 화를 벌컥 냄으로 인하여 잃게 되는 것은 너무나 많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잔인한 자나 살생을 많이 저지른 자는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한다. 탐욕이 많은 자는 축생으로, 화를 잘 내는 자는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이들 악처를 볼 수 있다. 지금 화를 내고 있다면 그 얼굴은 아무리 미인이라고 하더라도 악마의 이미지이다. 지금 화를 내는 그 마음이 지배하는 순간 아수라의 세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송에서는 알아차릴 것(sati, 새김)’을 말한다. 지금 화가 일어 나려고 하는 그 마음, 즉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느낌은 괴로운 느낌이다. 괴로운 느낌을 괴로운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알아차려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서로 이로울 것이라 한다. 

 

바라문이 생각하는 청정

 

이렇게 제 7상윳따에서는 브라만과 부처님의 대화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7상윳따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는 바라문 쑷디까와 부처님의 대화로 알 수 있다.

 

 

[쑷디까]

계행을 지니고 고행을 하더라도

어떠한 바라문도 청정하지 못하네.

명지와 덕행만을 갖춘 사람만이 청정하며

그 밖에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네.”

 

(쑷디까의 경-Suddhikasutta, 상윳따니까야 S7:7(1-7),전재성님역)

 

 

지배층이자 제관이었던 바라문들이 생각하는 청정의 개념이다. 여기서 명지와 덕행만을 갖춘자만이 청정하다고 하였는데, 명지와 덕행은 빠알리어로 윗자짜라나삼빤나(Vijjācaraasampanna)’이다. 부처님의 십호 가운데 하나인 명행족(明行足)’을 말한다. 

 

하지만 바라문 들에게 있어서 명지와 덕행의 의미는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명지(Vijjā)세 가지 베다를 말하고, 덕행(caraa)가문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생이 바라문이 아닌 자나 베다를 공부하지 않은 자는 청정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지배계층인 바라문들의 사상이었다.

 

부처님에 의하여 재해석된 청정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부정하였다.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존]

많은 격언을 암송하더라도

안에는 쓰레기로 더럽혀지고

위선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가문이 좋다고 성직자가 될 수 없네.

 

귀족과 사제와 평민의 계급이나

노예와 천민의 계급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마음을 모으며

항상 견고하게 정진하면

위없는 청정을 성취하네.

오 바라문이여, 그대는 알아야 하리.”

 

(쑷디까의 경-Suddhikasutta, 상윳따니까야 S7:7(1-7),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 계급의 위선과 모순과 거짓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태생적으로 바라문이라서, 가문이 좋다고 하여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누구나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드시 바라문 계급이 아니더라도 평민도 성직자가 될 수 있고, 심지어 노예나 불가촉천민도 성직자가 될 수 있다고 파격적으로 말한다.

 

이와 같은 발언은 매우 혁명적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으로 구분되어 신분이동이 불가능하였던 시대에 불가촉천민도 바라문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계급의 해체와 신분의 해방과 같은 혁명적 주장이다. 그런 성직자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삼 베다를 공부하고 태생과 가문이 좋은 바라문이어야만 성직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성직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S7:9)”라 하였다. 이는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라는 것이다. 행위에 따라 바라문도 되고 도둑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청정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재규정한 것이다.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부처님은 태생이나 가문에 따라, 삼 베다를 공부함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바라문은 거룩한 자라 하였다. 거룩한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라한을 뜻한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ssa pāra apāra vā           야사 빠랑 아빠랑 와

pārāpāra na vijjati,           빠라빠랑 나 윗자띠
 V
ītaddara visayutta,       위땃다랑 위상윳땅

tam-aha brūmi brāhmaa.       따마항 브루미 브라흐마낭

 

이 언덕도 저 언덕도 여의어

차안과 피안을 여읜 님,

격정이 없고 결박을 벗어난 님.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법구경, Dhp385, 전재성님역)

 

 

법구경 스물여섯 번째 품은 브라흐마나왁가(Brāhmaavagga, 바라문의 품)이다. 모두 41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 게송은 세 번째이다. 게송에서 이 언덕과 저 언덕을 건너고 모든 결박에서 벗어난 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브라흐마나(brāhmaa, 바라문)는 번뇌를 부순자로서 거룩한 님(아라한)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고 하였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 졌다. 법구경을 읽을 때 번뇌 다한 자를 아라한이라 하지 않고 왜 브라흐마나(바라문)라고 하였을까 의심하였는데, 그 때 브라흐마나(바라문)는 아라한을 지칭한 것임을 알았다. 이는 부처님이 브라흐마나의 의미를 원래 대로 재해석 해서 그렇다. 이런 내용은 법구경 뿐만 아니라 상윳따니까야를 포함하여 초기경전에서 일관되게 나온다. 초기경전에서 재해석된 브라흐마나는 번뇌다한 아라한과 동급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부처님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에 열광하는 이유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계급제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진정한 바라문이란 아라한이라고 새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되면 예전의 태생과 가문에 따라 베다를 공부하던 바라문의 개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바꾸어져 버린다. 더구나 창조신이자 최고신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던 부라흐마(하느님) 마저 불교적 세계관인 색계와 무색계천의 신으로 재해석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 기득권 층의 종교와 사회제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무력화 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뭇삶들에게 실체도 없는 창조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고, 또 네 가지 계급에 따른 속박으로 부터도  해방 시켜 주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부처님은 해방자이다. 그런 내용이 빠알리니까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Gautama Buddha

A statue of the Buddha from Sarnath, 4th century CE(Wikipedia)

 

 

 

오늘날 우니나라의 현실은 부처님 당시의 현실과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일신을 믿음에 따라 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 나지 못하고 있고, 경제적 이유로  신분이 고착화 되어 감에 따라 제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신의 속박과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은 뭇삶들의 해방자이다.  부처님과 가르침에 열광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2012-12-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