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적 유형의 브라흐마 바까
반기독교적 정서
동서양의 이념과 사상이 대립하고 혼재 되어 있는 곳이 우리나라이다. 남북으로는 아직도 이데올로기가 다름에 따라 대치하고 있고, 남에서는 종교가 다름으로 인하여 때로 종교간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불교의 경우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근대화시기 이후부터 아직도 전근대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종교로 간주되기도 한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사회 분야에서 유일신교의 영향이 날로 확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유일신교의 세상이 된 것은 아니다. 반기독교적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몰려 산다는 강남에서도 불교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반기독교적 정서에 기인한 영향도 무시 할 수 없다.
불교에 반기독교적 정서가 만연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출세하려면 기독교를 믿어라’는 말이 있지만 정서적으로 맞지 않을 경우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본다. 그럴 경우 반기독교적 정서의 영향에 따라 불교를 선택할 수 있다.
불교에도 수 많은 신이 있는데
반기독교적 정서를 갖는 불자들은 유일신교의 창조신이나 신관 등에 심한 거부감을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복의 대상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관세음보살 등 원력보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불교에도 수 많은 신이 있다. 법당에 가면 신중단이 있어서 수 많은 신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호법신장’이라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익숙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원음을 접한 불자들에게 있어서 신이라는 존재는 매우 낯설다. 부처님은 사성제 등 현세적인 가르침만 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회의론자들은 “부처님이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경전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신통 등에 대하여 자신들의 깜냥으로 부정하고, 심지어 경전이 조작 되었다는 등의 견해를 내 놓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빠알리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본다.
불교의 세계관을 알아야
빠알리니까야를 읽어 보면 무엇이든지 명확하다. 보이지 않는 신들의 이야기나 신통 등 초월적인 현상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초반부에서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는 모두 56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초반부 주제는 부처님과 신들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박사의 상윳따니까야 1권의 경우 모두 11개의 상윳따가 있는데, 이 중 8개가 부처님과 다른 윤회하는 존재와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kamadhatu)
초기경전에서는 우주를 3가지 세계와 다수의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낮은 세계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kamadhatu)이다. 이 세계의 추진력은 감각적 욕망이다. 다음과 같이 표로 만들 수 있다.
No |
구 분 |
비 고 |
1 |
극단적인 고통을 겪는 지옥계(niraya) |
|
2 |
어리석은 축생계(tiraccanayoni) |
|
3 |
비참한 아귀계(pettivisaya) |
|
4 |
아수라(asuravisaya) |
신들의 적대자, 33천근처 |
5 |
해탈에 적합한 인간계(manussaloka) |
|
6 |
복락과 아름다움과 권력과 영광을 누리는 천상계(sgga) |
욕계천상 |
이와 같이 감각적 욕망이 투영된 여섯가지 세계가 있다.
색계와 무색계
그 다음에 높은 세계가 색계와 무색계이다.
구 분 |
내 용 |
비 고 |
미세한 물질계 (rupadhatu, 색계) |
감각적 쾌락의 거친물질은 사라지고 미세한 물질만이 존재하는 세계 |
하느님들이 사는 세계 (범천계) |
미물질계 (arupadhatu, 무색계) |
미세한 물질마저 사라진 세계 |
색계와 무색계는 욕망이 투영된 욕계천상과 달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수승한 천상’이다. 선정의 깊이에 차별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선정에서 오장애가 업압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정상태에서 버려지는 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arāga), 분노(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흥분과 회한(uddhaccakukkucca), 의심(vicikicchā) 이렇게 다섯가지이다. 따라서 색계와 무색계에서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는 욕계 보다 수승한 존재들이 사는 세계이고 또 그 세계는 남녀 구별이 없는 중성이라 한다.
그런데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들이 사는 일컬어 범천계라 한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하느님들이 사는 세계’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들은 실재하는 것일까.
허구의 세계일까?
상윳따니까야의 부록에 있는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불교의 세계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신화적인 비합리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인 명상수행의 차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합리적으로 조직되었다. 물론 고대 인도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보편적인 우주의 정신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세계관, 상윳따니까야 부록, 전재성박사)
불교의 세계관은 있을 수 없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욕계와 선정수행의 깊이를 반영하고 있는 색계와 무색계로 이루어진 세계는 보편적인 우주의 정신세계를 다룬 것이라 한다.
