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8. 14:4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

 

 

 

 

대애도비구니경의 팔경계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들은 내용이다. 인천 Y선원 S선사가 법문하고 있는 불교강좌에서, 선사는 비구니에 대한 계를 설하였다. 비구니 수계에 대한 법문이다.

 

법문에서 선사는 대애도비구니경의 팔경계를 설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대계를 지니는 비구가 비구계를 받은지 보름 이상만 되더라도 비구니는 당연히 모시고 예배하여야 하느니라.” 이라든지,  비구니는 비록 백 세 동안 대계를 지녔더라도 이제 대계를 받은 비구보다 아랫 자리에 앉아서 당연히 겸손하고 공경스럽게 예를 지어야 하느니라.” 등으로 되어 있다.

 

비록 10여년전에 한 사찰에서 설법한 내용을 테이프로 틀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모든 것에 있어서 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에 맞지 않다. 더구나 이런 남녀차별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다.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라고

 

부처님은 부처님당시에 뭇삶들에게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고, 동시에 제도와 관습과 인습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사성계급을 타파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 묘사된 여성의 평등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nta isīhi pattabba

hāna durabhisambhava,
Na ta
dvagulapaññāya

sakkā pappotumitthiyāti.

 

[빠삐만]

 “성자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

그 경지는 성취하기 어려우니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네.”

 

(소마경-Somāsutta-쏘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5:2(1-2),전재성님역)

 

 

악마(마라)가 수행녀(비구니) 소마(Somā)에게 한 말이다. 악마가 접근해서 자극적인 질문이나 비웃음으로 수행녀의 명상수행을 방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지혜는 고작 두 손가락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빠알리어 dvagulapaññāya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잴 수 있는 만큼의 크기로, 아주 작은 양을 뜻한다. 따라서 여자들이 아무리 수행을 하여도 성자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웃는 것이다.

 

남녀 차별을 이야기하는 자는 악마(māra)

 

이에 대하여 수행녀 소마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Itthibhāvo ki kayirā

cittamhi susamāhite,
Ñ
āamhi vattamānamhi

sammā dhamma vipassato.

Yassa nūna siyā eva

itthāha purisoti vā,
Kiñci v
ā pana aññasmi

ta māro vattumarahatīti.

 

[쏘마]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소마경-Somāsutta-쏘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5:2(1-2),전재성님역)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깨달은 자는 성이나 어떠한 규정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소마는 이미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남녀 차별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모두 악마(māra)일 뿐이라고 하였다.

 

악마가 성적으로 유혹을 하는 장면

 

이렇게 초기경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여자라도 최상의 경지에 올라 갈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빅쿠니상윳따(Bhikkhūnī Sayutta)에서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이 수행녀 고따미(Gotamī) 이야기이다.

 

악마가 수행녀 고따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Kinnu tva hataputtāva

ekamāsi1 rudammukhī,
Vanamajjhagat
ā ekā

purisa nu gavesasīti.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상윳따니까야 S5:3(1-3),전재성님역)

 

 

수행녀 고따미는 아들이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 고따미에게 악마가 접근하며 남자(purisa)를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 본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왕이라고 볼 수 있는 악마가 성적인 유혹을 하는 장면이다.

 

악마는 고따미에게 접근하여 어린 아이를 잃었다는 것을 상기시기면서 어린 아이를 낳으라는 모성적 본능을 일깨운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유혹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어린 아이에 대한 여성적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이에 대하여 수행녀 고따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Accanta mataputtā'mhi purisā etadantikā,

Na socāmi na rodāmi na ta bhāyāmi āvuso.

 

[고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상윳따니까야 S5:3(1-3),전재성님역)

 

 

자식을 잃은 수행녀 고따미는 인간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이나 남자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또한 남자 역시 지나간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악마의 모성자극에 따른 유혹을 물리친 수행녀 고따미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번뇌가 소멸되었다.

 

죽음과 불사(不死)

 

수행녀 고따미 이야기는 법구경에 인연담으로 전해져 온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ce vassasata jīve           요 쩨 왓사사땅 지웨

apassa amata pada,          아빳상 아마땅 빠당

Ekāha jīvita seyyo            에까항 지위땅 세이요

passato amata pada.           빳사또 아마땅 빠당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법구경, Dhp114,전재성님역)

 

 

빠알리 게송에서 아따마(amata)는 불사(不死)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실제하는 사건으로 체험할 수 없다. 단지 남의 죽음을 보고서 자신의 죽음을 사유하기 때문에 간접적 체험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바탕에는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몸, 나의 것,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 되는 존재의 다발(오온)은 다시 죽음과 동일시 된다. 오온의 파괴를 죽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갖고 있지 않는 아라한의 경우 오온의 파괴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아라한의 체험은 구조적으로 더 이상 죽지 않는 불사로 보는 것이다.

 

K스님의 법구경 문제점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수행녀 고따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법구경의 인연담을 보면 대부분 K스님의 법구경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법구경-담마파다의 역자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K스님의 법구경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법구경-담마파다 해제에서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여기서 K스님의 ‘감각기관을 대상으로 마음을 집중시켜 닙바나를 깨닫는다.’는 이상한 이론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한 명제는 니까야나 주석서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법구경에서 부처님의 말이라고 끼어 넣어 번역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의적인 번역은 단순히 번역상의 실수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왜곡으로 불교수행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게 만들고 있다.

 

(법구경-담마파다 해제, 전재성박사)

 

 

K스님의 책 법구경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자의적 해석과 소설적 구성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

 

그래서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에 대하여 거해스님의 책이 아닌 전재성박사의 책에서 인용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hpA.II.270-275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끼싸 고따미와 관련된 이야기(Kisagotamivatthu)이다. 한때 싸밧티 시에 사십 고띠의 재산을 지닌 부호가 살았는데 그 재산이 갑자기 숯으로 변했다. 상인은 비탄해 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어느날 한 친구가 와서 ‘네가 가게에 숯을 쌓아놓고 팔면, 사람들이 ‘상인들이 옷이나 기름이나 꿀이나 당밀을 파는데 당신은 여기서 숯을 파는 군요’하면, ‘내 것을 내가 팔지 못하면, 무엇을 합니까?’라고 말해라.’고 했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집 딸인 끼싸 고따미(Kisa Gotami)-‘끼싸’는 갸날팠던 그녀의 몸매를 뜻한다-가 와서 ‘상인들이 옷이나 기름이나 꿀이나 당밀을 파는데 당신은 여기서 노란 황금을 파는 군요’라고 말했다. 상인은 ‘자매여, 황금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녀가 숯을 그의 손에 집어주자 노란 황금으로 변했다. 그는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그녀는 시집가서 그 아들이 걸음마를 한 즈음에 죽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비탄에 잠겨 죽은 아기를 되살리려고 등에 업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내 아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물으며 약을 구하러 다니자 사람들이 비웃었다.

 

어떤 슬기로운 자가 ‘여인이여, 나는 그대의 아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모르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소’라고 말하고 그녀를 부처님께 인도했다.

 

그녀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나의 아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해 오면 살려 주겠다.’라고 했다.

 

 

 

 

 

The Story of Their Kisagotami

 

 

 

끼싸 고따미는 죽은 아이를 등에 업고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집집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다는 것과 마을마다 산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그녀에게 생자필멸의 도리를 일깨웠다. 그러자 그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Dhp.287과 그 주석 참조)

 

 

이 부분에 있어서 법구경 287번 게송을 보았다. 287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Ta puttapasusammatta          땅 뿟따빠수삼맛땅

byāsattamanasa nara,          비아삿따마나상 나랑
Sutta
gāma mahogho va         숫땅 가망 마호고 와

Maccu ādāya gacchati.            맛쭈 아다야 갓차띠

 

 

자식들도 아버지도 친척들도

그대에게 피난처가 아니다.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힌 자에게

친지도 물론 피난처가 아니다.

(법구경, Dhp287, 전재성님역)

 

 

주석에 따르면, 음식이나 음료 등을 주면서 어떠한 필요한 것으로 도와도, 살아 있을 때나 피난처가 되는 것이지, 죽음에 임박해서는, 죽음이 어떠한 수단으로도 추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피난처가 되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287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역시 끼사 고따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이 게송을 읊자 고따미가 예류자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지는 인연담을 계속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녀는 죽은 아이를 내려놓고 출가하여 수행녀가 되었다. 그후 포살당에서 램프의 불꽃을 보고 어떤 불꽃은 타오르고 어떤 불꽃은 깜박이는 것을 보고는 이 세상의 뭇삶들이 타오르기도 하고 깜박이기도 하지만 열반에 든 자, 그만은 시설되지 않는다.’라고 깨우쳤다.