형성조건을 보면
이런 세계의 형성조건은 윤리적이고 명상적인 조건을 얼마만큼 성취하였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형성조건 |
비 고 |
지옥 |
잔인함과 살생을 저지르는 것에 의해 태어남 |
|
아귀 |
인색함과 집착에 의해서 태어남 |
|
축생 |
어리석음과 탐욕에 의해서 태어남 |
|
아수라 |
분노에 의해서 태어남 |
|
인간 |
오계에 대한 인식에서 태어남 |
|
욕계천상 |
믿음과 지계와 보시와 같은 윤리적 덕목을 지켜야 태어남 |
|
색계 |
첫번째 선정에서 네 번째 선정까지는 명상의 깊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태어남 |
최상층(정거천)의 경우 불환자의 경지를 조건으로 태어남 |
무색계 |
비물질적 선정의 깊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태어남 |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
형성조건을 보면, 지옥의 경우 살생을 저지르는 자가 태어 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오계를 인식하고 준수하는 생활을 하면 태어날 수 있다.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수행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이와 같은 형성 조건은 다름 아닌 업에 따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악처에 나기도 하고 선처에 나기도 한다.
욕계천상에 나려면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공덕을 쌓으면 된다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선업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 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모든 종교의 공통된 사항이다.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하지만 부처님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가르침을 목적으로 설하지 않았다. 조건에 따라 형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D16)”라 하였다. 또 꼰단냐가 법의 눈이 열렸을 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S56:11)” 하였고, 법구경에서도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 Dhp277)”라 하였다.
이는 조건에 따라 형성된 세상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수승한 브라흐마의 세계(하느님 세계) 역시 무상한 세계이다. 이런 무상한 삼계의 스승이 부처님이다.
하늘과 인간의 스승
부처님은 삼계와 육도 윤회를 뛰어 넘은 불생불멸하는 자이다. 또 부처님은 일체를 아는 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M26)”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 점진적으로 지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동시에 완성된 지혜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또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가 완전하여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에 ‘위 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득각)’이라 한다.
이렇게 일체지자이자 무상정등각자인 부처님은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을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의미로 ‘천인사(sattha devamanussanam)’라 부른다. 인간계에 있으면서 최상의 지혜와 완전한 청정으로 천상계의 모든 신들을 뛰어 넘은 것이다.
불교에서 신들은
하늘과 인간의 스승으로서 부처님은 인간 뿐만 아니라 하늘 사람들도 교화 하였다. 그런 내용이 상윳따 니까야에 실려 있다. 제1상윳따인 하늘사람 상윳따 (Devatā Saṃyutta_, 제2상윳따인 하늘아들 상윳따(Devaputta Saṃyutta), 제4 상윳따인 마라상윳따(Māra Saṃyutta), 제6 상윳따인 브라흐마(하느님, Brahma Saṃyutta)가 그것이다. 비록 2600여개 달하는 경중에 몇 십개에 달하지 않지만 하늘과 인간의 스승으로서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 상윳따에 등장하는 신들은 어떤 성격일까.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따르면, 불교에서 신들은 우주적 전개에서 창조적 역할을 하는 불사의 신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이전에 인간세계에 살다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결과로 천상에 태어나 사는 승화된, 지복의 빛나는 존재라 한다.
그 신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묶여 있어서 깨달은 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무상하고 윤회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일체지자이고 무상정득각자이자 하늘과 인간의 스승인 부처님이 이들 신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이들 상윳따의 이야기들이다.
제1상윳따에 등장하는 하늘사람
제1상윳따에 등장하는 하늘사람은 모든 세상이 잠든 고요한 밤중에 부처님을 찾아 뵙고 설법을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들이 부처님에게 질문하고 부처님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부처님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신들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처님에게 귀의 한다.
제 4상윳따에 등장하는 마라
제 4상윳따에 등장하는 마라는 불교적 의미의 악마를 말한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에서 유혹자로서 수행자의 해탈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악마들은 허구일까? 해제에 따르면 악마가 단순히 심리적인 투사로 여겨졌다면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깨달음의 이후에 악마가 그들을 추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마라는 타화자재천에 사는 신이라 한다. 이런 악마는 언제 물러갈까. 초기경에 따르면, 허세를 부리는 악마에 대하여 ‘악마라고 안다’라고 선언하면 물러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초기경에서 의미하는 하느님(브라흐마)에 대한 개념
이렇게 하늘사람, 하늘아늘, 마라 같은 천신이 있는데 이는 욕계천상의 존재이다. 그래서 욕심내고, 성내고, 질투한다. 그러나 제6상윳따에 등장하는 브라흐마는 욕계천신 보다 차원이 높고 더 수승하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느님으로 번역된 브라흐마 역시 천신이다. 그 범위는 색계와 무색계이다. 감각적 욕망을 벗어난 천신이다. 이들 브라흐마에 대하여 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하느님은 브라흐마(범천)라고 하는데, 바라문교에서 우주의 창시자이자 제의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최고의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경에서 의미하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다.