 

부처님께서는 향실에서 몸을 나투어 그녀 앞에 나타나 그녀의 생각을 인가하고 ‘열반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열반을 한 순간을 사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라고 가르쳤다. 그러자 그녀는 가르침을 듣고 네 가지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14번 게송 인연담 , 전재성박사역)

 

 

인연담을 비교해 보면

 

인연담을 보면 고따미는 부처님의 생자필멸의 도리에 대한 설법을 듣고 예류자가 되었고, 램프의 불꽃을 보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였다. 램프의 불꽃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K스님 역과 전재성박사 역이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램프불꽃 이야기

전재성박사역

K스님역

그후 포살당에서 램프의 불꽃을 보고 어떤 불꽃은 타오르고 어떤 불꽃은 깜박이는 것을 보고는 이 세상의 뭇삶들이 타오르기도 하고 깜박이기도 하지만 열반에 든 자, 그만은 시설되지 않는다.’라고 깨우쳤다.

어느 날 그녀는 기름 램프를 맑히고 있었다. 그때 램프불이 펄럭거리다가 꺼지는 듯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일체 중생이 죽었다가 또다시 태어난다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빠알리니까야에서 열반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표현방법은 등불이다. 그래서 라따나경에서는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Sn2.1)”이라 하였다. 등불이 꺼진 것을 열반으로 설명한 것이다.

 

등불이 유지 되는 것은 연료가 있기 때문이다. 땔감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야 불이 꺼지지 않는 것처럼, 뭇삶(중생) 역시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땔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삶의 불꽃이 유지 되는 이유

 

그런 땔감은 무엇일까. 상윳따니까야의 아딧따빠리야야경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S35:28)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딧따빠리야야경-Ādittapariyaya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8(3-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이 불타고 있는데,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태어남이 있고 결과적으로 절망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뭇삶의 불꽃이 유지 되기 위해서는 탐욕이라는 땔감, 성냄이라는 땔감,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땔감은 외부에서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탐--치가 남아 있는 한 불꽃은 계속 타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꽃이 꺼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이 소진 되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탐--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일어 나지 않았을 때 불꽃은 꺼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라따나경에서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Sn2.1)”라고 노래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열반에 든 자는 시설(施設)되지 않는다

 

인연담에서 등불이 깜박이는 것을 보고 고따미가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을 보면 전재성박사의 글과 K스님의 글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K스님역의 경우 램프불이 펄럭거리다가 꺼지는 듯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일체 중생이 죽었다가 또다시 태어난다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라고 하였으나, 전재성박사역은 이 세상의 뭇삶들이 타오르기도 하고 깜박이기도 하지만 열반에 든 자, 그만은 시설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거해스님역의 경우 꺼진 불꽃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열반에 든자는 시설(施設)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불꽃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존]

“밧차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물질로써 여래를 묘사하려고 하지만, 여래는 그 물질을 끊어졌습니다. 여래는 물질의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 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밧차여,

참으로 여래는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 -Aggivacchagotta su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불이 꺼진 후로 묘사된 열반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는 열반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있다고 보는 영원주의를 배격한 것이고, 또 열반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없다고 보는 단멸론적 허무주의를 배격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사후에 태어나는 것, 태어 나지 않는 것,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이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법구경, 맛지마니까야 등 초기경전 도처에서 일관되어 있고 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초전법륜경 고성제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라는 말이 있다. 수행녀 고따미가 어린 아들을 잃은 것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piyehi vippayogo)’이고, 어린 아들의 죽음을 본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appiyehi sampayogo)’이라 볼 수 있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은 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이건 형성된 이건 무엇이든 간에 무상하기 때문에 헤어 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돌아 다녀 보지만 산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역시 피 할 수 없다. 싫어 하는 사람과 만남은 괴롭다. 그래서 한시 바삐 떠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해서 떠날 수 없는 것도 있다. 예기치 않게 찾아 오는 각종 질병, 치매등과 같이 원하지 않는 장애 등 과 같은 것이다. 늙어 지는 것, 병드는 것도 만나고 싶지 않고, 더구나 죽음 역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 할 수 없는 것이다. 고따미의 아들이 죽은 것 역시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라 볼 수 있다.

 

속세의 번뇌 없이 나는 살아가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였던 고따미는 절망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이다.

 

 

Sabbattha vihatā nandi

tamokkhandho padālito,

Jetvāna maccuno5 sena

viharāmi anāsavāti.

 

[고따미]

모든 환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존재의 다발은 파괴되었으니

죽음의 군대에 승리하여

속세의 번뇌 없이 나는 살아가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상윳따니까야 S5:3(1-3),전재성님역)

 

 

 

2012-12-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