(상윳따니까야 해제, 1권, 전재성박사)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브라흐마는 창조주라 불리웠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형성된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윤회속의 범부중생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초기경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경에 등장하는 브라흐마들(하느님들)은 그들의 차원의 세계에서 산다. 그들의 지배자를 마하브라흐마(Mahabrahma,대범천, 위대한 하느님)라 한다. 마하브라흐마는 제 6상윳따에 등장한다.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브라흐마) 바까
초기경에 등장하는 브라흐마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한 추종자이다. 청원경에 등장하는 ‘사함빠띠(sahampati)’가 대표적이다. 또 하나는 우주적 수명에 고취되어 자만과 망상에 사로 잡힌 자들이다. ‘바카(baka)’가 대표적이다.
망상적 유형의 브라흐마 바까는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바까]
“존자여, 오십시오. 존자여, 잘 오셨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오시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존자여,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것보다 높은 다른 벗어남은 없습니다.”
(바까브라흐마경-Bakabrahmasutta-하느님 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6:4(1-4),전재성님역)
브라흐마 바까는 영원주의자의 상징이라 한다. 경에서 ‘다른 벗어남은 없다(uttariṃ nissaraṇaṃ)’라고 하였는데, 이는 영원주의 이외에 다른 윤회로부터 출리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영원주의만이 윤회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망상을 갖게 된 것은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주석에 따르면 바까는 전생에 선정을 닦아 색계사선천에 해당되는 광과천에 태어났다. 수명이 500겁에 달한다. 다음에 태어난 곳은 아래 세계에 해당되는 수명이 8겁인 광음천(이선천)에 태어났다. 그 다음에 태어난 곳이 경에서 언급된 바까로서 초선천에 태어 났는데 수명은 1겁이다.
바까 하느님(브라흐마)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렇게 갈수록 낮은 곳으로 적은 수명으로 윤회 하며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하여 영원주의자가 된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바까의 전생이야기를 들려 준다.
[바까]
“고따마여, 우리 일흔 두 사람은 공덕을 쌓아
세상의 주재자가 되고 생사를 뛰어넘었네.
하느님으로서 최상의 삶은 베다로 인한 것이니
우리에게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네.”
[세존]
“그 수명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지만
바까여, 그대는 길다고 생각하네.
하느님이여, 그대의 수명은
나랍부다라고 나는 알고 있네.”
[바까]
“존자여, 나는 무한을 보는 자로서
태어남과 늙음의 슬픔을 넘어섰네.
나의 지난 계행과 덕행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을 말해보라.”
[세존]
“그대는 갈증에 신음하고 더위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을 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에니 강 언덕에서 습격당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을 풀어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사악한 용왕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갠지스 강 급류 속에서
사로잡은 배를 신통의 힘으로
공략하여 놓아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옛날 나는 그대의 제자로 깝빠라 불렸고
올바른 깨달음이 있다고 그대는 나를 인정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바까]
“틀림없이 당신의 나의 생애를 바로 알고 있고
또한 다른 것도 알고 있으니,
당신은 깨달은 님, 참으로 당신의 광휘로운 위력이
그야말로 하늘나라를 밝히고 있네.”
(바까브라흐마경-Bakabrahmasutta-하느님 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6:4(1-4),전재성님역)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영원히 산다는 착각에 빠지고 영원히 살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 났다고 삿된 생각을 가진 브라흐마 바까에게 전생이야기를 들려 준다. 전생이야기를 듣고 바까는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든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든지, 변하는 것을 실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전도된 인식을 뉘우치게 된다.
이와 같이 불교적 세계관에서 보았을 때 하늘에 사는 신들은 윤회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신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부처님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윤회할 수밖에 없다. 천상에서 수명대로 오래 사는 하느님(브라흐마)일지라도 윤회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 부처님은 일체를 다 아는 자이고,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무상정득각자이다. 또 인간계에 있으면서 최상의 지혜와 완전한 청정으로 천상계의 모든 신들을 뛰어 넘는 자이기 때문에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다.
Yānīdha bhūtāni samāgatāni 야-니-다 부따-니 사마-가따-니
Bhummāni vā yāni va antajikkhe, 붐마-니 와 야-니 와 안딸릭케
Tathāgataṃ devamanussapūjitaṃ 따타-가땅 데와마눗사뿌-지땅
Buddhaṃ namassāma suvatthi hotu. 붓당 나맛사-마 수왓티 호뚜
신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이렇게 오신님,
부처님께 예경하오니, 여기에 모인 존재들이여,
땅에 있는 존재이건 공중에 있는 존재이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suttaṃ- 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2012-12-05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 수행녀 고따미의 인연담 (0) | 2012.12.08 |
---|---|
부처님은 뭇삶들의 해방자 (0) | 2012.12.06 |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떼윗자경(D13) (0) | 2012.12.04 |
교학만 배웠을 때, 물라빠리야야경(근본법문의 경, M1) (0) | 2012.12.01 |
우리를 버린 청춘, 무엇에 의지해야 하나? (0) | 2012.11.29 |